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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쿠치 칸] 시즈가타케賤ヶ岳 전투 (1) ┗ 日本合戰譚



  이 글은 패전 이전 일본의 유명 대중소설 작가로 출판사 분게이슌쥬文藝春秋의 창립자 겸 초대 사장이자, (고인이 된 친구들의 이름을 따) 아쿠타가와 상芥川賞 / 나오키 상直木賞이라는 일본의 저명한 문학상을 만들어내기도 한 키쿠치 칸菊池寬 씨의 저서《일본합전담日本合戦談》에 포함된【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合戦 】편을 번역한 글입니다.

  덧붙이자면, 이 글의 내용은 일본 전국시대를 둘러싼 지금의 통설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자인 키쿠치 씨가 별세하신 때로부터만 쳐도 이미 68년이 지났으니 말이죠. 좋든 싫든 현대의 역사가들이 '1차 사료가 아니다' 는 이유로 가지쳐낸 내용이 여기에는 제법 섞여있기 때문에, 이 내용을 그대로 믿기보다는 흥미 위주로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키요스 회의清洲会議에서 일어난 일

  텐쇼 10년(1582) 6월 18일, 오와리尾州 지방 키요스清洲의 우에하라 지로에몬植原次郎右衛門 저택의 넓은 방에서 오다 가문織田家의 숙장宿将들이 모여, 주군 가문의 후사를 둘러싸고 대회의를 열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키요스 회의이다.

  그 해 6월 2일, 쿄토 혼노사本能寺에 있던 우다이진右大臣 (오다織田) 노부나가信長는 그 가신인 코레토(아케치明智) 휴가노카미 미츠히데惟任日向守光秀의 반역으로 죽음을 당하고, 그 장남인 산미츄쇼三位中將 (오다織田) 노부타다信忠도 니죠 성二条城에서 아버지와 같은 운명을 맞았다. 

  당시 오다 가문의 으뜸가는 신하였던 시바타 슈리노스케 카츠이에柴田修理亮勝家는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를 토벌하기 위해 삿사 쿠라노스케 나리마사佐々内蔵助成政 / 마에다 마타자에몬 토시이에前田又左衛門利家 / 사쿠마 겐바노스케 모리마사佐久間玄蕃允盛政 / 그리고 자신의 양아들인 (시바타) 이가노카미 카츠토요伊賀守勝豊 등을 거느리고 엣츄越中 지방 우오즈魚津에 재진 중이었다. 혼노사의 변이 알려진 것은 6월 4일 밤이 된 이후였는데 진중의 동요는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기에, 싸움을 중도에 멈추고(역주 : 사실 우오즈 성은 노부나가가 죽은 다음 날인 6월 3일, 시바타 군에게 함락되어 있었다) 카츠이에는 에치젠越前으로, 모리마사는 토야마富山로 철수했다.

  그리고 타키가와 사콘쇼겐 카즈마스滝川左近將監一益도 무사시노(武蔵野, 역주 : 실제로는 코즈케上野 지방과 무사시武蔵 지방의 접경지대인 칸나 강神流川에서 타키가와 군과 호죠 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병력적으로 열세한 타키가와 군이 참패하고 칸토에서 철수했다)에서 호죠 사쿄다유 우지마사北条左京大夫氏政와 전투를 벌이고 있다가, 급히 강화를 맺고 비슈(尾州, 역주 : 오와리 지방이라는 의미인데, 실제로 카즈마스의 본거지 나가시마는 이세伊勢 지방에 있다) 나가시마長島로 돌아갔다.      

  그리고 모리 쇼조 나가카츠(森勝蔵長勝, 역주 : 무사시노카미 나가요시武蔵守長可. 모리 란마루森乱丸의 형)는 우에스기 가문과 싸우고 있다가, 시나노信濃 지방 카와나카지마川中島로 물러나 마츠모토松本를 거쳐 미노美濃 지방으로 퇴각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시바 치쿠젠노카미 히데요시羽柴筑前守秀吉 말인데, 이 당시 츄코쿠의 모리 다이젠다이부 테루모토利大膳大夫輝元 공략에 나서 수공水攻으로 타카마츠 성高松城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쿄토에서 일어난 흉보가 히데요시의 진지에 도달한 것이 6월 3일 자시(子の刻, 밤 11시 ~ 다음 날 0시)로, 노부나가가 살해되었다는 정보를 숨기고서 5일 아침, 드디어 모리와 강화를 맺는데 성공했다. 강화가 성립되자 나는 듯이 치고 올라가 야마자키 타카라데라山崎宝寺 텐노 산天王山에서 미츠히데의 허를 찔러, 미츠히데로 하여금 삼일천하의 비애를 맛보게 했다. 

  이 야마자키 전투山崎合戦야 말로, 바로 히데요시가 천하를 잡게 한 전쟁이었다. 그리하여 노부나가가 남긴 사업에 위대한 발언권을 움켜쥐었던 것이다. 카츠이에 이하 여러 무장들이 사변에 대응하여 입경을 하려 했음에도, 히데요시의 신속한 행동에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노부나가가 남긴 자손들과 공신들 다수가 존재하는 이상 히데요시가 곧바로 천하를 쥘 수는 없었다. 자손들 가운데 누구를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앉히느냐는 점이 큰 문제였다.

