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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자들의 전국사》세키가하라 전투 (4) 역사



  본 글은 2007년, 일본 출판사 헤이본샤平凡社에서 신서본新書本으로 간행된 스즈키 마사야鈴木眞哉 씨의 저서《패배자들의 전국사負け組みの戦囯史제 3장 <승리자들 속에서 나온 패배자들> 중 4편인【 세키가하라의 결산関ヶ原の結算 】부분(p. 109 ~ 130)을 번역한 것입니다. 위 책은 현재에도 일본에서 판매되고 있는 책이며, 국내 인터넷 서점을 통해서도 구하실 수 있는 책이기 때문에 이 편 외에 다른 부분까지 번역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절대로 배포나 불법공유 목적으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여기서 명확히 하겠습니다.


  양다리 걸친 자들二股組의 행방

  동군 / 서군 쌍방에 줄을 댄 가문은 상당히 많았다. 그들 가운데선, 계산하에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으리라 보이는 사례 / 우왕좌왕하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사례 /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사례들이 존재하여, 갖가지 양태를 띠고 있다.

  결과를 알고 있는 후세 사람들이 보기엔 '일부러 양다리를 걸치거나 우왕좌왕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겠지만, 당사자의 입장이 되어본다면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는 아니게 된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어느 쪽이 이길지 용이하게 예측할 수가 없었다. "이에야스가 이길만 해서 이긴 것이다." 는 건, 결과론자들의 허튼 소리에 불과하다.    

  세키가하라에서 동서로 갈려 싸운 건, 모두가 "승자勝ち組" 였던 토요토미 다이묘豊臣大名들이다. 굳이 전란 속에 몸을 던지지 않더라도, 지위와 재산을 보장받고 있다. 동군에서는 토쿠가와徳川 (가문의) 후다이(譜代, 역주 : 특정 가문을 대대로 섬겨온 집안)들, 서군 쪽이라면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같은 신념적인 주동자들을 제외하면, 될 수 있는 한 관여하고 싶지 않아하는 자들도 많았음이 틀림없다. 어느 쪽에도 참가하지 않고 관망만 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것은 없었으며,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양쪽 모두에게 잘 보여두자, 는 식이었으리라. 

  동서로 갈리어 붙은 사례로 가장 유명한 것은,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케이스일 것이다. 시나노信濃 지방 우에다 성주上田城主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는, 차남인 유키무라(幸村, 노부시게信繁)와 함께 서군에 가담했고, (마사유키의) 장남으로 코즈케上野 지방 누마타 성주沼田城主인 노부유키信之는 동군에 가담했다. 마사유키의 행동은 토요토미 가문에 대한 의로운 마음義心 때문이었다는 관점에서 해석되기 일쑤이나, 그는 그렇게 조신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번 기회에, 한 번 대박을 내 보겠다' 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으며, 자기가 나서서 분발하면 서군이 승리할 확률도 크게 높아지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야스와는 엣날부터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이에야스를 한 번 기겁시켜 보자는 심산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 노부유키의 경우는 이에야스의 수양딸을 아내로 맞아들인 관계상 동군에 참가했다고 하나, 그도 만만찮은 인물이었다. 적어도 아버지와의 사이에 "암묵의 양해" 는 존재했으리라 보는 게 자연스럽다. 전후, 그는 죄를 문책받아 죽음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던 아버지와 동생을, "제 공적으로 대신하여..." 라고 우겨서 목숨을 건져냈다. 그뿐만 아니라, 누마타 영지에다 아버지의 영지까지 물려받고, 거기에다 또 영지를 가봉받았다고 하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미노美濃 지방 세키関 영주인 오시마 미츠요시大島光義의 가문도 미츠요시와 장남이 동군에 가담하였고, 차남과 3남이 서군에 가담하여 후시미 성 공방전에 참전했다. 그러나 미츠요시가 자신의 공적으로 대속하여 그들의 죄를 없애주었기에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는데, 영지를 가봉받기까지 했으므로, 이쪽도 대성공한 사례이다.

  시마志摩 지방의 해적부대로 유명한 쿠키 가문九鬼家의 경우는, 아버지인 요시타카嘉隆가 서군 / 아들 모리타카守隆가 동군에 속하였다. 요시타카는 세키가하라 당시에는 이미 은거해 있었으나, 이에야스에게 오랜 원한이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상당히 신념적으로 서군에 가담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는, 아들이 이에야스의 우에스기 공격上杉攻め에 종군하고 있는 틈을 타 옛날의 본거지를 탈취했다. 그리고는 서군에 가담한 다른 해적들과 결탁하여, 토카이東海 방면에 면한 동군의 영지를 해상에서 위협하는 등, 득의로 삼는 수군들을 부리며 크게 활약했다. 

