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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채색한 여성들》츠키야마도노築山殿 (1) 역사



  본 글은 1985년, 안자이 아츠코 씨(安西篤子, 제 52회 나오키 상 수상작가)께서 집필하신《역사를 채색한 악녀, 재녀, 현녀》에 수록된 여성들 중,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첫 번째 정처로 에도 시대 이후 '둘도 없는 악녀' 라는 레테르를 쓰게 된 츠키야마도노築山殿에 관한 열전을 번역한 글입니다. 원서(코단샤講談社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버전)를 갖고 있었지만 시에서 주최하는 도서교환전에서 사용해버렸기에, 한 때 노트에 번역해놓은 이 츠키야마도노 열전밖에 남지 않았네요. 그렇기에 이 글이 배치된 정확한 책 페이지를 저도 잘 모릅니다(...) 역사소설가와 역사가를 겸직하시는 이 분 특성상, 당대의 역사계 트렌드를 잘 반영한 글로 보입니다.(단지, 아무래도 30년 전의 글이니만큼 요즘 나오는 학설들까진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도 있습니다.)


  '남편이 마음을 열어주지 않아'

  "한 번 보세요. 건강한 아이에요."

  분만실을 찾아온 남편 (마츠다이라松平) 모토야스元康를 보면서, 세나瀨名는 목소리를 내어 남편을 불렀다. 언제나 말수가 적은 마츠다이라 모토야스는, 첫 아이를 얻은 이 날도 딱히 기쁨을 드러내는 일 없이 살짝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아내의 머리맡에 앉았다.

  당시의 관습상, 분만실은 모두 '흰색' 일변도였다. 산모의 잠옷과 침구에서부터 시녀들의 옷차림, 그리고 병풍과 같은 가재도구에다 다다미 모서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흰색으로 치장되어 있다. 세나의 자리 옆에는 나란히 자그마한 침구와 이불이 깔려, 거기에서 핏덩이가 쿨쿨 잠을 자고 있었다.

  모토야스는 몸을 굽혀서, 침구 속에 '묻혀버린' 듯한 핏덩이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남편이 뭐라고 말할지, 세나는 숨을 삼키고 기다렸다.

  세나가 미카와 지방 오카자키 성주岡崎城主인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의 아내가 된 건, 2년 전인 코지 3년(1557) 1월이었다. 두 사람 모두 세는 나이로 16세, 파릇파릇한 젊은 부부였다. 작년 여름 세나는 임신하여, 올해인 에이로쿠 2년(1559) 3월 7일, 옥 같은 남자아이를 낳았다. 무사 가문에서 남자아이를 낳는 것은, 최우선적인 가치를 지닌다. 첫 아이가 남자였으니만큼 세나도 나름 거만을 부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단지, 과연 남편 모토야스가 진심으로 기뻐하는 건지 아닌지, 세나는 줄곧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럴만한 게, 결혼한 지 이미 2년여의 시간이 흘러갔지만 세나는 어쩐지 남편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다는 자신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모토야스는 온화하고 대단히 성실한 사내로, 아내에게도 언제나 정중한 표정과 태도를 잊지 않으면서, 세나를 아내로서 충분히 대접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나는, 남편이 진심으로 자기에게 마음을 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모토야스가 이불 속에 있는 핏덩이를 살펴보고 있을 때, 아이가 갑자기 자그마한 입을 벌려 하품을 하였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지켜본 모토야스의 볼에도 따뜻한 웃음꽃이 피었다.

  "정말로 귀여운 애구나."

  평소에 감정을 밖으로 잘 내비치지 않는 모토야스로서는 드물게도, 그 목소리는 명랑했다.

  "길례를 따라, 마츠다이라 집안의 후계자가 쓰는 아명인 '타케치요竹千代' 를 이 애에게 주겠소."

  모토야스도 성인이 되기 전까지 타케치요라는 이름으로 불려 왔다. 남편의 말을 듣고서야 세나는 안도했다. 결혼한 이래 처음으로 자신이 남편과 굳게 결합되었다고 느낀 것이다.

  모토야스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애초에 이 결혼은 '반강제적으로 떠맡은' 구석이 있었다.

