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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쿠치 칸] 나가시노長篠 전투 (3) ┗ 日本合戰譚



  이 글은 패전 이전 일본의 유명 대중소설 작가로 출판사 분게이슌쥬文藝春秋의 창립자 겸 초대 사장이자, (고인이 된 친구들의 이름을 따) 아쿠타가와 상芥川賞 / 나오키 상直木賞이라는 일본의 저명한 문학상을 만들어내기도 한 키쿠치 칸菊池寬 씨의 저서《일본합전담日本合戦談》에 포함된【 나가시노 전투長篠合戦 】편을 번역한 글입니다.

   덧붙이자면, 이 글의 내용은 일본 전국시대를 둘러싼 지금의 통설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자인 키쿠치 씨가 별세하신 때로부터만 쳐도 이미 68년이 지났으니 말이죠. 특히 오다 노부나가의 3대 전투(오케하자마 / 아네가와 / 나가시노 전투)의 경우 최근의 학설에 의해 전투의 양상과 전개 자체에 대한 해석이 크게 뒤집어져서, 이《일본합전담日本合戦談》에 수록된 이야기는 상당히 낡은 감을 감출 수 없습니다.(지금 통설로 자리잡은 나가시노 전투의 내용에 대해서는 제가 언젠가 정리해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좋든 싫든 현대의 역사가들이 '1차 사료가 아니다' 는 이유로 가지쳐낸 내용이 여기에는 제법 섞여있기 때문에, 이 내용을 그대로 믿기보다는 흥미 위주로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출처 : 아오조라 문고


  (타케다武田) 카츠요리勝頼는 싸움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오야마다 마사유키小山田昌行 / 코사카 마사즈미高坂昌澄 등의 2천 병력으로 나가시노 성을 감시하게 하고, 토비노스鳶ノ巢 보루 이하 5개의 성채에 장병 1천 명을 배치했다. 그 후 다음과 같이 포진하여 오다 / 토쿠가와 군에 맞서 정정당당하게 공격을 할 태세를 보였다. 우선 아사키浅木 부근의 오오미야大宮 방면으로는 바바 미노노카미 노부후사馬場美濃守信房가 선봉이 되어, 부대의 장인 아나야마 무츠노카미 바이세츠(穴山陸奥守梅雪, 카츠요리의 자형) 아래 사나다 겐타자에몬 노부츠나真田源太左衛門信綱 / 츠치야 우에몬 마사츠구土屋右衛門昌次 / 이치죠 우에몬다유 노부나리一条右衛門大夫信就 등이 배속되었고, 시모스소 부근의 야나기다 방면에는 나이토 슈리 마사토요内藤修理昌豊를 선봉으로 삼고, 부대의 장으로는 타케다 소요켄 노부카도(武田逍遥軒信廉, 신겐의 동생) 아래 하라 하야토노스케原隼人佐 / 안나카 마사시게安中昌繁 등이 배속되었다. 그리고 타케히로竹広 방면으론 선봉을 야마가타 사부로베에 마사카게山県三郎兵衛昌景가 맡으며, 부대의 장은 타케다 사마노스케 노부토요(武田左馬助信豊, 신겐 동생=노부시게信繁의 아들), 그 밑에 오야마다 우효에 노부시게小山田右兵衛信茂, 아토베 오오이노스케 카츠스케跡部大炊助勝資 등이 배속되었다. 카츠요리 자신은 전위대인 모치즈키 우콘望月右近, 후위부대인 타케다 노부토모武田信友 / 타케다 노부미츠武田信光 등과 함께 키요이다하라清井田原 서쪽에 진을 쳤다. 각 부대의 병력은 모두 3천, 도합 1만 5천 명이었다.