  여기에는 이에야스도 당황하여, 자신에게 가담하였던 모리타카를 영지로 돌려보내 요시타카와 맞서게 했다. 서군이 패배한 후 요시타카는 잠복하였는데, 모리타카가 백방으로 손을 써 간신히 목숨을 살려준다는 허락을 받아냈으나, 그 통지를 받기 전에 요시타카가 자살해버렸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이걸로 납득한 것인지, 모리타카는 가문을 유지했을 뿐 아니라, 가봉까지 받았다.

  이즈미和泉 지방 키시와다岸和田의 코이데 히데마사小出秀政는, 히데요시의 숙모사위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오사카에서 이시다 미츠나리의 지휘하에 있었던 것 같으나, 본인은 적극적인 활동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타지마但馬 지방 이즈시 성주出石城主인 장남은 동군의 타나베 성田辺城을 공격하였고, 아직 소년이었던 4남도 오즈 성 공격에 참가하여 부상당한 바 있다. 이래서는 처벌을 면하기 힘들어보였으나, 마침 그의 차남이 이에야스의 우에스기 토벌에 종군하였다가 그대로 동군에 눌러앉아, 그 후 전공을 세웠다고 하여 부자 전원이 무사할 수 있었다.

  아와阿波 지방 토쿠시마徳島의 하치스카 가문蜂須賀家은 아버지인 이에마사家政가 서군에 가담했지만, 호쿠리쿠北陸 방면으로 장병들을 보냈을 뿐, 본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출병한 장병들도 "군량이 다 떨어졌다" 고 하며 적당한 선에서 돌아왔다. 그런 한편으로, 이에야스의 수양딸을 아내로 맞은 (이에마사의) 아들 요시시게至鎮는 이에야스의 우에스기 토벌에 종군하여, 그대로 동군에 눌러 앉았다. 세키가하라 본전투에서도 출격했으나, 전투할 기회는 부여받지 못한 듯하다.

  전후, 이에마사는 "서군에 장병들을 가담시킨 건, 가신이 멋대로 저지른 일이다." 라고 해명하며 [ 책임자 ] 를 추방시켰다. 그러나 [ 세간에서는 "부자가 각자 동서로 갈라져, (앞날이) 어떻게 굴러가더라도 무사하게끔 획책한 것" 이라 말했다, ] 고《한간후藩翰譜》에 적혀 있다. 제 3자들에게까지 그 속을 간파당한 것이나, 약간이나마 영지가 늘어나기도 했으므로 대성공한 부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사누키讚岐 지방을 다스리던 이코마 치카마사生駒親正는 "히데요시의 옛 은혜를 잊기 어렵다" 고 말하며 손자와 함께 서군에 가담했고, 전투에도 관여했으나, 그 본인은 병에 걸렸다고 말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꾀병인지 진짠지는 알 수가 없다. 한편 그 아들인 카즈마사一正는 우에스기 토벌 이후 세키가하라 본전투를 벌일 때까지 계속해서 이에야스를 따랐기에 아버지의 영지를 그대로 상속할 수 있었고, 전후 은둔해 있던 아버지 치카마사도 용서를 받았다.

  휴우가日向 지방의 이토 스케타카伊東祐兵는 병에 걸려 있었다고 하는데, 본 전투가 끝난 후 얼마 지나지도 않아 오사카에서 병으로 죽었으므로, 이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나이 어린 자식에게 가신들을 배속시켜 영지로 돌려보내 서군과 싸움을 벌이게 하는 한편으로, 서군 쪽에도 대리인을 보내어 오즈 성 공방전 등에 참가하게 했다. 이쪽도 어느 쪽으로 굴러가더라도 무사하게끔 획책한 것으로, 어찌됐든 가문을 보전할 수 있었다.