  오카자키 성주 마츠다이라 히로타다松平広忠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서도 모토야스, 그러니까 당시에 타케치요로 불리던 소년이 오카자키 성에 거주한 것은 고작 세는 나이로 여섯 살 때까지였다. 오와리尾張의 오다 씨織田氏에게 계속해서 미카와三河의 영지를 침탈당하던 히로타다는,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종속하는 담보로서 타케치요를 스루가駿河의 요시모토에게 보냈다. 쉽게 말해, '인질' 이다.

  2년 후, 아버지 히로타다가 그 가신에게 살해당했으나, 요시모토는 타케치요를 오카자키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 대신 오카자키에는 이마가와의 가신을 보내어 지키게 하였다. 원칙적으로는 아버지 히로타다의 뒤를 이어 오카자키 성주가 되어야 할 타케치요는, 계속해서 인질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타케치요가 14세가 된 코지 원년(1555), 요시모토는 스스로 에보시오야(烏帽子親, 역주 : 일본의 전통 성인식을 주재하는, '대부' 역할)를 맡아서 이 소년의 성인식을 치뤄주고, 자신의 이름 한 글자를 하사하여 "모토노부元信" 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모토노부는 그로부터 3~4년 후, 용장으로 유명했던 할아버지 키요야스清康를 본받기 위하여, "모토야스元康" 로 개명했다.

  요시모토는 이어서 모토야스에게 아내를 안겨 주었다. 그녀가 이마가와 가문의 일족인 세키구치 치카나가関口親永의 딸 세나히메瀨名姬이다. 세나히메의 어머니는 요시모토의 여동생이므로, 신부는 요시모토의 조카딸이다. 모토야스의 부인이 된 세나히메가 거주하던 저택 정원에 아름다운 석가산築山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후로 츠키야마도노築山殿, 석가산 님으로 불리게 된다.

  스루가의 이마가와 씨는 아시카가 쇼군 가문의 일가붙이로, 무로마치 시대 이후 스루가 / 토오토우미遠江 2개 지방을 텃밭으로 영화를 누리던 명문가였다. 미카와 마츠다이라 마을의 토박이 호족에서부터 시작한 마츠다이라와는 격이 다른 뼈대 있는 집안이다. 그러한 연유에서 모토야스를 자신의 부하와 같이 취급하여 감싸주고 도와주는 대신, 전쟁이 나면 가장 위험한 전선에 모토야스의 가신들을 내몰았다.

  요시모토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모토야스를 키우고, 아내까지 맺어주며 돌봐주려는 배려였겠지만, 모토야스와 그 가신들은 요시모토의 처사에 불만과 원한을 품고 있지, 조금도 고마워하지 않았다. 단지 요시모토의 위세가 워낙 노기등등한터라 불평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따름이었다.

  아내로 맞아들인 세나 그 자체에게 모토야스는 딱히 미움을 느낀 건 아니었다. 유서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귀여움받으며 자란 세나히메는, 구김살없는 밝은 성격과 아름다운 외모, 쿄토풍의 교양도 익히고 있던 재녀였다. 어디를 봐도 그닥 흠결이 없는 여성이라, 꺼리고 미워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 여자가 '요시모토에게서 떠맡은' 아내이기 때문에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인질이 되어 십 수년간 참고 살던 모토야스로서는, 이마가와 일족의 아가씨를 진심으로는 사랑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자연스럽게 차가운 태도를 보이게 된 것이다.

  '남편이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다' 고 세나가 느낀 것은, 틀림없는 진실이었다. 그러한 모토야스도, 처음으로 자기 자식과 대면하는 순간에는 진심으로 설레어했다. 무사 가문에서는 남자 후계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로서 마츠다이라의 앞길도 안락하고 태평하다.' 고 생각하자 모토야스의 입꼬리도 무심코 올라갔다.

  모토야스와 세나의 부부관계는 그 후로는 이전보다 화목해졌고, 세나는 얼마 가지 않아 2번째 임신을 하였다. 그리고 타케치요를 출산한 바로 그 다음 해(1560) 3월 18일, 이번에는 여자아이를 출산했다. 이 핏덩이는 "카메히메(龜姬, 역주 : 훗날 오쿠다이라 노부마사奥平信昌의 아내가 됨)" 라고 이름지어졌다.