  각 부대의 장들은 모두 카츠요리의 일가붙이였는데,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뛰어난 대장이 아니었고, 이 전투에 패배한 후 모두가 목숨을 건져 신슈(信州, 시나노信濃 지방)으로 도망쳐 돌아갔다. 이에 비해 군대의 선봉을 맡은 자들이야말로 신겐이 귀히 여기던 대장들로, 그 외의 장수들도 모두 명성을 떨친 용맹한 무사들이었는데, 이 전투에서 거의 대부분이 전사해버렸다. 지용을 겸비한 양장良将들을 잃은 카츠요리가, 손톱과 이빨이 빠진 호랑이처럼 다시 재기하지 못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전기戦機는 드디어 무르익어 (5월) 21일 밤이 되었다. 오다의 진중에서는 마지막 군사회의軍評定가 열렸다. 진중의 좌흥을 돋우기 위해, 노부나가는 이에야스 휘하의 무사인 사카이 사에몬노죠 타다츠구酒井左衛門尉忠次에게 에비스 춤夷舞을 추도록 했고, 제장들은 화살통을 두드리며 장단을 맞추었다. 충분한 자신감이 있었던 바이리라. 군사회의에 앞서 긴장을 씻긴 것이다. 드디어 회의가 시작되자, 앞에서 나온 호한好漢 타다츠구가 맨 먼저, "토비노스 이하의 여러 보루들을 야습하여 타케다 군의 퇴로를 끊읍시다." 고 제안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어리석은 방책을 상석에 있는 자들에 앞서 입 밖으로 내다니.." 라면서, 화를 내며 타다츠구를 쫓아냈으나, 나중에 은밀히 타다츠구를 다시 불러, "자네의 책략이 가장 오묘했네. 그렇기 때문에 밖으로 새어나가는 걸 걱정하여 화내는 척 한 것일세." 라며 평소 귀히 간직하고 있던, 표주박 모형의 말재갈을 하사했다. 타다츠구는 용약하여, 혼다 분고노카미 히로타카本多豊後守広孝 / 마츠다이라 토노모노스케 코레타다松平主殿助伊忠 / 오쿠다이라 켄모츠 사다카츠奥平監物貞勝 등을 비롯한 3천 병사를 이끌고, 스가누마 신파치로菅沼新八郎의 길안내를 받아 출발하였다.

  마츠야마코시松山越에 위치한 관음당観音堂 앞에서 모두가 하마下馬하여, 갑옷을 짊어지고 험준한 지형을 기어 올라갔으나, 땅거미가 진 이후였기에 행군에 애를 먹었다. 그랬기에 타다츠구는 안내자를 앞세워 보낸 후, 포승줄을 나무 뿌리에다 꽁꽁 묶어서 여기에 매달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기어오르게 했다. 스가누마 산菅沼山에서 부대를 점검하자 모두가 도착하여,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었다. 그야말로 암벽등반을 한 셈이다. 갑옷을 입은 후, 토비노스를 향하여 일거에 돌격했다. 원래는 친위대旗本의 무사 아마노 사이지로天野西次郎가 이치방야리(一番槍, 역주 : 부대원 중에 가장 먼저 적에게 창을 내지름)를 기록했으나, 토다 한페이 시게유키戸田半平重之라는 무사가 새벽에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 짐작하고 효수한 수급 모양으로 만든 은제 사시모노를 가져왔는데, 때마침 비쳐진 달빛 + 타오르는 보루의 불빛에 의해 사시모노가 눈부시게 비친 덕에 이치방야리로 판정받았다. 야습을 벌일 것이었으므로 그 누구도 사시모노를 갖고 오지 않았으나, 한페이만이 사시모노를 갖고 온 덕에 이득을 본 것이다. 타오르는 보루의 불빛이 나가시노 성 성벽을 비추자, 야습이 성공했다고 본 성장城将 사다마사는 성의 정문을 한일자로 열어젖히고 이들을 맞아들였다. 오쿠다이라 미마사카노카미 사다요시奥平美作守貞能가 이치방노리(一番乗, 역주 : 부대원 중에 가장 먼저 성에 입성함)를 기록했는데, 진중에 있던 사다카츠 / 사다요시 / 사다마사 부자는 눈물범벅이 되어 무사히 부자 간 대면을 마쳤다고 한다.

