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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자들의 전국사》세키가하라 전투 (2) 역사



  본 글은 2007년, 일본 출판사 헤이본샤平凡社에서 신서본新書本으로 간행된 스즈키 마사야鈴木眞哉 씨의 저서《패배자들의 전국사負け組みの戦囯史제 3장 <승리자들 속에서 나온 패배자들> 중 4편인【 세키가하라의 결산関ヶ原の結算 】부분(p. 109 ~ 130)을 번역한 것입니다. 위 책은 현재에도 일본에서 판매되고 있는 책이며, 국내 인터넷 서점을 통해서도 구하실 수 있는 책이기 때문에 이 편 외에 다른 부분까지 번역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절대로 배포나 불법공유 목적으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여기서 명확히 하겠습니다.

  
  서군에 가담하여 몰락한 가문 / 그렇지 않았던 가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한 가문은 죄다 "패배자" 가 되었다고 생각하실지 모르나, 반드시 그랬던 건 아니다. 그나저나 서군 편에 선 다이묘大名가 몇 가문이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의외로 어렵다. 종가宗家와 분가分家가 거취를 달리하거나 / 같은 가문이 양다리를 걸치거나, 심한 경우는 본인이 도중에 소속을 바꾸어 버린 사례가 여럿 존재하기 떄문이다.

  예를 들어, 9월 15일에 벌어진 본 전투에서 서군 측과 함께 했던 자를 서군이라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할 수가 없다. 그들 가운데는 전투가 한창일 때 배후에서 아군을 습격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나, 그와 연동하여 배반한 자가 여러 명 있다. 그리고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처럼, 자기 부대 뿐 아니라 사정을 알지 못했던 모리 가문 종가의 병력들까지 끌어들여 부전관망不戦觀望으로 일관하면서 전투의 향방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자도 존재한다. 이런 가문들을 서군으로 분류할 순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 넓은 의미에서의 세키가하라 전투는 본 전투가 벌어진 장소에 국한되지 않고, 각지에서 전개되었으므로 다른 지역에서 전투를 벌인 자도 허다하다. 시나노信濃 지방 우에다上田의 본거지를 지키며 이에야스家康의 아들 토쿠가와 히데타다秀忠의 대군에 맞서 싸운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 등이 그 적절한 사례 중 하나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해하기 쉬워 보이나, 서군 쪽에 기운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끝까지 중립을 가장한 히타치常陸 지방의 사타케 요시노부佐竹義宣와 같은 사례도 있다.

  (토쿠가와) 막부의 신하 오다 아키노부小田彰信가 에도 시대 후기에 편찬한《하이세츠로쿠廃絶録》는, 세키가하라에서의 책임을 추궁받아 영지를 몰수당한 다이묘가 82명 / 영지를 삭감당한 다이묘가 7명 있다고 적고 있다. 그 중에는 주모자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를 위시하여 마사유키나 요시노부도 포함되어 있다. 토쿠가와 가문이【 전범 】으로서 인정한 건 이들 정도였을지도 모르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이 점에 대해 상세한 통계를 작성하신 분이 가모 마사오蒲生眞紗雄 씨이다. 가모 씨는《니혼시소우란日本史総覧》에 나오는 토요토미 다이묘들의 표를 베이스로 삼아, 동군에 속한 가문 85 / 서군에 속한 가문 101 / 그 외 38, 로 분류하셨다. 서군에 속한 101개 가문 중에서는, 사타케 요시노부나 모리 테루모토와 같이 실제로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던 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한편,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위시한 배반자들과, 사나다 가문과 같이 아버지와 아들이 귀속을 달리한 경우는, "그 외" 인 38개 가문으로 분류해 놓았다.

  가모 씨의 말씀에 따르면, 서군에 속한 101개 가문 중 87개 가문이 카이에키(改易, 역주 : 영지 몰수)당하였는데, 그들 중 29가문의 당주는 전사戦死 / 처형刑死 / 자살自殺 / 모살謀殺 등의 형태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전사한 자로는 (세키가하라) 본 전투에서의 시마즈 토요히사(島津豊久, 휴우가日向 지방 내 약 2만 8천 석) / 토다 카츠시게(戸田勝成, 에치젠越前 지방 내 2만 석) / 히라츠카 타메히로(平塚爲広, 미노美濃 지방 내 1만 5천 석)들이 있으며, 지방에서 본거지를 지키다 전사한 자로는 야마구치 마사히로(山口正弘, 카가加賀 지방 내 6만 석)와 그 아들 나오히로(修弘, 카가 지방 내 1만 3천 석)들이 있다. 처형당한 자는 이시다 미츠나리(오우미近江 지방 내 19만 4천 석) /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히고肥後 지방 내 20만 석) /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 이요伊預 지방 내 6만 석)들이다.

  자살한 자로는, 전장에서 죽은 자론 미츠나리의 맹우盟友ㆍ오타니 요시츠구(

덧글

  • 시무언 2016/01/17 15:12 # 삭제 답글

    생각해보니 모리 쪽이 좀 더 적극적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몰랐겠네요.

    삼국지 영걸전 시리즈중 하나인 "모리 모토나리 맹세의 세 화살" 후반부에는 후반 주인공인 테루모토가 히데요시의 뒤를 쳐서 전사시킨뒤 세키가하라에서 이에야스까지 격파하고 사실상 모리 막부를 세우는 엔딩이 나오는데, 이런 만약의 가정에서 영향받은 건가 보네요
  • 3인칭관찰자 2016/01/17 17:59 #

    기실 테루모토는 자기가 가진 120만 석을 수성만 하려던 게 아니라, 세키가하라의 혼란을 이용해서 시코쿠와 큐슈로 침공하여 자기 세력을 넓히려 하는 데 열심이었죠. 어느 쪽이 중요한지를 몰랐다는 느낌이랄까요. 이에야스와 결전을 벌이는 데 전력을 쏟았다면 "서군이 승리한 날에는 모리 막부가 세워졌으리라" 는 말도 그저 농담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

    모리 가문이 천하를 잡을 기회가 있었다면 혼노사의 변 직후와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2가지 루트가 있겠네요. 근데 후자 쪽을 게임으로 만들면 그닥 재미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 시무언 2016/01/18 11:52 # 삭제

    그래서인지 맹세의 세 화살은 혼노사의 변 이후 시점으로 설정했더군요. 이후 오다 잔당을 이에야스가 규합하고 모리 가문과 싸우게 되는 곳이 하필 세키가하라(...)

  • 3인칭관찰자 2016/01/18 19:26 #

    모토나리전 끝까지 하지 않아서 최종전이 어디에서 벌어지는 진 몰랐는데.. 세키가하라였군요.
    최종보스가 이에야스란 이야기는 들어봐서, 처음엔 미카와나 토오토우미에서 싸우는 줄 알았습니다.

    세키가하라에서 총 한번 못 써본 가문이 같은 무대에서 설욕하는 셈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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