  우선 노부나가와 노부타다의 피를 물려받은 자라면 (노부나가의) 차남인 노부카츠信雄, 3남인 노부타카信孝, 그리고 노부타다의 아들인 산보시마루三法師丸가 있었다.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구를 주군 가문의 후계자로 삼느냐가 키요스 회의의 주제였다.   

  우에하라 저택의 넓은 방에서 노부카츠 / 노부타카들의 정면 가까이에 있는 사각기둥에 몸을 기대고 있는 자가 바로 카츠이에였다. 카츠이에의 조카 세 명도 기둥 근처에 앉았다. 히데요시는 툇마루 근처에 있었고, 이케다 무사시 뉴도 쇼뉴(池田武蔵入道勝入, 츠네오키恒興) / 니와 고로자에몬노죠 나가히데丹羽五郎左衛門尉長秀 이하 다른 사람들도 각자 자리에 착석했다. 회의장 앞의 정원에는 오다 가문의 사무라이 8백여 명이, 카츠이에가 데리고 온 3백여 명의 사무라이들과 함께 삼엄한 경비를 하고 있었다.

  이 자리의 장로인 카츠이에가 먼저 입을 열며 말하길, "오다 가문의 후계자로는 영리하신 산시치 노부타카三七信孝 님을 추대하여야 한다." 고 말했다. 제일가는 위세를 자랑하는 카츠이에의 말인지라, 이견을 가진 부장部将이 있다 하더라도 쉽게 입 밖으로 내기가 힘들었다. 회의장 전체가 고요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중에, 천천히 이견을 꺼낸 것이 히데요시였다.    
     
  "시바타 님의 말씀이 지당하시긴 하지만, 노부타카 님이 영리하시다고 해서 천하를 잇게 하는 건 과연 어떨까요. 노부나가 공의 적손嫡孫 산보시 님이 계신 이상, 이 분을 세우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어떻습니까." 언사는 정중했으나 카츠이에와 대립하는 것이었다. 침묵을 지키던 일동은 서서히 떠들석해지기 시작했다.

  카츠이에가 추대한 노부타카는 3남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차남이었다. 노부카츠와 노부타카는 에이로쿠 원년(1558) 같은 달에 태어났고, 노부타카 쪽이 20여 일 먼저 태어났는데도 노부카츠가 노부타다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데 비해 노부타카는 이복동생이었기에 사람들은 노부카츠를 귀히 여겨, 이쪽을 먼저 노부나가에게 보고하여 차남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노부나가에게 출생을 먼저 보고했기에 노부카츠가 차남이 된 것으로, 노부카츠의 자질이 범용凡庸했던 데 비해 노부타카는 상당한 인물이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마음 속으로 내심 불우함을 한탄하였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카츠이에에게 기댄 것도 지당한 일이며, 카츠이에로서도 그를 추대하여 자신의 위망을 늘리려 한 것도 당연한 행동이리라.

  히데요시의 반대는 좌중을 동요시켰으나, 그러나 히데요시의 주장에도 정당한 이유가 존재했다.《타이코키太閤記》같은 책에서는 노부타다-히데요시, 그리고 노부타카-카츠이에가 왕년에 동성애 관계가 있었다고 적고 있으나,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하더라도 평소에 그러한 조합으로 끼리끼리 사이가 좋았긴 했으리라. 

  카츠이에를 지지하는 자, 히데요시가 옳다고 하는 자, 모두가 주장을 내세우며 양보하지 않아, 회의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카츠이에가 대단히 불쾌해진 것은 당연했다. 히데요시도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별실로 물러나서는 향을 피우고, 차를 달여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형세를 관망하였다. 그러나 이윽고, 카츠이에 다음 가는 명망가인 니와 나가히데의 주장이 분규하던 좌중을 일거에 결정내었다. 나가히데가 말하길,

  "(노부나가의) 아들을 후계자로 세우려 하면 이와 같은 경우, 노부카츠 / 노부타카 두 분 중 누구를 추대할 것인지가 심히 문제되는 만큼, 그보다는 히데요시의 말대로 장손인 산보시 님을 옹립하는 것이 가장 대의명분에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번에 주군의 원수를 갚은 공로자는 히데요시이다. 지금과 같은 경우, 선군의 원수를 갚은 공로자의 말을 가장 먼저 경청해야 하지 않겠는가."  백 가지 말보다 한 가지 공적이 우선하는 게 전국시대의 관습이었다. 중의는 드디어 결정되어 시바타 / 니와 / 이케다 / 하시바 네 무장이 각자 관리를 쿄토에 배치하여, 천하의 업무를 처리하게 되었다. 
   