  카가加賀 지방의 마에다 가문前田家 같은 경우는,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의 장남이자 당주였던 토시나가利長가 동군에 가담하였고, 차남이었던 토시마사利政는 서군에 마음을 주었다, 고 일컬어진다. 토시마사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은 건 사실이며, 마에다 가문 내에서도 서군에 참가할 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었다. 그러나 토시마사의 본심이 어쨌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몇 마디 더 하자면, "토시나가로서도 동군과 서군 어느 쪽이라도 괜찮으니, 이번에 자기 가문의 세력을 확대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

  그렇기에, 형제가 명확히 노선을 달리한 것인지, 아니면 미리 작당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우연의 산물인지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다. 전후, 토시마사는 카이에키(改易, 역주 : 영지 몰수)당했으나 생명에 지장은 받지 않았고, 거둬들여진 노토能登 지방 21만 5천 석도 그대로 형 토시나가에게 주어졌으니, 마에다 가문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손해보지 않은 장사였던 것이다.

  오다織田 일족도 동서로 갈려서 싸운 경우이다. 노부나가의 손자로 당주였던 오다 히데노부秀信는 서군에 가담했고, 그 삼촌들도 오다 노부카츠信雄 이하 대부분이 서군에 가담하여, 노부츠구信次 같은 경우 세키가하라 본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리고 노부카츠의 아들인 히데카츠秀雄처럼, 한 때 마에다 토시나가와 행동을 같이 하였음에도 서군으로 전향한 자가 있었다. 그런 한편, 노부나가의 동생인 나가마스(長益, 역주 : 우라쿠有楽) 부자는 동군에 가담하였으며, 세키가하라 본전투에도 참가했다. 

  이 가문의 경우, 일족들이 계획적으로 어떻게 어떻게 행동했다, 고 하기보단, 종가의 통제가 먹혀들지 않은 데 불과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서군에 가담한 자들은 모두가 영지를 상실했으나, 노부츠구 이외에 목숨을 잃은 자는 없다. 동군에 가담한 나가마스의 집안이 토쿠가와 다이묘가 된 것은 당연한 것이나, 한 번 영지를 잃었던 노부카츠의 집안도 간신히 다이묘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들 외에 두 집안 정도가 토쿠가와 가문의 하타모토가 되어 후세에 이르기까지 존속했다.  


덧글

  • 시무언 2016/01/22 02:39 # 삭제 답글

    사나다 노부유키는 아버지와 동생 때문에 고생 안했으면 메이지 유신때까지 살았을거란 농담도 있을 정도더군요.
  • 3인칭관찰자 2016/01/22 08:47 #

    그러고보니 노부유키는 꽤 오래 살았었죠. 정확히 몇살까지 살았는진 기억이 안나지만 두 아들 먼저 보낸 후 손자 후견인까지 도맡았다고 하니...
  • behavior 2016/05/21 19:30 # 삭제 답글

    질문이 있는데 당시 마사유키와 노부시게의 서군에서 싸운 죄가 목숨도 보전못할 정도였나요? 2만명 가까이 되는 병력으로 싸운 비젠의 히데이에가 목숨은 보전한 걸 보면 겨우 1천명 약간 넘는 병력으로 귀찮게 한 정도로 사형을 당할 뻔했다면 이건 이에야스의 개인적인 마사유키에 대한 원한?두려움?이 컸던 것 같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6/05/21 21:09 #

    우키타 히데이에도 이시다 미츠나리처럼 전투 직후 붙잡혔다면 쿄토에서 참수형당하는 걸로 끝났을 겁니다. 운 좋게 사츠마까지 도망쳐서 시마즈 씨의 비호를 받으며 2년간 소란이 잦아들기를 기다려 자수한데다가, 히데이에의 아내가 토쿠가와 막부 다음가는 대영주였던 마에다 가문의 딸이라 마에다 쪽에서 이에야스에게 이리저리 공작을 해서 겨우 평생 유배당하는 정도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이기에.

    요즘은 토쿠가와 히데타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 불참하게 된 게 과연 이에야스가 의도하지 못한 것인가, 의도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동군에 얼마만한 타격을 준 것이었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기도 합니다만, 마사유키의 경우 1585년에 코즈케 지방의 영지문제로 한 번 이에야스를 배반하고 그 보복으로 쳐들어온 토쿠가와의 대군을 박살낸 전과가 있었지요.

    거기에다 일단 토요토미 정권 내에서의 신분으로 보면 아들 노부유키는 이에야스의 신하였고, 마사유키와 유키무라도 히데요시가 파견한 요리키이긴 했으나 이에야스 밑에 배속되어있는 형태였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두 번째로 배반한 것으로 간주되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물론 우키타에게 마에다 가문이 있었듯이 마사유키 부자에게는 사나다 노부유키가 있었기에 살아남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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