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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자들의 전국사》세키가하라 전투 (完) 역사



  본 글은 2007년, 일본 출판사 헤이본샤平凡社에서 신서본新書本으로 간행된 스즈키 마사야鈴木眞哉 씨의 저서《패배자들의 전국사負け組みの戦囯史제 3장 <승리자들 속에서 나온 패배자들> 중 4편인【 세키가하라의 결산関ヶ原の結算 】부분(p. 109 ~ 130)을 번역한 것입니다. 위 책은 현재에도 일본에서 판매되고 있는 책이며, 국내 인터넷 서점을 통해서도 구하실 수 있는 책이기 때문에 이 편 외에 다른 부분까지 번역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절대로 배포나 불법공유 목적으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여기서 명확히 하겠습니다.


  배반자들의 손실과 이득

  일단 동군 / 서군 어느 쪽에 가담한 후에 태도를 바꾼 가문도 적지가 않다. 서군에서 동군으로 갈아탄 케이스 쪽이 더욱 많아서 십 수 가문에 달하는데, 승패가 명확해진 이후에 귀속을 바꾼 가문도 제법 있다. 반면, 처음에는 동군 편에 섰다가, 이후에 서군으로 돌아선 가문도 2 ~ 3가문 정도가 된다.

  당연하겠지만 동군 -> 서군 코스를 밟은 가문은 모두가 "패배자負け組み" 가 되었다. 시모츠케下野 지방 내 2만 석을 영유하던 야마카와 토모노부山川朝信는 그 다음 해에 카이에키(改易, 역주 : 영지 몰수) 당하고, 본가에 해당되는 유우키 가문結城家의 가신이 되었다. 앞에서 다룬 바 있던 오다 히데카츠(織田秀雄, 역주 : 노부나가信長의 차남인 노부카츠信雄의 장남)도 5만 석의 영지를 잃은 후, 에도에서 조용히 살면서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로부터 녹과 쌀을 하사받고 있다가, 아버지인 노부카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나바因幡 지방 톳토리 성주鳥取城主 미야베 나가히로宮部長熙도 5만 석(일설에 의하면 13만 석)의 영지를 빼앗긴 후, 난부 가문南部家에 신병이 위탁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위의 인물들은 만약 세키가하라 본전투에서 서군이 이겼다면, 한 몫 벌었을까하는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몰락하는 일 없이 "승자勝ち組み" 들의 일원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군 -> 동군 코스를 밟은 가문은 어찌되었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한 몫 잡은 가문 / 득실이 없었던 가문 / 손해를 본 가문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한 몫 잡은 가문들의 필두는 5만 석 정도의 가봉을 받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이리라. 세키가하라 본 전투에서 동군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최대의 공로자였으므로,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미노美濃 지방에서 4만 석을 영유하던 이나바 사다미치稲葉貞通도 본 전투 이전에 동군으로 돌아서서, 큐슈로 영지가 옮겨진 후 1만 석을 가봉받았다.

  옛 영지를 보장받은 자들도 상당히 많다. 히젠肥前 지방 내 35만 7천 석을 영유하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를 위시하여, 휴우가日向 지방 내 5만 석 다이묘 타카하시 모토타네高橋元種 / 같은 지방 3만 석 다이묘 아키즈키 타네나가秋月種長 / 히고 지방 내 2만 7천 석 다이묘 사가라 요리후사相良顂房 등 큐슈의 가문들이 두드러지는데, 미노 지방에서 1만 2천 석을 영유하던 이나바 미치시게(稲葉通重, 사다미치의 조카)도 옛 영지를 보장받은 자에 속한다. 이들 가운데 나베시마는 자기 영지에 있으면서, 같이 서군에 가담했던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를 공격하였고, 타카하시 / 아키즈키 / 사가라 3명은 오가키 성大垣城에서 아군들을 모살謀殺하여, 토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입증했다.

  세키가하라 본 전투에서는,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와 함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 쿠츠키 모토츠나朽木元綱 / 오가와 스케타다小川祐忠 / 아카자 요시이에赤座吉家 네 무장이 배반한 바 있는데, 그들의 운명은 제각각이었다. 아와지淡路 지방에서 3만 5천 석을 영유하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미리 동군과 교감이 있었던 듯 옛 영지를 보장받고, 9년 후에는 5만 3500석으로 가봉ㆍ영지 이전되었다. 그 자손들은 막부의 요직에 앉아보기도 하면서, 무사히 메이지 유신을 맞았다.《칸세이쵸슈쇼카후寬政重修諸家譜》의 카후(家譜, 가문 내력이 적힌 족보)에서도 [ 전장에서 배반하여, 미츠나리의 군을 크게 격파했다. ] 고 태연스럽게 적혀 있다.