  이 키요스 회의 석상에서 카츠이에가 "히데요시를 찔러 죽이자." 고 권했다는 이야기라든가, 히데요시의 발언에 카츠이에가 언성을 높이며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걸 책망하고, "어린 군주를 세워 천하를 노릴 생각이냐" 며 비난하였으며, 그리고 노부카츠 등이 안방으로 물러난 후에, 일동을 무시하고 베개를 가져오게 하여 누운 채로 만사에 대해 이야기하였다든가, 술자리가 벌어지자 "히데요시는 카미가타 사람이라 화사하고 풍류에 능하지만, 나는 홋고쿠의 야인이지." 라고 빈정거리면서 매실장아찌를 안주로 14~15개 정도를 삼킨 후 덮어놓고 술을 과음하여 요란하게 코를 골며서 누워 잤다, 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런 이야기들은 아마 전설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카츠이에의 분노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히데요시는 열심히 은근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카츠이에를 폭발시키지 않도록 노력했다. 노부나가의 영지를 분배할 때도 히데요시는 굳이 싸우려 들지 않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카츠이에가 히데요시의 영지인 고슈(江州, 오우미 지방近江囯) 나가하마長浜를 "내가 입경할 때의 편의를 위해서이니 넘겨 달라." 고 강경히 요구했을 때도 히데요시는 유유히 이 제안을 따랐다.(역주 : 이 글의 경우 히데요시가 미츠히데를 토벌한 공적으로 키요스 회의에서 야마시로 지방山城囯을 차지하는 것을 확인받고, 미츠히데의 본거지였던 탄바 지방丹波囯을 양아들 히데카츠의 명의로 가봉받은 건 언급하지 않고, 히데요시 세력확장의 반대급부로서 카츠이에에게 넘긴 나가하마 영지만을 언급하고 있다) 단지, 카츠이에의 조카인 사쿠마 모리마사에게 넘겨주는 건 거절하고, 카츠이에의 양아들인 시바타 이가노카미(柴田伊賀守, 카츠토요勝豊)에게 넘겨주겠다는 한 개의 단서를 달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히데요시의 심모원려가 숨어 있었다는 걸 카츠이에는 깨닫지 못했다.  

  위기를 잉태한 상태이긴 했으나 카츠이에와 히데요시의 외교전은 히데요시의 승리로 끝이 났는데, 카츠이에의 기분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 직후 히데요시를 암살하려는 계략이 진척되고 있다는 걸 니와 나가히데가 알고서, 은밀히 히데요시에게 이를 알려주고 도망치게 했다. 카츠이에의 요격을 경계하여 히데요시는 츠시마津島에서 나가마츠長松를 거쳐 나가하마長浜로 도망쳐 돌아갔다. 스스로 이러한 비상시적 행동을 했던 만큼, 카츠이에 측도 마찬가지로 히데요시의 습격을 두려워하여 에치젠 지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타루이垂井에 머물려 며칠간을 주저하였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이러한 잔꾀같은 건 싫어하였기에, 이 소식을 듣자 노부나가의 4남으로 히데요시의 양아들이 된 (하시바羽柴) 히데카츠秀勝를 인질로 카츠이에에게 보냈다. 카츠이에는 비로소 안심하며 키노모토를 지난 후에야 히데카츠를 돌려보냈다. 이 때부터 두 사람은 서로 경계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태로 봉합될 리 없었기에 결국에는 시즈가타케에서 실력에 의한 정면충돌이 벌어진 것이다.

  카츠이에는 에치젠에 도착한 후, 곧바로 양아들인 이가노카미 카츠토요에게 야마지 쇼겐山路将監 / 키노시타 한우에몬木下半右衛門 등을 배속시켜 나가하마 성長浜城을 접수하게 했다. 카츠이에는 '혹시 히데요시가 거절하면, 전쟁의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고 생각했을 것이나, 히데요시는 유아사 진스케湯浅甚助에게 명령하여 곳곳에 수선을 한 후 통 크게 넘겨주었다. 히데요시로선 내심 '일개 성 하나 따위가 뭐라고.' 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다퉈야 할 것은 천하인데..' 라는 말이다.

  이미 히데요시는 직접 쿄토에 머물면서 야마자키 타카라데라에 축성을 하여 거기에 거주하고, 궁정에 접근하는 한편 키나이畿内의 여러 영주들과 관계를 다지고, 정치에 힘을 쏟았기에 천하의 성망은 오로지 그에게 집중되어갔다. 시바타를 위시한 다른 무장들이 보낸 대관代官 따위는 쿄토에 있긴 해도 유명무실한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10월에는 (히데요시) 혼자의 힘으로 무라사키노紫野의 타이토쿠사大徳寺에서 노부나가의 법사法事를 행했다. 시바타들에게도 참석을 권했으나 찾아올 리는 없었다. 연극에서 나오는 타이토쿠사 분향 장면 같은 건 거짓말이다. 이 절에 건물 한 채를 지어 소켄원総見院이라 불렀다. 후세가 노부나가를【 소켄인 님総見院殿 】이라 부른 건 이 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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