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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쿠치 칸] 야마자키山崎 전투 (完) ┗ 日本合戰譚



  이 글은 패전 이전 일본의 유명 대중소설 작가로 출판사 분게이슌쥬文藝春秋의 창립자 겸 초대 사장이자, (고인이 된 친구들의 이름을 따) 아쿠타가와 상芥川賞 / 나오키 상直木賞이라는 일본의 저명한 문학상을 만들어내기도 한 키쿠치 칸菊池寬 씨의 저서《일본합전담日本合戦談》에 포함된【 야마자키 전투山崎合戦 】편을 번역한 글입니다.

  덧붙이자면, 이 글의 내용은 일본 전국시대를 둘러싼 지금의 통설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자인 키쿠치 씨가 별세하신 때로부터만 쳐도 이미 68년이 지났으니 말이죠. 특히 이 글의 중심인물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에 대한 인물조형같은 경우 이《일본합전담日本合戦談》에 수록된 이야기는 상당히 시대에 뒤쳐진 면이 보입니다. 그리고 좋든 싫든 현대의 역사가들이 '1차 사료가 아니다' 는 이유로 가지쳐낸 내용이 여기에는 제법 섞여있기 때문에, 이 내용을 그대로 믿기보다는 흥미 위주로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전투는 오후로 접어들어 시작되었다. 타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의 부대는 아케치明智의 중앙군인 사이토 쿠라노스케(斎藤内蔵介. 토시미츠利三)의 부대를 향해 쳐들어갔으나, 상대는 아케치 측에서 제일가는 용장剛将이었기에 타카야마 부대는 참담히 격파당했다가 (오다織田) 산시치 노부타카(三七信孝, 역주 :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3남)와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의 응원을 받아, 간신히 기세를 되살릴 수 있었다. 

  제 2진인 나카가와 세베에 키요히데中川瀬兵衛清秀의 부대는 미츠히데 군의 우익인 이세 요자부로(伊勢与三郎, 사다오키貞興)의 부대를 향해 쳐들어갔다. 나카가와는 원래 아라키 무라시게荒木村重의 수하被官로 있으면서, 이전에 이 야마자키 부근에 있는 누카즈카糠塚에서 단신으로 와다 이가노카미(和田伊賀守, 역주 : 코레마사惟政)라는 용장의 목을 벤 강한 무사로, 익히 알고 있는 전장이었기에 눈부신 분전을 거듭하며 일찌감치 승기를 만들어나갔다. 미츠히데는 이쪽보다는 텐노 산天王山 쪽이 신경이 쓰였기에 나미카와 카몬(並河掃部, 야스이에易家) / 미조오 쇼베에(溝尾勝兵衛, 시게토모茂朝) 두 사람의 부대를 응원보냈으나, 이미 마츠다 군은 격파당하고 마츠다도 전사하여, 텐노 산은 완전히 (하시바羽柴) 히데요시秀吉의 손아귀에 들어가 버렸다.

  히데요시는 이코마 치카마사生駒親正 / 키무라 하야토(木村隼人, 사다시게定重)를 텐노 산 방면으로 증원보내 미츠히데 군의 측면을 찌르게 했다. 이렇게 되자 미츠히데 군은 끊임없이 우익 측을 위협당하게 되어, 중앙군이 분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패색은 이미 뒤집기 힘들어져 갔다.

  이와 동시에 아케치 군 좌익은 요도가와 강淀川을 믿고서 그 배비가 허술하였기에, 히데요시의 제 3진인 이케다 쇼뉴사이(池田勝入斎, 츠네오키恒興)는 강변에 있는 카치다치步立라는 이름의 오솔길을 발견하여 이쪽으로 잠행, 미츠히데 군의 좌익인 츠다 요자부로의 진채를 들이쳤다.

  미츠히데가 텐노 산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요도가와 강 쪽을 신경쓰지 않은 점도, 역시 한 가지 패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는가 하는 말을 듣고 있다.

  중앙군의 사이토 토시미츠 부자를 위시하여 좌우 양익 부대에 걸쳐 아케치 군의 장병들은 훌륭히 분전하였다.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 당시의 서군 따위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미츠히데가 얼마나 좋은 인재人士들을 얻었는지를 충분히 알게 하는 바이다.

  그러나 텐노 산이 히데요시 군의 손에 들어가, 그 쪽으로부터 협공까지 당해서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났다고 할 수 있었고, 이와 동시에 호라가 고개洞ヶ峠에 있던 츠츠이 쥰케이筒井順慶의 대군이 배신하여 요도가와 강을 건너, 미츠히데의 배후를 들이쳤다(역주 : 호라가 고개에 츠츠이 군이 포진했다는 것부터 사실이 아니며, 츠츠이 군이 미츠히데의 배후를 쳤다는 것은 낭설에 불과하다. 사실 츠츠이 군은 미리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하였기에 미츠히데의 거듭된 권유를 받고서도 출병하지 않고 본거지인 야마토 지방에서 웅크리고 있었으며, 정작 호라가 고개에 진을 친 건 미츠히데 본인이었다. 그는 히데요시와의 싸움을 앞두고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츠츠이를 기다림과 동시에 그를 위압하기 위해 한 때 이곳에 포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에도 시대 이후 이 사건이 왜곡되어 사실처럼 전해지면서 "호라가 고개" 는 기회주의자를 풍자하는 속담으로 자리잡았다)

  쥰케이는 미츠히데가 돌봐준 바 있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그렇기에 쥰케이 자신은 미츠히데의 권유를 받고 마음이 흔들렸으나, 가로家老인 스기쿠라 우콘(杉倉右近, 역주 : 본문의 오타. 실제로는 마츠쿠라 우콘 시게노부松倉右近重信) / 시마 사콘(島左近, 키요오키清興) 두 사람이 주군을 만류하여 직접 출진하지 못하게 하고, 그저 병력만을 내어 야마자키의 맞은 편 강변인 하치만八幡에 위치한 호라카 고개로 출진시켰다.

