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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쿠치 칸] 나가시노長篠 전투 (1) ┗ 日本合戰譚



  이 글은 패전 이전 일본의 유명 대중소설 작가로 출판사 분게이슌쥬文藝春秋의 창립자 겸 초대 사장이자, (고인이 된 친구들의 이름을 따) 아쿠타가와 상芥川賞 / 나오키 상直木賞이라는 일본의 저명한 문학상을 만들어내기도 한 키쿠치 칸菊池寬 씨의 저서《일본합전담日本合戦談》에 포함된【 나가시노 전투長篠合戦 】편을 번역한 글입니다.

   덧붙이자면, 이 글의 내용은 일본 전국시대를 둘러싼 지금의 통설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자인 키쿠치 씨가 별세하신 때로부터만 쳐도 이미 68년이 지났으니 말이죠. 특히 오다 노부나가의 3대 전투(오케하자마 / 아네가와 / 나가시노 전투)의 경우 최근의 학설에 의해 전투의 양상과 전개 자체에 대한 해석이 크게 뒤집어져서, 이《일본합전담日本合戦談》에 수록된 이야기는 상당히 낡은 감을 감출 수 없습니다.(지금 통설로 자리잡은 나가시노 전투의 내용에 대해서는 제가 언젠가 정리해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좋든 싫든 현대의 역사가들이 '1차 사료가 아니다' 는 이유로 가지쳐낸 내용이 여기에는 제법 섞여있기 때문에, 이 내용을 그대로 믿기보다는 흥미 위주로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겐키 3년(1572) 12월 22일.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에서 (타케다武田) 신겐信玄은 하마마츠浜松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를 대파하고, 거의 이에야스를 생포할 뻔 했다. 나츠메 지로자에몬夏目次郎左衛門 등의 충성스런 죽음이 없었다면, 이에야스도 위험하였었다.

  신겐이 미카타가하라로 진군한 것은 단순히 이에야스를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카와三河 지방을 거쳐 오와리尾張 지방으로 들어가 기후岐阜를 공격하여 노부나가를 퇴치한 후, 쿄토로 입경하려는 큰 뜻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카타가하라에서 대승을 거둔 후, 그 부근의 오사카베刑部에서 새해를 맞이하고, 1월 11일에 오사카베를 출발, 미카와 지방으로 들어가 노다 성野田城을 포위했다. 그러나 성이 함락됨과 동시에 신겐은 병에 걸려, 군대를 물려 신슈(信州, 시나노信濃 지방)로 돌아가 병을 추스리려 했으나 결국 이기지 못하고 노장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昌景를 불러 "내일은 깃발을 세타(瀬田, 역주 : 현재의 오즈 시 세타쵸瀬田町) 에 세워라." 고 말하며 눈을 감았다.  

  신겐이 죽은 후 한동안 그 상喪을 감추었으나, 아무리 센고쿠 시대라 해도, 오래도록 비밀이 지켜질 순 없었다.

  신겐의 위세에 복종하고 있던 자들 중에는, 후계자인 (타케다) 카츠요리勝頼는 의지할 수 없다 하며 이에야스와 내통하는 자가 많았다. 그 대표적인 자가 츠쿠리테 성주(作手城主, 역주 : 요즘은 츠쿠테로 읽음) 오쿠다이라 사다마사奥平貞昌 부자였다.

  오쿠다이라 가문은 이 지역의 호족으로 처음에는 이마가와 가문에 속했고, 나중에는 토쿠가와 가문에 붙었다가 다시 신겐에게 항복하였고, 이번에는 카츠요리를 배반하고 이에야스에게 귀순한 것이다. 대다이묘들 사이에 끼인 소다이묘 / 호족들은 가문의 보신을 위하여 이쪽에 붙었다 저쪽에 붙었다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헤엄을 잘 쳐서 좋은 주군에게 붙은 자만이 가문을 보전하고 자손들의 번영을 쟁취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카츠요리는 자기 영지의 제장들이 동요하는 것을 보고 격분憤激하여, 텐쇼 2년(1574) 1월 미노美濃 지방으로 들어가 아케치 성明智城을 공략하고, 그 해 5년(역주 : 5월의 오타)에는 토오토우미遠江로 향하여, 타카텐진 성高天神城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에야스는 고작 100리 밖에 떨어지지 않은 하마마츠에 있었음에도 구원하지 못했고, 노부나가는 이마기리 나루터今切の渡까지 왔음에도, 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물렸다.   

