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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 료타로]《고개峠》후기 독서



  본 글은 故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1923~1996) 씨의 소설인《고개峠》(동서문화사의 36권짜리 전집에는《사무라이》란 제목으로 수록) 하권의 작가 후기인<《고개峠》를 마치며>를 번역한 글입니다. 


  사람의 죽음이란 것도 각양각색의 형태를 띠기 마련이지만, 카와이 츠기노스케河井継之助라는 인물은 그 죽음에 이르러 자기 하인들에게 관을 짜게 하고, 정원에 화톳불을 피우게 한 후 병상에서 고개를 돌려 밤새 관을 짜는 모습을 응시했다고 한다. 자신이라는 존재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 이 정도로 객체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인물도 드무리라. 어지간한 인생철학이 몸에 배지 못하면 이렇겐 할 수 없다.

  일본 전국시대의 사람들 중에선 이런 부류의 인간이 없다. 전국시대의 일본인에게는 아직 형이상학적인 개념에 정신을 의탁한다는 발상이 없었다. 인간이 날것의 본능으로 스스로를 분발시켜서 이를 목표로 나아가는 데 쓰는 자양분은 형이하학적인 개념이어서, 예를 들자면 소유욕, 명예욕 같은 것이었다.

  에도 시대로 접어들면서 일본인은 조금씩 변하게 되엇다. 무사계급이 독서계급화하여 형이상학적인 사고를 발달시켰고, 막부 말기에 이르면 형이상적인 각성이 없이는 무사들은 행동하지 않게 된다. 바꿔 말하자면 에도 300년간의 교양시대가 막부 말기에 이르러 그 나름대로의 모습으로 완성되어, 그 토양에서 나온 인물들은 종류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들 모두가 형이상학적 사고법을 내재하였다는 점에서는 공통되었다. "지사志士" 로 불리는 수많은 사람들도 그런 부류들이었고 "현후賢侯" 로 불리던 유력 영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는 전국시대 무장과 같은 사적인 야망이 거의 없어 보일 정도로 적었다.

  인간은 어떻게 행동한다면 아름다워지는가, 는 것을 고민한 것이 에도 시대의 무사도 윤리이리라. 인간은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해야 공익에 공헌할 수 있는지를 생각한 게 에도 시대의 유교이다. 이 두 가지 관념이 막부 말기의 인간을 만들어냈다. 

  막부 말기에 완성된 "무사" 의 인간상은 일본인이 만들어 낸, 다소 기형적이기는 하지만 이 잘 세공된 결정품은 인간이 만들어낸 예술품같이도 생각된다. 그러한 이들 부류들은 인간의 개인적 욕망을 부추기던 전국시대, 내지는 서양에서는 태어나지 못했다. "사무라이侍" 라는 일본어가 막부 말기 이후 지금까지도 세계적으로 명사名詞가 되어서 남아있는 건, 그들이 쌍칼을 차고 무협극을 펼쳤기 때문이 아니라, 유형정의가 힘든 미적美的 인간이라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메이지 이후의 "추악한 일본인" 들이 이따금 자신의 추악함에 진저리를 치면서, 과거에 같은 일본인들이 "사무라이" 라는 관념을 만들어낸 것을 돌아보며 애써 자신을 위안하려고 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나는 이《고개》라는 소설에서 '무사라는 건 무엇인가.' 를 생각해보기로 했고, 그 생각을 풀어나가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그 전형을 에치고越後 지방 나가오카 번長岡藩의 비문벌출신 재상 카와이 츠기노스케에게서 찾으려고 한 것은, 집필을 끝낸 지금 잘못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은근히 자부하고 있다.

  그는 행동유교로 불리는 양명학파陽明學派의 신도였다. 양명학에 따르면 "그 사상을 체현하려는 자는 자신의 목숨을 일개의 도구처럼 객관화시켜야만" 한다. 어떻게 세상에 공헌하고 사람을 구제하느냐가 이 학파의 유일한 인생지향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에 기여하는 방법을 찾아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양명학의 목적은 이 하나에 집중되었다.