  타케다의 본군은 토비노스 이하의 여러 성채들이 함락된 것을 알았으나, 적군이 앞에 있는 이제 와서 퇴군할 수는 없다. 텐쇼 3년(1575) 5월 21일 동틀 녘(약 오전 5시), 타케다 전군이 행동을 개시했다. 초여름의 아침바람을 맞은 군마는 울부짖었고, 하타지루시도 나부끼며 전투의 기운이 충만하였다. 이 때, 오다 / 토쿠가와 측은 니와 칸스케 우지츠구丹羽勘助氏次 등을 감군으로 삼고, 마에다 마타자에몬 토시이에前田又左衛門利家들을 사령으로 삼은 3천 명의 조총부대를 급조한 울타리 뒤에 배치시켜, 타케다 군의 견고한 갑옷을 관통하여 쓰러트리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마루야마 산丸山 / 오오미야大宮를 지키던 사쿠마 우에몬노죠(佐久間右衛門尉, 노부모리信盛)의 5천여 기를 향해 아사키 부근에서 진군해 나간 타케다 군 3천 명, 그 선두에는 은테두리 안장을 얹은 츠키게(月毛,  역주 : 불그스름한 말)를 몰면서, 병꽃나무 묶듯이 얽어맨 갑옷을 입고 투구뿔 달린 적갈색 투구星冑를 쓴 채로, 흰 깃발로 만든 사시모노指物를 나부끼던 늙은 무사가 있었다. 타케다 가문의 효장驍将 바바 미노노카미 노부후사였다. 자신의 병사 7백 명을 두 부대로 나누었다 싶더니, 잽싸게 한 부대를 이끌고 앞뒤 돌아보지 않고 돌입, 즉각 마루야마 산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소모되지 않은 다른 부대를 마루야마 산 앞에 배치하였다. 이 신속한 행동 앞에 힘없이 첫 번째 울타리가 돌파당하자, 아케치 쥬베에 미츠히데明智十兵衛光秀 / 후와 카와치노카미(不破河内守, 미츠하루光治) 등이 달려와 응전하였으나 이미 이 때는 두 번째 울타리까지 밀고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노부후사의 병력도 조총탄환 앞에 순식간에 2백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노부후사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서 두 번째 울타리를 걷어치워 버렸다. 사나다 겐타자에몬 노부츠나真田源太左衛門信綱 / 그 동생 효부노죠(兵部丞, 마사테루昌輝 내지는 마사츠나昌綱) / 츠치야 우에몬노죠 등이 노부후사에게 퇴각을 권유하러 왔을 때에는 그 머릿수는 80여 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노부후사는 사나다 형제가 방어전을 벌이는 사이에 물러났다.

  아케치의 부하 6 ~ 7명이 사나다 형제의 활약을 띠겁게 보고 달려들자, 효부노죠는 씨익 웃으면서 "시게이滋井의 자손 운노 코타로 유키우지海野小太郎幸氏의 후예, 사나다 잇토쿠사이(真田一徳斎, 유키츠나幸綱, 혹은 유키타카幸隆)의 차남 효부노죠 마사츠나의 목을 베어 공적으로 삼아라!" 고 이름을 대면서 세 명을 좌우로 베어 쓰러트렸다. 그 자신도 적탄을 맞고 전사했으며, 그 형 겐타자에몬도 아오에 사다츠구青江貞次가 만든 3척 5촌의 군도를 휘두르고 휘두른 끝에, 동생과 같은 곳에서 전사했다.