  카츠요리의 의기는 드높았을 것이다. "오다, 토쿠가와 따위가 뭐란 말이냐." 하고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이 점이 다음해 나가시노에서, 무모한 전투를 시도하는 자부심으로 이어졌으리라.

  다음 해인 텐쇼 3년(1575) 2월, 이에야스는 새로이 귀부한 오쿠다이라 사다마사를 나가시노 성주로 임명했다.

  나가시노 성은 코신(甲信, 카이甲斐 / 시나노 지방)에서 산엔(参遠, 미카와 / 토오토우미 지방)으로 나가는 관문이었다. 타케다 / 토쿠가와 두 가문이 여러 번 쟁탈전을 벌인 이유가 여기 있었다. 성은 토요카와 강豊川의 상류인 오노 강大野川과 타키가와 강滝川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두 강 모두가 벼랑 같은 급경사로, 겹겹이 쌓아놓은 성벽을 대신하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오노 강이 성의 해자를 대신했고, 서쪽으로는 타키가와 강이 이를 대신했다.

  텐쇼 3년(1575) 5월 카츠요리는 1만 5천 명의 대군을 이끌고 나가시노를 포위했다. 성 병사들은 고작 5백 명이었으나, 모두가 죽음을 무릅쓰고 방어에 나섰다.

  토리이 스네에몬 카츠아키鳥井強右衛門勝商가 이에야스에게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단신으로 성을 탈출하여, 이에야스를 알현해 원군을 요청하고, 곧바로 발길을 돌려 다시 성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타케다 군에 사로잡혔음에도, 카츠요리를 속여 성벽으로 다가간 후, "노부나가는 오카자키岡崎까지 출진해 있소. 죠노스케(城之介,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 님은 하치만八幡까지 와 있소, 이에야스 / 노부나가는 노다野田로 이동하고 계시니, 성벽을 굳게 지키시오. 3일 안에 운이 트일 것이외다!" 라고 외친 후, 책형(磔, 역주 : 사람을 기둥에 묶은 후 창으로 찔러죽이는 형벌, 십자가형)에 처해진 건, 유명한 이야기이므로 생략하겠다.

  5월 18일, 노부나가 / 이에야스 양 진영의 원군 3만 8천 명은, 나가시노 서쪽 시다라設樂 고원에 도착하여, (그 병력은) 산야가 미어터질 듯 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 타케다의 군용軍容은 신겐이 죽은 이후였다곤 하나, 쇠퇴하지 아니하였다. 신겐이 죽었다는 것조차 반신반의하는 상황으로, 전투가 있기 전 이나바 잇테츠稲葉一徹가 이에야스에게, "만일 신겐이 살아 있어서 불의에 치고 나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라고 말했다가 노부나가에게 갈굼먹었을 정도였던 것이다.

  어찌됐든 타케다의 무명武名은 미신적으로 (적에게) 두려움을 사고 있었던 것이다. 노부나가가 출발할 때에도 이를 위태롭게 생각하는 제장들이 많았고, 이에야스도 필승을 장담하기 힘들어, 아들 (토쿠가와) 노부야스信康를 오카자키로 돌려보내려고 했을 정도였다.   

  오다 / 토쿠가와의 군대가 시다라 고원에 도착하자, 노부나가(당시 42세) 자신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를 거느리고 시다라 마을設楽村 코쿠라쿠지 산極楽寺山에 본진을 쳤다. 장남 노부타다(19세)는 카와지리 히데타카河尻秀隆를 거느리고 야베 마을矢部村 쵸쿠요사勅養寺 부근에 있는 텐진 산天神山에, 차남 키타바타케 노부카츠北畠信雄는 이나바 잇테츠를 거느리고 미도우 산御堂山에 각각 진지를 구축했다. 그리고 카와카미 마을川上村 챠우스 산茶臼山에는 사쿠마 우에몬노죠 노부모리佐久間右衛門尉信盛 / 이케다 쇼사부로 노부테루(池田庄三郎信輝, 츠네오키恒興) / 타키가와 사콘쇼겐 카즈마스滝川左近将監一益 /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 등의 용장들이 배치되었고, 위 4개 진지의 동쪽에는 가모 타다사부로 우지사토蒲生忠三郎氏鄕 / 모리 쇼죠 나가요시森庄蔵長可 / 키노시타 토키치로 히데요시木下藤吉郎秀吉 / 아케치 쥬베에 미츠히데{明智十兵衛光秀, 역주 : 사실 미츠히데는 나가시노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당시 입경하여 쿄토 근변에 머무르던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 시마즈 4형제의 막내. 요시히사義久 / 요시히로義弘 / 토시히사歲久의 동생)를 응대하고 있었다.}  등이 진을 쳤다. 도합하여 총 병사수는 3만 명이었다. 아자이浅井 / 아사쿠라朝倉를 퇴치한 노부나가는 "이 일전은 중요하다" 고 보고 올스타 멤버를 데리고 온 것이다. 

