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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발견》진설真說 나가시노 전투 (下) 역사



  이 글은 오다 노부나가 오케하자마 정면공격설 / 나가시노 전투 3단 사격 부정설 등으로 이름을 떨치신 후지모토 마사유키藤本正行 씨가 집필하신 기사《진설 나가시노 전투真說ㆍ長篠の戰い》(2014년 4월 출간되었던 일본잡지《歷史發見 Vol. 2P. 48 ~ 53페이지에 수록) 를 번역한 것입니다. 8~90년대부터 새로운 학설들을 내놓으며 지금 일본에서 통설로 자리잡아가는 노부나가의 전투 관련 논의에 불을 당기신 당사자가 비교적 시간적으로 가까운 2014년에 정리하신 글이라는 점에서 번역해보게 되었습니다.

  이《역사발견》이란 잡지(2014년 10월에 나온 4호를 끝으로 사실상 휴간)가 일러스트 / 도표 / 사진 등이 망라된 풀컬러잡지인데도 그것을 번역글에서 살릴 수 없게 된 건 아쉽게 생각하지만, 양해 부탁드립니다. 


  개전

  그렇다면 병력이 열세인 타케다 군 쪽이 먼저 전진한 건 어째서였을까?

  카츠요리는 나가시노 성을 구원하러 온 오다 군이 그 코앞에서 정비해버린 이유를 오다 군의 집결이 완료되지 않았거나, 오다 군의 전의가 높지 않기 때문이라고 판단해버린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야 적이 증가하기 전에 자군이 먼저 공세로 나서는 편이 승산을 높일 수 있다. 운이 좋다면 위압당한 오다 / 토쿠가와 군이 철수해버릴지도 모르며, 그렇게 된다면 나가시노 성을 탈취하는 것도 용이해진다. 그렇게 생각하며 전진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카츠요리가 전진했다는 보고를 받은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의 중신ㆍ사카이 타다츠구酒井忠次 이하의 별동대를 편성, 이 별동대는 남쪽의 산 속을 우회하여 20일 아침에 토비노스 산 성채鳶ノ巣山砦를 위시한 나가시노 성 포위진지를 돌파. 성 병사들과 합류하여 주변의 타케다 군을 박살냈다.《신쵸코우키信長公記》는 토비노스 산 성채 공격시기를 진시(辰刻, 오전 7시 ~ 9시)라고 적고 있다.
 
  그런 한편, 주主 전장에서는 오다 / 토쿠가와 연합군의 도보 병사들이 타케다 군 쪽을 향해 전진했다.《신쵸코우키》의 원문에 따르면【 적진 근처까지 아시가루들을 보내 공격을 가하며 반응을 살폈다. 앞뒤에서 공격을 받게 된 적도 병력을 전진시켰다. 】고 되어 있어, 별동대에 의해 배후를 물려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된 타케다 군이 어쩔 수 없이 전면의 오다 / 토쿠가와 군을 향하여 총공격을 개시하였다는 걸 알 수 있다.

  통설에 따르면, 돌격해 오는 타케다 군을 오다 / 토쿠가와 연합군이 울타리 안에서 조총사격을 가하며 이를 요격하였다는 이미지가 굳혀져 있으나, 실제론 오다 / 토쿠가와 측이 먼저 공격을 가헀던 것이다. 단 울타리 밖으로 나가 싸운 건 토쿠가와 군 뿐이었던 것 같다. 이에야스의 가신이었던 오스카 씨大須賀氏의 카후(家譜, 역주 : 가문 내력을 적은 족보)ㆍ《오스카키大須賀記》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 노부나가의 병력은 모두 울타리 안에 틀어박혀서 단 한 사람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엔슈(遠州, 토오토우미 지방遠江囯) / 미카와三河의 5천 명이 채 안 되는 장병들이 울타리 밖으로 나갔는데, 말을 타는 게 금지되었기에 상하 모두가 도보 상태로 밖으로 나가, 적과 어우러져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

  울타리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오다 군 주력과, 도보 상태로 울타리 밖으로 나가 싸우는 토쿠가와 군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다. 군대라는 것에는 지휘게통이라는 게 있어서, 사료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 전투경과에 따르면 오다 군 주력과 토쿠가와 군은 별개의 지휘계통 하에 각개로 싸웠다는 것을 납득할 수 있다.