  이 곳에서 전쟁을 구경하다가 이기는 자에게 붙으라고 지시한 것이다. 지금 시대에 와서 생각하면 "히데요시가 이길 것이므로 확실히 히데요시 측에 붙으면 '호라카 고개' 같은 추한 이름을 후세에 남기지도 않았을 텐데." 하고 할 수 있겠지만, 쥰케이의 입장은 상당히 곤란했으며, 히데요시와 미츠히데 중 누가 이기느냐 하는 건 후세 사람들인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하게 예측할 수 있는 게 아니었음이 틀림없다.    

  그것은 훗날, 고작 4만 석 영주었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가 2만 석을 주어 등용했을 정도의 호걸이었던 시마 사콘조차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찌됐든, 후세 사람들로부터 그 수서양단首鼠両端의 태도를 조소당하긴 했으나, 당시에 아케치의 둘도 없는 친구이면서도 가문을 보전한 건 마츠쿠라 / 시마 두 가로의 옳은 처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평가되었다.

  츠츠이까지 배반하면서 이미 모든 것은 틀어졌다. 츠츠이의 딴 마음을 간파하고 아케치 측에서는 사이토 다이하치로斎藤大八郎 / 시바타 겐자에몬(柴田源左衛門, 카츠사다勝定) 등이 대비하고 있었으나, 이렇게 된 상황에서는 잠시도 버티지 못했다.

  선진을 맡았던 사이토 쿠라노스케는 친위부대旗本와 함류하지 못하고 전장을 이탈했으나, 아케치 측의 많은 용사들이 전사했다.

  미츠히데는 일단 쇼류지 성勝竜寺城에 들어가 그날 자정 무렵에 카츠라가와 강桂川을 건너 후카쿠사深草를 거쳐 오구루스小栗栖로 접어들었을 때, 토민의 손에 의해 살해당했다. 뒤숭숭하기 짝이 없는 시세 속에서 패잔병落人이 된 끝에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거야 어쩔 수 없는 것이었는데, 그런 한편으로 도처에 비적같은 무리가 횡행하여 그들은 전쟁이 터지면 곧장 패잔병 사냥을 벌였다. 혼노사의 변을 듣고 사카이堺에서 이가伊賀 지방을 거쳐 미카와三河로 돌아간 (토쿠가와) 이에야스도 토민들에 의해 목숨이 위태로웠던 적이 있으며, 사실 이에야스와 동행하였던 카이(甲斐, 역주 : 타케다 가문武田家)의 옛 신하인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梅雪는 토민들에게 살해당한 바 있다.

  야마자키 전투 당시 이 주변에 거주하던 자들이 술과 안주를 들고서는 진중문안을 위해 미츠히데의 진채로 찾아왔다. 그들 중에는 쿄토에서 만쥬 가게를 하던 시오세 산자에몬塩瀬三左衛門이라는 자도 있었는데, 미츠히데가 헌상받은 치마키(粽, 역주 : 떡을 나뭇잎에 말아서 쪄낸 것)의 나뭇잎도 벗기지 않고 먹는 것을 보고서 깜짝 놀라, '이래서는 전쟁에서 지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전한다. "치마키를 껍질째로.." 운운하는 시가 지어진 이유이다. 시오세라는 이름의 과자상은 이 시기부터 생겨난 듯한데, 설탕은 바로 이 무렵이 되어서야 전래된 물건이라, 지금과 같이 달콤한 맛의 만쥬가 존재했는지는 의문스럽다. 이 무렵에는 설탕이 들어간 과자를 남만과자南蛮菓子라 불렀다. 요즘의 양과자洋菓子라는 말과 동일한 것이다.

  미츠히데는 신경질적인 무장이었던만큼, 담력이 약했기에 이러한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죽을 때 남긴 사세辞世는 이러하다.


순리와 역리는 다르지 않고
順逆無二門

오십 오년의 꿈이여.
五十五年夢

큰 진리는 마음 속에 있으니 
大道徹心源

깨고 나면 한 곳으로 돌아가는구나.
覚来帰一元



  아마 후세에 누가 이름을 빌려 만든 작품이겠지만, 미츠히데도 죽을 때까지 순리와 역리를 신경썼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 산시치 노부타카三七信孝가 나카가와 세베에에게 다가가 그 전공을 치하하자, 가마에 탄 히데요시가 나타나 "세베에 수고했네. 수고했어瀬兵衛骨折骨折" 라고 말하는 걸 보고 세베에가 "저 자식. 벌써부터 천하를 거머쥔 듯 행세하네." 라고 중얼거렸다 한다.

  어찌됐든, 미츠히데로서도 숙원을 풀었던데다 고작 11일이라도 쿄토에서 호령을 해보았으니, 이시다 미츠나리와 비교한다면 그다지 분한 마음은 없었음이 틀림없다.



 

덧글

  • 진냥 2016/05/19 17:55 # 답글

    ....정말 분한 마음이 없었을지는? ㅎ......
  • 3인칭관찰자 2016/05/19 18:35 #

    사실은... 엄청 분했지 않을까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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