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칭관찰자

beholderer.egloos.com

포토로그



《전국 셀렉션》동시대인의 사나다 유키무라 평가 (上) 역사

  

  이 글은《歷史群像シリーズ 戦囯セレクション 奮迅 真田幸村》P.96 ~ 97에 수록된 아토베 신跡部信 씨의 글로, 올해 NHK 대하드라마《사나다마루真田丸》의 주인공,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 유키무라)의 면모를 최대한 동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평가를 통해서 살피려 한 글입니다.(어떤 분들께는《사나다마루》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을지 모르니, 역사적 결과를 알고 싶지 않으신 분들은 보지 않으시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나다 유키무라(真田幸村, 노부시게信繁)는, 견줄 자가 없을 정도의 명장이라 평가받는다. 그러나, 오랜 기간동안 계속된 쿠도야마에서의 칩거생활을 생각해 보면 당시의 유키무라에 대한 평판이란, 대단히 미덥지 못한 것이었을 터이다. 동시대인들이 바라본 유키무라는, 정말로 용장勇將이었던 것일까?


  오사카 성 내에서의 평가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顂의 부름에 응하여 오사카 성大坂城으로 입성한 유키무라에게는, 황금 2백 매와 은 30관이 지급되었다.(《슨푸키駿府記》)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날에는, 거기에다 다시 50만 석의 영지를 주겠다고 약속되어 있었다.(《야마구치큐안바나시山口休庵咄》)

  같은 다이묘大名 출신 로닌浪人이라도, 쵸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의 경우 토사土佐 지방(20만 석)을 주겠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고, 한편으로 세키가하라 전투関が原の戰い에서 동군을 승리로 이끌었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가 그 공적으로 받은 영토가 오카야마 번岡山藩 51만 석이었으므로, 유키무라에게 거는 토요토미 가문의 기대란 건, 그와 맞먹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지만, 오사카에 입성하던 시점에서 유키무라의 실력은 미지수였다. 당초에 유키무라를 포함한 로닌들의 헌책은 성 내의 작전회의에서 대부분 기각당했다. 특히 유키무라의 경우, 형 노부유키信之와 삼촌 노부마사(信昌, 노부타다信尹)가 토쿠가와 측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속내를 짐작하기 힘들다" 고 하며 주위로부터 의심의 눈길을 받고 있었다.(《오치보슈落穂集》)

  그러한 시선이 부드럽게 변한 건, 겨울 전역 중이었던 (1614년) 12월 4일에 벌어진 "사나다데마루 전투真田出丸の戰い" 에서 활약한 이후가 아니었을까.

  강화를 맺을 것인가, 전투를 계속할 것인가. 성 내의 의견이 갈리었을 때 의사결정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건, 유키무라와 고토 마타베에後藤又兵衛의 제안이었다.(《야마구치큐안바나시山口休庵咄》) 전장에서 실적을 올리게 되면서 비로소, 로닌들은 약간이나마 발언력을 늘릴 수 있었던 것이다. 강화가 성립한 후, 유키무라는 매형姉婿에게 보낸 편지에서 "히데요리 님은 대단히 저에게 친밀하게 대해주십니다." 고 하며, 성 내에서의 자기 위치를 알린 바 있다.(《오야마다분쇼小山田文書》)   

  그런데 형 노부유키로부터 "온화하다" 는 평가를 받은 유키무라도(《신부나이덴츠이가真武內伝追加》), 전투에 임할 때는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여름 전역이 한창이었던 (1615년) 5월 6일 저녁, 카와치河內 지방 도묘지道明寺의 전장에서 오사카 측 부대들이 철수할 때, 유키무라는 위험한 후미부대(殿, 신가리) 역할을 어거지를 부려 맡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강력함을 과시하는 방식으로 군대를 물렸기에, 적 쪽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한편으로 아군 제장들로부터는 대단히 반감을 샀다고 전해진다.(《키타가와유쇼키北川遺書記》

  
  이에야스의 평가

  여름 전역가 벌어지던 5월 7일, 사나다 부대의 격렬한 공격 앞에 호위 기마무사들로 이루어진 친위대旗本가 무너져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고 (토쿠가와徳川) 이에야스家康는 할복을 각오했다, 고 한다(《예수회 연보》)

  그런 이에야스가, 유키무라를 그다지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5월 7일날의 결전에서 유키무라가 마음껏 전과를 올리지 못했던 건, 바로 그 전날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부대에 의해 그 밑에 있던 양장良將들을 많이 잃었기 때문이다, 고 분석하며 이틀간의 지휘역량에 대해 "대장된 자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활약" 이라고 혹평했다는 것이다.(《로단이치겐키老談一言記》)

  3배에 달하는 양군의 병력차를 무시한 이 폭론暴論은, 어떻게 해서라도 이에야스를 최상위에 놓고 싶어한 인간이 창작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쪽이 타당할 것이다.

  역으로 이에야스가 유키무라를 높이 평가하여, 겨울 전역의 강화 시점을 전후해, 이익을 앞세워 토쿠가와 측으로 배반할 것을 권유했다는 이야기는 신용할 수 있는 것일까?