  1남 1녀의 어머니가 된 세나는 행복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러나 카메히메가 태어난지 고작 2개월 후에, 생각지도 못한 불운이 세나를 찾아왔다. 쿄토로 입성하여 무위를 전일본에 떨치려 했던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대군을 이끌고 슨푸駿府를 출진했으나, 그 여로인 오와리 지방의 오케하자마桶狹間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필사적인 기습을 받고 패배, 사망敗死한 것이다. 에이로쿠 3년(1560) 5월 19일에 일어난 돌발사태였다.

  큰삼촌이자 든든한 뺵이었던 요시모토를 잃은 세나는 깊은 슬픔에 빠졌으나, 이제부터 더욱더 비통한 쓴맛을 보게 된다. 남편 모토야스의 태도가 180도 일변한 것이다.   

  

덧글

  • 2016/01/24 17:0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01/24 19:1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진냥 2016/01/24 22:15 # 답글

    옛날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보면서 전형적인 악역 캐릭터인 츠키야마도노가 신기했는데.... 이제야 본인의 입장을 접할 수 있겠군요. 늘 번역 감사드립니다!
  • 3인칭관찰자 2016/01/25 15:06 #

    토쿠가와 가문이 군림하던 에도 시대 당시, 이에야스를 좋게 묘사하는 데 방해가 되는 몇 가지 (이에야스의) 흑역사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어용사학자들이 필사적으로 윤색해준 느낌이 있긴 합니다. 이에야스가 미화되는 대신 덤터기쓴 역사인물들 중 하나가 아닐까 싶네요..

    저도 진냥님께서 올려주시는 글 잘 읽고 있습니다.(근래 댓글을 잘 안 단 것 같아 송구스럽기도...) 추운 날씨지만 오늘도 건강하시길!
  • 빼뽀네 2016/01/25 17:03 # 답글

    올리시는 글을 통해 매번 새로운 정보를 얻어갈 수 있어 늘 감사한 마음 갖고 있습니다.

    '츠키야마도노'라는 이름의 유래에서 말씀하신 석가산은 '조경을 위해 인공적으로 쌓은 산'을 뜻하는지요?
    국어사전 찾아보니 그렇게 되어 있네요.
    본문에는 '築山'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건 사전 검색에 안되네요.
    궁금해서 한 번 질문드립니다.

    츠키야마도노에 대해서는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을 통해 보았기 때문에 인상이 안 좋았는데
    앞으로 잘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6/01/25 18:34 #

    네. 석가산의 의미는 빼뽀네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롭니다.

    이 글에는 적혀있지 않습니다만 이에야스는 1570년까지 8년간 세나히메가 오카자키 성에서 거주하지 못하게 하고 교외의 절에 연금시켰는데, 그 절에 아름다운 석가산(츠키야마)이 있었기 때문에 그 석가산이 세나히메의 별칭이 된 거라고 합니다.
  • 빼뽀네 2016/01/26 09:55 #

    답변 감사합니다.

    저는 처음에 '츠키야마도노'라는 호칭이 이 사람이 이에야스와 혼인한 직후에 생긴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붙은 것이었군요.
    알려주신 '1570년까지 8년간'의 연금은 이에야스가 오다가와의 소통을 위해 처한 조치였는가요?
  • 3인칭관찰자 2016/01/26 13:36 #

    1561년부터 이마가와 가문이 멸망하는 1569년까지 이에야스와 이마가와 가문은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 츠키야마도노가 이마가와의 피붙이이기 때문에 그 기간동안 연금시켜놓았다가, 이마가와가 망하고 노부야스가 성인식을 치르면서 풀어준 게 아닐까 싶습니다.
  • 빼뽀네 2016/01/26 18:14 #

    아,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8비트소년 2016/01/26 08:47 # 삭제 답글

    정처와 적장자를 스스로 죽인것, 이에야스 생애에서 가장 큰 오점이지요.
  • 3인칭관찰자 2016/01/26 13:38 #

    노부나가가 시킨 것이든 이에야스 자신의 결정이든 그들을 처단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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