  그리고 위의 사료에는 오쿠보 타다요大久保忠世 / 타다스케忠佐 형제와 나이토 이에나가內藤家長 세 사람만이,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허가를 받아 감찰관目付으로서 말에 타고 있었다고 하는데,《나가시노 전투 그림병풍長篠合戦図屛風》에서도 그러한 모습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오다 군 조총부대의 실상

  흔히 "3천 자루" 라고 전해지는 오다 군의 조총부대는 어떻게 싸운 것일까.《신쵸코우키》의 원문에는,

【 노부나가는 이에야스가 진을 친 타카마츠 산高松山이라는 약간 높은 산으로 올라가 적의 움직임을 살피시고는, "명령이 떨어지면 출격해라," 고 사전에 지시를 내리셨다. 조총 1천 자루 정도를 삿사 쿠라노스케(佐佐藏介, 나리마사成政) / 마에다 마타자에몬(前田又左衛門, 토시이에利家) / 노노무라 산쥬로(野野村三十郞, 마사나리正成) / 후쿠토미 헤이자에몬(福富平左衛門, 히데카츠秀勝) / 하나와 쿠로자에문(塙九郞左衛門, 나오마사直政)들에게 배속시키시고, 적진 근처까지 아시가루들을 보내 공격을 가하며 반응을 살피게 하셨다. 】

  고 나와 있듯이, 노부나가는 삿사 이하 5명을 지휘관으로 삼은 조총부대를 편성한 것이다. 다섯 명의 조총 지휘관들은 모두가 노부나가의 측근이거나 그에 가까운 인물들이었다. 그들이 지휘한 조총부대는 각각의 부대들로부터 임시로 긁어모은 것으로,《호안신쵸키甫庵信長記》에서는 "여러 부대에서 빼내온 조총병" 이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藤孝를 비롯한, 나가시노에 종군하지 않은 키나이 지방의 잔류부대에게도 조총병을 조달한 모양으로, 이렇게 공출된 호소카와 밑의 조총병들은 하나와 나오마사의 지휘하에 들어갔다고 한다.(《멘코슈로쿠綿考輯録》)

  그 숫자에 대해선,《신쵸코우키》의 전본伝本에 따라서 "1천 자루 정도" 라고 기록된 것과 "3천 자루 정도" 라고 기록된 것이 있다. 이들 중 어느 쪽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문제삼아야 할 점은 규이치牛一가 이를 "ㅇㅇ 자루 정도" 라는 어림수로 기록하였다는 점이다.

  규이치는 자신이 실제 숫자라고 판단하고 있는 데서는 "~ 정도" 를 붙이지 않고 실제 숫자로 기록하였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 어림수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여기서 어림수를 썼다는 건 그가 정확한 실제 숫자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나가시노에서 편제된 조총부대는 각 부대들로부터 긁어모은 것으로, 임시 지휘관으로 임명된 다섯 명이 이들을 지휘한 것이기에 1천 명, 3천 명 같은 식으로 딱 떨어지는 숫자가 나올 리가 없다. 규이치가 실제 숫자를 적지 못한 게 당연하며, 아마도 노부나가 자신도 그 실제 숫자를 파악하지 못했으리라 추측된다.

  몇 마디 더 하자면, 일반적으론 조총부대가 오다 / 토쿠가와 군 전선 전체에 균등하게 배치된 것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그 점도 문제가 된다. 

  종래의 학설에서는 조총의 수나 사격법만을 문제삼았을 뿐, 군대에는 지휘계통이 존재한다는 것도, 오다 / 토쿠가와 군 측이 먼저 울타리에서 나와 전투를 시작하였다, 는 사실도, 오다 군 주력과 토쿠가와 군이 각자 싸움을 벌였다는 것도 논의에서 결락되어왔다.

  조총부대가 배치된 장소에 대해선, 나는 오다 군 주력(특히 울타리를 설치한 타키가와 카즈마스)의 전면에만 조총부대가 배치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사료에도 나오는 대로 오다 군과 토쿠가와 군이 각기 포진하여 싸웠다는 것도 당시의 상식으로 본다면 납득할 수 있는 것이고, 조총부대의 지휘관들은 모두가 오다 가문의 가신들이다. 그들이 토쿠가와 군의 조총병들까지 지휘했다곤 보기 힘들며, "3천 자루의 3단 사격" 이 처음으로 등장한《호안신쵸키甫庵信長記》에서도 오다 군의 조총부대가 토쿠가와 군과는 별개로 싸웠다는 점을 명기하고 있어,《나가시노 전투 그림병풍長篠合戦図屛風》도 그와 같이 그려내고 있다.

  말하자면 오다 군의 조총부대는 전체 전선에 배치된 게 아니라, 비교적 안전한 오다 군 주력의 전면에 배치된 것이다. 조총의 사정거리 등을 고려하자면, 그들이 토쿠가와 군의 전면부(로 침투하는 적) 까지 사격하도록 명령을 받았으리라곤 생각하기 힘들어, 전체 전선에 걸쳐 구석구석까지 배치된 조총부대가 타케다 군을 격퇴한 것, 이라는 지금까지의 이해는 수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물론 오다 군의 조총부대가 타케다 군과의 전투에서 활약한 것 자체는 확실한 것이다. 실제로는 어떻게 활용되었을까?