  오우미近江 지방에서 2만 석을 영유하던 쿠츠키 모토츠나는 전후 9천 5백여 석이 되었다고 하므로, 명백히 영지가 깎여나갔을 터인데도 카후에는 영지를 보장받았다고 적혀 있다. 이것은 그의 3남이 다시 다이묘 대열에 복귀하여, (3남의) 아들 시대에 3만 2천 석을 영유하게 되었으므로 적당히 눙친 것이리라. 종가의 경우 많은 녹을 받는 하타모토旗本로서 계속 존속했다. 이 쪽도 배반하여 대성공을 거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가와 스케타다는 배반했을 뿐 아니라 서군의 용장 히라츠카 타메히로平塚爲広의 목을 베는 공적까지 세웠는데도, 카이에키당하여 7만 석의 영지를 상실했다. (동군과) 사전에 교감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스케타다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선 다른 설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바로 다음 해에 병으로 죽었다고 전해진다. 에치젠越前 지방에서 2만 석을 받던 아카자 요시이에도 카이에키당한 사례 중 하나이다. 그 후, 마에다 토시나가前田利長의 가신이 되었으나, 몇 년 후 말을 타고 물이 불어난 엣츄越中 지방의 강물을 건너려다 그대로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여러 배반자들 가운데 가장 운이 나빴던 자는, 타지마但馬 지방에서 2만 2천 석을 받던 사이무라 마사히로斎村政広였다. 그는 서군 편에 서서 동군의 성을 공격했다가, 본 전투에서 서군이 패배한 것을 알고는 동군으로 전향했다. 미야베 나가히로의 톳토리 성을 포위하는 데 가담했는데, 그 때에 질렀던 불이 톳토리 성의 죠카마치城下町를 태워버리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듣고 화가 난 이에야스는, 마사히로에게 할복할 것을 명령했다. 불참자 / 양다리 걸친 자 / 배반자들 가운데, 이러한 식으로 목숨을 빼앗긴 건 마사히로 한 사람밖에 없다.


덧글

  • 함부르거 2016/01/23 08:58 # 답글

    사이무라는 지딴엔 잘해보자고 한 걸텐데 진짜 불쌍하네요. ㅋ
  • 3인칭관찰자 2016/01/23 11:09 #

    정말로 그렇습니다. ㅋㅋㅋ

    최후와는 별개로 일본에 끌려갔다 돌아온 조선 선비 강항은《간양록》에서 사이무라를 두고 "일본의 무장들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의 마음을 지녔던 자" 라고 평가했다고 하더군요. 유교에 심취한 사람이라 중국과 조선을 문명국으로 받들고 그 풍습을 따라하였으며, 유교경전 배우기를 즐겼다고...

    (임진왜란 때 병력을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온 거야 뭐.. 흑역사이겠습니다만)
  • BigTrain 2016/01/24 01:00 # 답글

    확실히 배신도 제대로 하려면 줄을 잘 대고 있어야...
  • 3인칭관찰자 2016/01/24 07:31 #

    미리 줄을 대서 교감을 갖고 배신하는 거랑 그냥 배신하는 거랑 차이가 많이 나는 것 같더군요. 그마저도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실은 30만석 -> 55만석) 제외하면 영지가 많이 늘어난 집안이 없어서(...) 세키가하라의 경우 배반자들에 대한 처우가 박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뭐 노부나가가 타케다 멸망시킬 때 카츠요리 배신해서 죽게 만든 오야마다 노부시게가 영지보전은 커녕 참수당한 걸 생각하면.. 최소한 배신 때렸다 죽은 사람은 거의 없으니 그나마 나으려나요)
  • Hyth 2016/01/24 16:39 # 답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세키가하라 후 5년도 안지나서 급서한걸로 아는데 그 영지는 어떻게 됐나 궁금하네요. 모리쪽으로 갔을거 같진 않고 그냥 막부가 회수했나...
    p.s. 본문의 사가라 한자는 上良이 아니라 相良이었던거 같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6/01/24 19:05 #

    相良이 맞습니다. 어째 좀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케다 츠네오키의 차남으로 세키가하라 이후 히메지 지방 다이묘가 된 이케다 테루마사는 전처와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고, 그녀가 죽은 뒤에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둘째 딸을 후처로 맞아들여 아들 5명을 봤는데, 결과적으로 말씀드리면 전처 자식의 후손들이 히데아키가 본거지로 삼은(오카야마 성이 포함된) 비젠 지방을 다스렸습니다.(후처 자식 중 둘째 아들이 이나바 / 호키 지방을 통치)

    마찬가지로 히데아키의 영지가 되었던 미마사카 지방에는 모리 란마루의 동생인 모리 타다마사&그 후손들이 약 100년간 통치하다가 카이에키당하고, 그 후에는 이에야스의 차남인 히데야스 계열이 들어와서 메이지 유신까지 군림했다고 하네요.
  • 청순한 얼음요새 2016/03/17 04:16 # 답글

    결국 테루모토는 멍청이에 겁쟁이다 라는 생각이 드네요
    모략가 이자 전략가 모리 모토나리 손자가 저렇게 무능할줄은 모토나리도 몰랐겠죠
  • 3인칭관찰자 2016/03/17 14:16 #

    테루모토의 처신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것이었죠.. 만약 그 할애비 모토나리가 저 때 저 위치에 있었다고 치면 아마 이에야스까지 제치고 일본을 통일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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