  츠치야 우에몬노죠도 이케다 키이노카미(池田紀伊守, 모토스케元助) / 가모 타다사부로(蒲生忠三郎, 우지사토氏鄕) 부대의 측면을 찔러 무너트렸다. 곁에 있던 이치죠 우에몬다유 노부나리에게 말하길, "본인은 지난달 신겐 공의 법사가 있었을 때 순사하려 했으나, 코사카 마사즈미高坂昌澄가 뜯어말려 본의아니게 지금까지 살아 있었소. 오늘 여기야말로 내 목숨을 버릴 곳이오." 라고 말하며, 진격하여 세 번째 울타리까지 쳐들어가 스스로 울타리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크게 호통치며 자기 이름을 대었으나, 오다 군은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누구도 맞서려 하지 않았다. 빗발같이 쏟아지는 탄환 중 다섯 발이 우에몬노죠의 투구에 명중했다. 31세의 나이에 맞은 전사討死였다. 

  이 부대의 대장 바바 노부후사는 일단 물러난 후 태세를 정비하여 다시 자리로 돌아가, 수중에 남은 고작 80명의 병사를 이끌고 세 번째 울타리로 향하여, 마에다 토시이에 / 노노무라 산쥬로野野村三十郎 등이 지휘하는 조총부대를 흩어버렸다. 용장 아래 약졸은 없는 법이다. 그러나 적은 가까이 다가오지 않은 채 조총을 사용하여 (아군을) 쓰러트리려고 했다. 이치죠 우에몬다유가 달려와 퇴각을 권유했다. 이미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노부후사의 우익부대뿐 아니라 중앙에 있는 나이토 슈리의 부대 / 좌익에 있는 야마가타 사부로베에의 군대도 적진 깊숙히 침투하기는 했으나, 그들 모두가 조총의 위력 앞에 완전히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이치죠의 권유를 들은 노부후사는, "카츠요리 공을 퇴각시키기 위한 후미부대가 되어 전사하자." 고 답하였다. 

  (그리하여) 엔쿄猿橋 부근에서 스자와出沢 부근에 걸쳐 방어전을 펼쳤으나, 카츠요리가 도망치는 것을 확인한 후, "로쿠손노 츠네모토六孫王経基의 적손자 셋츠노카미 요리미츠摂津守頼光의 4대손 미나모토노 산미 요리마사源三位頼政의 후예 바바 미노노카미 노부후사!" 라고 이름을 댔다. 반 쿠로자에몬 나오마사塙九郎左衛門直政 휘하의 무사 카와이 산쥬로川井三十郎가 그를 찔러눕히고 목을 베었으나, 노부후사는 일부러 저항하지 않았다. 향년 62세. 자신의 간언을 채택하지 않았던 주군 카츠요리를 위해 결국은 노구를 전장에 남기게 된 것이다. 18세에 처음으로 출진한 이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신체에 부상을 입지 않았다는 보기 드문 용장이었는데, 어느 때 젊은 무사들에게 이야기하기를,


  1. 적보다 아군이 용감해 보이는 날에 앞을 다투어 활약하고, 아군이 겁먹은 날엔 홀로 진격해 결사적으로 싸워라.    
  2. 경험 많은 아군 무사들과 친하게 지내며 본보기로 삼아라.
  3. 투구의 후키카에시吹返し가 아래로 향하면서 사시모노指物가 흔들리지 않으면 강적. 후키카에시가 위로 향하고, 사시모노가 흔들리고 있다면, 이는 약한 적이다.
  4. 창날 끝이 위를 향하고 있으면 약한 적, 아래를 향하고 있으면 강적이다.
  5. 적군의 세가 활발할 때는 버텨내고, 쇠하였다 보이면 단번에 쳐들어가야 한다,
고 가르쳤다 한다.

   

덧글

  • 시무언 2016/03/01 15:53 # 삭제 답글

    노부나가가 회의에서 혼냈다가 뒤에서 몰래 칭찬하는 장면은 군담같은 느낌이 강하네요.
  • 3인칭관찰자 2016/03/01 19:57 #

    맞습니다. 실제로도 군담물에서 처음 나온 이야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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