  오다 군의 조총병 숫자가 타케다 군의 조총병보다 많았다는 거야 틀림없으나, 군대의 구성 자체는 연합군과 타케다 군 양군이 커다란 차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오다 측의 조총병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기마무사보단 "자신을 쏴 죽일 가능성이 있는" 타케다 군의 조총병이었으리라. 개전 벽두에, 그들은 전력을 다하여 타케다의 조총부대를 공격했을 것이다.

 《신쵸코우키》를 의역해보자.

【 선봉인 야마가타 사부로베에(山県三郎兵衛, 마사카게昌景)가 공격해왔으나, 조총사격을 가해 격퇴했다.

  2번 부대인 쇼요켄(正用軒, 타케다 쇼요켄 노부츠나武田逍遙軒信綱)은 이들과 교대하여, 쳐들어왔다가 물러가고, 물러갔다 싶으면 다시 공격해오고 했는데, 명령에 따라 조총으로 응전했다. 적의 과반이 쓰러져 퇴각하였다.

  3번째로는 코즈케 서부西上野의 오바타 일당小幡一黨이 쳐들어왔다. 칸토 부대는 승마술이 뛰어나, 이들도 역시 돌입을 시도했다. 이쪽도 태세를 정비하여, 몸을 은폐하고 조총으로 요격하였기에, 적의 과반이 탄환을 맞고 쓰러지자 퇴각하였다.

  4번째로는 텐큐(典廐, 타케다 노부토요武田信豊)의 부대가 쳐들어 왔다. 이와 같이 적군은 부대를 교대시켜가면서 공격해 왔지만, 아군은 한 부대도 밖으로 나가지 않고서 조총을 쏘아대며, 아시가루들만으로 격퇴하였다.

  마지막으로 바바 미노노카미(馬場美濃守, 노부하루信春)가 쳐들어왔으나, 아군은 태세를 정비함과 동시에 격퇴하였다.

  5월 21일 해가 뜰 때부터 토라우(동북동) 방향을 향하여 미시(未刻, 오후 1시 ~ 3시)까지 교대로 공격해왔으나, 병사들이 죽어나가고 갈수록 병력이 줄어들어간 적은 카츠요리 밑에 집결하여,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호라이사鳳來寺를 향하여 우르르 패주하기 시작했다. 아군은 앞을 다투어 추격전을 벌었다. 】

  오다의 조총부대에게 자군의 조총부대가 제압당한 타케다 군은 만족스런 원호사격도 받지 못한 채 돌격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타케다 군이 통상적인 부대로 싸움을 벌인 데 비해, 오다 군은 통상적인 부대도 출격시키지 않고서 조총병만을 추가투입시켜 요격하였으며, 퇴각하는 타케다 군을 오다 군이 추격한 모습이 간결히 묘사되어 있다. 타케다 군의 손해는 돌격할 때보다는 퇴각할 때 오다 군의 추격을 받아 생겨난 쪽이 더욱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노부나가가 승리한 원인 

  노부나가가 승리한 원인은, 주전장에서 군대를 빼내어 별동대를 파견할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던 병력 / 지형을 이용한 작전 / 그리고 조총을 활용한 데 있었다.

  주위에 많은 적대세력을 두고 있었던 노부나가로선, 승패와 관계없이 자군이 큰 손해를 입을 위험이 있는 난전만은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가시노 성의 코 앞까지 와서 진격을 멈추고 이러한 지형에서 위와 같은 작전을 취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지만 이 작전은 타케다 군이 전진해오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는 작전이었다.《신쵸코우키》에서 노부나가가 적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저지대에 군대를 배치해놓았던 건, 병력을 적게 보이도록 위장하여 카츠요리의 전진을 유도하기 위해서였으리라. 

  결과적으로 카츠요리는 전진하였고, 노부나가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태세에서 싸웠기 때문에 그의 작전은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부나가가 타케다 군의 전진을 기다리는 동안에 타케다 군이 나가시노 성을 공략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야 노부나가를 "군사적 천재" 라고 칭찬하는 역사가들의 평판이란 것도 완전히 변하였으리라. 진지하게 사료와 마주하지 않고서, 결과론에 입각하여 이야기를 하는 건 삼가야 하지 않겠는가. 
     
       

덧글

  • 레이오트 2016/03/26 14:26 # 답글

    예나 지금이나 운용가능 병력 수가 많은게 전투의 승률을 높이는 비결인건 변함이 없죠.
  • 3인칭관찰자 2016/03/27 07:55 #

    맞습니다.
  • 레이오트 2016/03/27 09:30 #

    병력 수는 현대전에서도 중요한게 운용가능 병력 수가 많으면 그만큼 다양한 전술적 시도가 가능해지기 떄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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