  이 때 이에야스가 유키무라에게 제시한 조건이란, 사료에 따라서는 1만 석(《부케칸단武家閑談》)이라고도, 10만 석(《케이죠켄분가키慶長見聞書》)이라고도 한다. 첫 번째의 교섭에 실패한 이에야스는 이번에는 시나노 지방 전체(약 45만 석)를 미끼로 유키무라를 끌어들이려 했으나, "무사된 자의 변심은 의롭지 못하다. 설령 천하의 3분의 1을 준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없다." 고 하며 거절당하였다. 이에야스는 더욱 마음에 들어하면서, 내심 아쉬워했다고 전해진다.(《타이헤이야단쵸太平夜談抄》)

  당시의 전법으로 볼 때 유키무라에게 이러한 종류의 뒷공작이 행해진 것이야 신기한 일이 아니나, 각양각색으로 두텁게 분칠된 사료에 기대어 사실을 찾아보는 건, 그만두는 편이 나을 듯 하다.

  시점을 바꾸어보자. 여름 전역 결전의 날로부터 10일 정도가 지난 후인 5월 19일, 오사카를 탈출하여 키이紀伊 지방에 잠복해 있던 유키무라의 아내가, 와카야마 성주和歌山城主 아사노 나가아키라浅野長晟의 수사망에 걸려 포박당했다. 이에야스는 대단히 기분이 좋아져서 나가아키라를 칭찬한 후, 히데요리로부터 유키무라가 하사받아 아내에게 맡겨둔 황금 57매(570냥)와 명공 라이 쿠니토시來囯俊가 만든 와키자시를 그대로 나가아키라에게 하사했다.(《아사노카분쇼浅野家文書》,《슨푸키駿府記》) 이것들을 그대로 챙겨서는 텐카비토天下人의 체면에 누가 갈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하더라도, 금 570냥은 여성을 생포한 은상으로서는 파격적인 액수이다. 유키무라에 대한 이에야스의 평가를 추량하는 데, 한 가지 참고가 될 것이다.

 

덧글

  • 8비트소년 2016/02/01 09:37 # 삭제 답글

    지지난주에 오사카 nhK방문하니 사나다마루 드라마를 꽤 홍보하고 있더군요. 같이간 아내에게도 사나다 스토리를 설명해 주었는데 정작 드라마는 시간이 안 맞아 못보고 있습니다. 연휴에 오사카 방문예정인데, 유키무라가 은거했던 구도산을 지나 고야산도 가고(구도산이 고야산 입구같은 위치더군요) 드라마 본방사수도 해보려구요.
  • 3인칭관찰자 2016/02/01 18:45 #

    소재가 일본인들에게 친숙하니만큼 드라마만 잘 뽑혀나온다면 크게 히트칠지도요.

    저 같은 경우는 다른 이유로 못 보고 있습니다. 저희 집 TV에선 NHK가 나오지 않아서《천지인》부터《야에의 벚꽃》까지는 채널J에서 방영해주는 걸 봤는데,《군사 칸베에》부턴 NHK 사극을 수입하지 않더군요. 대하사극을 위해 많이 보지도 않는 TV 월 7천원씩 더 내고 보기도 그래서..

    연휴에 오사카 근변으로 가시는군요. 게임할 때 선입견이 든 것인지 오사카에서 고야산까진 꽤 멀리 떨어져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요즘은 철도를 통해 편하게 갈 수 있다.. 고 들어서 의외였습니다.
  • 8비트소년 2016/02/02 11:17 # 삭제

    저는 집에 제일 처음 케이블을 연결한 이유가 일본어 공부를 빙자한 NHK 타이가도라마 시청이었지요. '도쿠가와 삼대'를 초반 몇회는 녹화까지 해가며 봤는데 1년을 계속은 못보겠더라구요. 그 뒤로 그걸 뛰어넘는 대하드라마가 나온거 같지도 않고...... 채널 J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프로는 '수라의 길'인가 하는 야쿠자물이었던거 같아요.

    오사카에서 고야산까지 좀 멀기는 멉니다. 집사람이 오사카에서 일하고 있어서 작년 1월에 처음 가봤는데 기차타고 한시간 넘게 걸렸던거 같네요. 첩첩산중이라 옛날 같으면 딱 처박아놓기 좋은 곳인듯.
  • 3인칭관찰자 2016/02/02 14:23 #

    저희 집에는 2007년까지 NHK가 나왔었는데 기억에 남는 거라면 2002년에 방영된《토시이에와 마츠》랑 아마 2006년작이었을《공명의 갈림길》정도네요. 그 당시엔 청해가 전혀 안되었던 시기라 알아들어보려고 악전고투했던 기억이 납니다(....)

    철도 통해서도 고야산까진 1시간 넘게 걸리나보군요. 그럼 역시 멀긴 먼 곳이군요. 유배자들이 이 쪽에서 많이 칩거하거나 은둔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 시무언 2016/02/01 14:05 # 삭제 답글

    사나다 마루는 NHK 유튜브 페이지에서 5분 요약분이 올라오는데, 특이하게도 영문 자막판도 있더군요. 일맹인지라 영문 자막판 보고있습니다. 아무래도 초반은 아버지인 마사유키 쪽이 진주인공이 될것 같은 인상을 풍기더군요.
  • 3인칭관찰자 2016/02/01 18:47 #

    찾아가보니 정말로 NHK에서 요악해서 방영해주는군요. 덕분에 잘 보겠습니다.

    원래 노부시게(=유키무라)는 오사카 전투 제외하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건덕지가 좀 많이 부족하고 그 아버지는 워낙 개성적인지라 한동안은 마사유키 중심으로 가는 게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ㅎㅎ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통계 위젯 (블랙)

2467
551
348612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블랙)

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