  이에야스(당시 34세)는 타케히로 마을竹広村 탄죠 산弾正山, 사부로 노부야스(17세)는 쿠사베 마을草部村의 마츠오다이묘진松尾大明神을 모셔놓은 산에 포진했다. 이곳이 본영으로, 좌익의 선진은 오쿠보 타다요大久保忠世 형제 / 혼다 타다카츠本多忠勝 /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康政가 맡았고, 우익 부대로는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数正 / 사카이 타다츠구酒井忠次 / 마츠다이라 타다츠구松平忠次 / 스가누마 사다토시菅沼定利 / 오스카 야스타카大須賀康高 / 혼다 타다츠구本多忠次 / 사카이 마사치카酒井正親 등이 배치되었으며, 총 병사수는 8천 명이었다.

  노부나가는 이전부터 타케다의 전법을 살피면서 이에 대항할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원래 신겐의 전법이란 건, 밀집된 돌격부대로 하여금 거침없이 돌진하게 하여 적진이 혼란스러워지면 기마부대가 출격하는 방식으로, 언제나 이 전법을 구사하여 승리를 거두어 왔다. 노부나가는 이러한 타케다 군과의 정면대결은 회피하고, 신예병기였던 조총鉄砲으로 이를 저격하려 했다. 이것이 노부나가의 새로운 전술이었다. 그래서 북쪽으로는 마루야마 산丸山, 오오미야大宮 부근에서부터 남쪽으로는 토요카와 강豊川 유역에 가까운 타케히로 부근에 이르는 20여 정에 걸쳐 2중, 3중으로 마른 해자를 파고 흙벽을 쌓고, 3~40간 거리마다 출구를 열어놓은 목책 울타리를 설치했다. 이 흙벽과 울타리에 의지하여 타케다 군의 진출을 막은 후, 조총으로 박살내려는 것이었는데, 노부나가는 기후에서 출진할 때부터 이렇게 할 것을 예기하고 병사들 각자에게 목책용 나무를 휴대하게 했다고 한다.

(역주 : 요즘 학설은 나가시노 전투의 중요한 도식이었던 "조총 vs 기마대의 충돌" 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추세입니다. 사실 타케다 기마대는 존재하지 않았고, "삼단철포" 로 불리는 노부나가의 조총전술도 후세의 창작이라고 하는 식으로)  

  조총은 당시 5천여 정(역주 : 현재에는 1천여 정이 유력)을 갖고 왔다고 하는데, 이 신예병기에 노부나가는 대단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데 비해 카츠요리가 아버지 신겐의 옛 법도를 유지하는 것만을 생각하고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건, 조총을 입수하는 데 대한 편의성이 노부나가 / 카츠요리가 다스리는 그들의 영지에 따라 현저하게 차이가 났기 때문이라고 해도, 타케다 가문의 중대한 과실이었다. 활과 화살로 벌이는 옛날의 전법은 새로운 무기인 총기 앞에서는 정말로 무력하다는 것을, 나가시노 전투長篠の役는 보여주었다.

       

덧글

  • 키키 2016/02/28 14:36 # 답글

    빨리.. 다음 번역을... 현기증이..
  • 3인칭관찰자 2016/02/28 17:40 #

    오늘내로 하나 더 올릴 생각입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될지 확답은 못 드리겠는데(삼일절이 끼어 있으니 번역하는 게 수월해질지도) 아무리 늦어도 다음주 일요일까지는 확실히 다 번역할 수 있을거 같습니다 ^^;
  • 2016/06/08 19:34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3인칭관찰자 2016/06/08 20:02 #

    감사합니다,
  • 낙은혜 2016/06/10 12:25 # 삭제 답글

    카츠요리가 나가시노 성을 포위할 때
    쓰루가에서 도토미를 넘어 미카와로 들어가는 도카이도 루트로
    나아간게 아니라
    남시나노에서 밑으로 내려가서 미카와의 나가시노성까지 진군한건가요?
  • 3인칭관찰자 2016/06/10 15:32 #

    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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