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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의 큰 오해》기마 vs 조총? 나가시노長篠 전투 역사


  본 글은 2007년, 일본출판사 PHP연구소에서 신서본新書本으로 간행된 스즈키 마사야鈴木眞哉 씨의 저서《전국시대에 대한 큰 오해戦国時代の大誤解제 3장 <거짓말투성이 명장면> 중 5편인【 기마 vs 조총ㆍ나가시노 전투】부분(p. 104 ~ 108)을 번역한 것입니다. 위 책은 현재 종이책으론 절판된 상태이나, 아마존 킨들 등을 통해 일본에서 판매되고 있는 책입니다. 가능한 한 필요한 부분만 번역하겠으며, 절대로 배포나 불법공유 목적으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여기서 명확히 하겠습니다.


  텐쇼 3년(1575) 5월 21일에 벌어진 나가시노 전투라고 하면 노도같이 돌진해오는 타케다武田의 기마대를, 마방책馬防柵 뒤에서 3열로 배치되어 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3천 조총부대가 3단 사격으로 저격해 쓰러뜨린다, 는 것이 정석적인 표현으로 자리잡아 있다. 대하드라마에서도 물론 그런 식으로 연출하고 있으나, 이를 가장 선명한 모습으로 묘사한 것은 쿠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카게무샤影武者》일 것이다.  

  이러한 장면이 존재했을 리 없다는 건, 나를 포함한 복수의 사람들이 몇십 년 전부터 주장해온 바다. 최근에 와서는 학계에도 어느 정도 받아들여졌으나, NHK 님 같은 경우, 여전히 <정석적 표현>에 매달리고 있는 듯하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복습해보자면, 타케다 측에 기마대라고 할 만한 부대는 애초부터 없었다. 앞에서 야마우치 카즈토요山內一豊를 다룬 대목에서 다루었듯이, 이 시대는 말에 탈 수 있는 인간 그 자체가 제한되어 있었다. 타케다 가문의 사례를 들자면 전체 전투원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할 미만 정도였는데, 이는 다른 가문들과 거의 대동소이헀다.

  그러한 기마무사들은 각자가 부담하는 군역에 응소하여 이곳저곳에서 2기, 3기씩 모여드는 것인데,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공동생활을 하지도 않고, 공통훈련을 받지도 않는다. 집단행동을 하는 건 도저히 무리이다. 그리고 말을 탈 수 있는 것은 장교급 인물들이므로 그들만을 묶어버리면, 일반 병사들을 지휘할 자가 없어지게 된다.

  이래서는 서부극이나 나폴레옹 시기를 다룬 영화에서 나올 법한 근대적인 기병대같은 게 존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직까지도 훌륭한(?) 학자분들 중에서 타케다 "기마대" 라든가 "기마군단" 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는 듯하나, 그런 것도 깨닫지 못하시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덧붙여 말한다면 이 당시 전투의 모습이란 건, 기마무사 다수가 미리 하마하여 싸우는 게 보편적이었다. 이렇게 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러한 관행이 보급되어 있었다는 건 일본측의 사료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비에르나 프로이스 같이 당시에 일본을 찾아온 선교사들의 보고 등에서도 명기되어 있다. 

  말 쪽이 그런 상황이었다면 조총 쪽은 어떠했을까.【 (조총) 3천 정의 3단 쏘기 】라고 한 마디로 말하지만, 노부나가가 전장에 배치할 수 있었던 조총 숫자는 절대 3천 정 정도가 아니었다.《신쵸코우키信長公記》같은 확실한 사료를 통해 헤아려본다면 1천 정 + 플러스 알파 정도였다. 이 점을 맨 처음에 지적하신 분이 후지모토 마사유키藤本正行 씨인데, 명확한 반론을 한 사람은 없었다.

  그것만 해도 문제인데, 더욱 심각한 건 이 1천 정 정도의 조총을 조종하는 병사들의 내역이다. 그들은 노부나가에게 직속된 자들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후방에 잔류한 츠츠이 쥰케이筒井順慶나 호소카와 유사이細川幽齋 등을 비롯한 부하무장들로부터 급히 제공받은 자들이 다수 섞어 있었다.

  한 번도 공통된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는 자들을 갑작스레 실전이 벌어지는 전장으로 데리고 와서, 3열로 나뉘어 교대해나가면서 사격을 가하는 복잡한 운동을 요구할 수가 있을까? 이래서야 그저 상식의 문제가 되겠지만, 이러한 상식을 무시하는 듯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직도 존재한다. 그러나, 무리하게 이러한 행동을 시킨다면 오사격 / 폭발 / 인화사고 등에 의해, 적을 쏘기 전에 아군 쪽부터 먼저 큰일을 겪을 것이다.

  여기에다 그들이 배치된 장소도 문제이다. 노부나가 군이 진을 친 곳 부근은 원래부터 협소한 곳인데다, 울타리 / 참호 / 토루 등이 몇 겹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가령 훈련을 잘 받은 병사들을 데리고 왔더라손 치더라도 3열로 나뉘어 착착 행동할 여지 같은 건, 도저히 있을 리 없다.

  말하자면, 3단 사격 같은 걸 해 보겠다고 해도 제대로 될 리도 없지만, 노부나가 자신도 그다지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3단 사격과 같은 전법이 필요해지고, 또 효과를 발휘하는 건 상대가 대군이며 / 모든 전선에 걸쳐 일제히 공격을 가해왔을 경우의 이야기다. 그러나 타케다 군은 수적으로 열세였던 데다, 전선 이곳저곳에서 단속적인 공격을 시도했다. 이에 맞서 눈앞에 적이 있든말든 끊임없이 발포를 계속해야 할 필요성이 전혀 없다. 이 당시엔 화약도 납탄도 귀중품이었으므로, 그러한 탄환낭비가 허용될 리는 없었다. 