  츠기노스케는 가문을 이은 가장이면서도 직장에서 계속 말썽을 일으켜 나이 30이 되도록 서생 신세를 면치 못했다. 덕분에 부모에게는 짐만 안기고 있었다. 각 지방의 학자를 찾아뵙기 위해 떠돌기를 계속하던 그의 마지막 구도여행이 된 츄코쿠中囯 행 때는 "어머니는 여자이기 때문에 바가지를 긁으실지도 모르겠으니, 아버지께서 잘 전해 주십시오." 라는 부탁을 담은 편지를 에치고에 있는 친아버지에게 보내었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 이외에는 이 번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는 자부심을 가지고 그 방책을 필사적으로 찾아다녔던 것이다. 

  츠기노스케가 번 정치를 짊어지게 된 시기는 얄궂게도 쿄토에서 쇼군將軍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가 정권을 반납한 이후로, 이로 인해 황급히 영지개혁을 마치고서 그의 역량을 소싯적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전쟁지도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관군에게 항복하는 방법도 있었으리라. 항복하면 번은 무사하고, 이로써 그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달성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츠기노스케는 항복을 선택하지 않았다. 망설임없이 정론을 골랐다. "어떻게 영지를 잘 살게 할 것인가." 라는 문제에 천착하여 그 방법과 이상을 모색하고 다니는 데 반생을 바친 이 에도 시대의 유교신자는 이 시점에서 180도 전환,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살 수 있을까" 라는 무사도적 윤리관으로 변모하여, 그 때문에 죽음을 맞았다. 좌절한 것이 아니다. 그를 포함한 에도 시대 무사들에게는 이것은 의심의 여지 없는 자기완성이었다. 그는 언제나 완벽한 것을 추구하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는 죽고 그 시체는 하인 마츠조松藏의 손에 의해 화장되었다. 시체가 화장되던 시각에는 이미 츠가와津川 방면이 뚫리면서 정부군이 다가오고 있던 시점이라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 것 같지만, 마츠조는 잿더미 속에서 타다 남은 뼈들을 열심히 주워 모았다. 그 때 마츠조는 눈물을 흘리면서 "원래 그러한 분이셨지요. 혹 뼈를 덜 줏어모았다가 '이놈 마츠조야. 네놈 때문에 저승에 있는 내 뼈가 하나 모자라구나.' 하면서 저 세상에서 꾸짖으시면 이 마츠조는 면목이 서지 않습니다." 고 울부짖었다.

  연재를 마무리지은 지금, 필자도 역시 마츠조의 두려움을 얼마간 느끼고 있다. 뼛조각 상당수를 잿더미 속에 버리고 왔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쇼와 43년(1968) 5월 25일 저녁.


덧글

  • 키키 2016/05/20 22:10 # 답글

    사무라이를 저렇게 멋지게 정의하다니, 역시 사마료태랑 선생의 관점은 정말 탁월합니다. '고개'라는 책은 료마가 간다 전집에 끼워 있는것인가요?
  • 3인칭관찰자 2016/05/21 07:58 #

    아뇨.《고개》는《료마가 간다》와는 완전 별개의 물건입니다. 같은 시대를 다루었지만 스토리적으로는 직접적인 접점도 없고요.

    국내출판사 가운데 동서문화사란 데가 있어서《대망》이란 이름으로 야마오카 소하치(1~12)/요시카와 에이지(13~24)/시바 료타로(25~36) 이상 세 분의 소설을 각각 12권×3 해서 36권 전집으로 내놓았는데 시바 료타로 씨의 경우는 료마가 간다, 불타라 검, 사무라이(=고개), 나는 듯이, 언덕 위의 구름까지 다섯 소설이 완역되어 있습니다. 한글로 나온 고개 번역은 이쪽밖에 없긴 하지요. ㅜㅜ
  • 진보만세 2016/05/22 11:53 # 답글

    이번 편도 잘 읽었습니다..시바 소설에 매료되었던 옛 추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
  • 3인칭관찰자 2016/05/22 15:03 #

    돌아가신지 20년이 되어도 시바 씨의 소설은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개인적으론) 생각해봅니다... ^^ 물론 시바 씨가 메이지 시대를 예찬하고 그 시대의 제국주의 전쟁을 미화했다는 논란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거야 유감스러운 일이지만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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