  참고로 말해두자면, <(조총) 3천 정의 3단 사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토쿠가와 군의 조총에 대해선 그다지 다루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나가시노 전투라는 건,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노부나가에게 원군을 요청한 결과 행해진 것인데, 오다 군과 토쿠가와 군이 담당한 지역은 명확히 갈려 있었다. 저쪽은 어떻게 된 것인지에 대해, 제대로 설명한 사례가 거의 없다시피했다.

  그 이상으로 심각한 건, 타케다 측의 조총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에도 어느 민방民放 방송국이 "타케다 측에는 조총이 그다지 없었고, 그 대신에 투석부대가 있었다." 니 하면서 그럴싸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에서는, 타케다 측도 상당수의 조총을 준비해왔다. 그들에게 포위되었던 (토쿠가와 가문에 속한) 나가시노 성長篠城은, 타케다 군의 총격에 의해 벌집이 되었다고 한다. 이는 훗날 토쿠가와 이에야스 본인이 직접 말한 이야기다.

  나가시노 전투가 기마 VS 조총의 싸움이었다는 이야기의 원소스를 만든 자는, 오케하자마 / 스노마타 하룻밤 성 대목에서 다룬 바 있는 오제 호안小瀨甫庵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다른 군담물軍記들이 계승하였고, 육군참모본부 같은 데서도 채용하였다. 거기에 근대 유럽의 전술 등을 가미하여 그럴 듯하게 치장된 것이, 지금까지도 정석적으로 유포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일어난 나가시노 전투는 어떠한 것이었냐고 묻는다면, 한 마디로 형용하여 "공성전攻城戰" 이었다. 그것도 대군이었던 오다 / 토쿠가와 측이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여 틀어박혔고, 병력적으로 열세였던 타케다 측이 이들을 정면에서 공격하는 모양새였다. 물론 이렇게 된 이유가 존재하나, 이와 같은 구도가 된다면야 병력이 부족한 쪽이 불리해지는 것은 자명하다.

        

덧글

  • 레이오트 2016/03/11 20:56 # 답글

    1. 기마무사는 드라군이었단 뜻이군요.

    2. 그 유명한 3단 철포는 오다 노부나가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발사 딜레이가 조총에 비해 빠른 활도 화망 밀도 높이려고 이에 최적화된 진형과 단위 부대들의 발사 순서가 있었거든요.

    3. 무엇보다 역사는 당시의 승자 혹은 후대의 승자가 선택한 기록이지요. 역사 연구에 있어 시대의 흐름에 맞는 재평가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지요.
  • 3인칭관찰자 2016/03/12 17:01 #

    1. 하마전투를 많이 했다는 건 비슷한데, 일본 기마무사는 용기병처럼 총을 갖고 싸운 건 아니라서...

    2. 이 글을 제대로 읽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3단철포 자체가 없었다고 부정하는 게 이 글인지라 노부나가의 전유물이라는 이야기로 이어질 구석이 없죠.
  • 레이오트 2016/03/12 17:10 #

    1. 하마전투를 많이했다는걸 보니 드라군이 생각나더군요.

    2. 다시 읽어보니 이제야 뭔 뜻인지 제대로 알겠네요.

    3. 그래도 이런 류의 신화가 나올려면 무언가 나름 근거가 있어야 할 터인데, 과연 무슨 근거로 이런 신화가 만들어진걸까요? 정말 궁금해집니다.
  • 3인칭관찰자 2016/03/12 17:19 #

    3. 결국은 1차사료의 소스에서 시작해서, 여러 저자를 거치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살이 붙는 게 아닐까 합니다.

    하긴 근거없이 만들어졌다기엔 지금까지 자리잡아온 정설이란 건 꽤나 그럴듯한지라(.....)
  • 키키 2016/03/12 00:43 # 답글

    잘 읽었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6/03/12 17:02 #

    감사합니다.
  • 제홍씨책사풍후 2016/03/12 01:03 # 답글

    기마돌격 존재했습니다.
  • 제홍씨책사풍후 2016/03/12 01:04 # 답글

    3열사격이 아니라 주고 받으며 사격하는거였을거같음.
  • 재팔 2016/03/12 09:15 # 답글

    도쿠가와군의 조총에 대해선 다루지 않았다는 부분을 보니 문득 생각나는게, 전전부터 우익과 전후의 좌익 등등에게 각각 '역도(빨갱이?)', '수꼴' 취급을 당하던 이에야스다보니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6/03/12 17:13 #

    정말로 전전 우익은 이에야스에게 박했던 것 같더라구요. 전후 좌익들의 이에야스 평가 쪽은 잘 모르겠지만 현재 일본에에도 이에야스의 인기가 그닥인 걸 보면...

    그러고보니 이 책 저자인 스즈키 씨도 여기선 토쿠가와 가문 조총에 주목하자고 하지만, 실상 이 책 전체에서 가장 열심히 까는 인물 Top 3안에 드는게 또 이에야스인지라... ㅜㅜ
  • 2016/03/13 18:5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03/13 22:5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전지적작가시점 2016/06/26 13:39 # 삭제 답글

    서양 중세 기사들도 딱히 합동훈련같은건 받지 않고 각자 군역에 따라 여기저기서 1기 2기 씩 모이는 건 똑같은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이쪽은 기병끼리 전열을 이루어 싸우는게 가능하더군요.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가 뭘까요?
  • 3인칭관찰자 2016/06/26 19:05 #

    그 분야(서양 기사 내지 서양 중세)에는 깜깜해서 명확한 답을 드리긴 힘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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