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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자들의 전국사》세키가하라 전투 (1) 역사


  
  본 글은 2007년, 일본 출판사 헤이본샤平凡社에서 신서본新書本으로 간행된 스즈키 마사야鈴木眞哉 씨의 저서《패배자들의 전국사負け組みの戦囯史제 3장 <승리자들 속에서 나온 패배자들> 중 4편인【 세키가하라의 결산関ヶ原の結算 】부분(p. 109 ~ 130)을 번역한 것입니다. 위 책은 현재에도 일본에서 판매되고 있는 책이며, 국내 인터넷 서점을 통해서도 구하실 수 있는 책이기 때문에 이 편 외에 다른 부분까지 번역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절대로 배포나 불법공유 목적으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여기서 명확히 하겠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란 무엇인가

  세키가하라 전투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케이죠 3년(1598) 8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으면서 이를 계기로 삼아 시작되었다. 히데요시의 후계자로는 친아들 히데요리秀顂가 있었으나, 세는 나이로 6살짜리 유아에 지나지 않았다. 당연히, 누군가가 천하의 일을 대신하여야만 한다.

  이러한 상황은 혼노사의 변 이후의 오다 가문과 상당히 닮은 점이 있다. 그 때는 히데요시가 획책하여, 유아였던 노부나가의 손자(훗날의 오다 히데노부秀信)가 가문의 당주家督로 앉았다. 그러나 이는 누가 보아도 괴뢰로, 그 실권은 히데요시가 거머쥐려 하고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자들과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로 발전했다는 건 앞에서 본 그대로이다.  

  히데요리는 히데노부와 같은 입장에 놓여 있었는데, 그 때의 히데요시와 겹쳐지는 것이 (토쿠가와徳川) 이에야스家康이다. 그렇다고 하지만 이에야스는 딱히 히데요리를 추대한 것도 아니며, 그 자신이 토요토미 가문에서 키워진 사람도 아니다. 흔히 행해지는 비유이지만, 대기업의 오너 사장이었던 자가 더욱 더 큰 회사에 흡수합병되어, 부사장으로 취임한 것과 비슷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주군의) 복수전을 벌인【 실적 】을 앞세웠듯이, 회사 내에서의【 실적 】을 배경삼아 회사를 가로채려 한 점은 공통되었다.

  히데요시 측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를 히데요리의 후견인으로 삼음으로써, 어떻게든 (정권을) 가로채이는 것을 방지하려고는 했다. 히데요시와 토시이에는 젊은 시절부터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시즈가타케 전투 때도 토시이에가【 배신 】하면서 승리할 수 있었던 면이 존재했다. 그런 의미에서는 천하통일天下取り의 맹우盟友이기도 했다. 토시이에가 계속 건재했더라면 토요토미 가문의 장래도 조금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지 모르나, 그는 히데요시가 죽은 후 반 년 정도 지나 세상을 떴다.

  기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같은 사람들도 토시이에가 살아있을 때는 그를 전면에 내세워 이에야스에게 대항해보려고 했었다. 미츠나리는【 세키가하라 】라는 일대 드라마에서 한 쪽의 주역을 맡고 있었기에, 당시에도 거대한 존재였던 것처럼 착각되기 십상이나, 중급中級 토요토미 다이묘(大名, 영주)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야스가 실력파 부사장이었다 한다면, 미츠나리는 본사의 기획부장 정도의 존재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토시이에를 받들어 싸워보려 했던 것인데, 이것이 불가능해지면서 막후에서의 연기에 전념하는 것도 힘들어졌다.

  이렇게 하여 이에야스 vs 미츠나리라는 대결도식이 만들어져 갔으나, 미츠나리는 여기서 이긴다고 해도, 곧바로 자신이 텐카비토(天下人, 역주 : 천하의 주인)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이 점은 본인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으리라. 그렇기에 이에야스 타도를 목적으로 거병하였을 때도, 명목상의 총수로는 흔히 말하는 다섯 다이로五大老 중 한 사람이자, 토시이에보다도 더욱 더 세력이 컸던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를 추대한 것이다.

  미츠나리로서는 일단 토요토미 정권을 다른 가문이 빼앗는 것을 방지한 후, 스스로가 축이 되어 재능으로 이를 처리해 나갈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오다 가문의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와 닮은 점이 있으나, 그 지위는 (미츠나리 쪽이) 상당히 낮았다. 토요토미의 가신인 미츠나리가 주군 가문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려 한 것은, 누군가의 신하된 자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이에야스의 손자인 미토 미츠쿠니水戸光圀도 그렇게 말한 바 있다.

  에도 시대의 어용학자들 사이에서는 "미츠나리는 모반인謀反人이다." 라는 주장이 나왔으나, 미츠나리가 거병할 때 토요토미 가문에서 말하는 다섯 다이로 가운데 이에야스 / 죽고 없는 토시이에를 제외한 3명이, 흔히 말하는 다섯 부교(五奉行, 행정관)들 중에서는 미츠나리 본인을 포함한 4명이 찬동한 바 있었다. 형식론에 기반하여 말하자면, 모반인이었던 건 이에야스 쪽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에야스가 도리에 어긋났다고도 할 수 없다. 원래부터 그는 히데요시에 의해 발탁된 사람이 아니었다. 역학관계상 히데요시에게 복속했던 데 불과했기에, 그 히데요시가 사라진 지금, 천하를 잡기 위해 달려든다고 해서 딱히 부당한 건 아니다.

  미츠나리를 놓고 "은혜를 잊은 놈忘恩の徒" 이라는 식으로 매도한 사람은 메이지 시대 이후에도 존재했다. 미츠나리가 카토 키요마사加藤清正들에게 목숨을 위협받았을 때 이에야스가 감싸주었다는 이유로 저런 주장을 한 것이나, 그 진위는 의심스럽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손 치더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이에야스의 타산에 기인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말할 것 같으면, 히데요시에게 멸망당하지 않은 이에야스도, 더욱 더 히데요시에게 감사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전적으로 히데요시의 타산에 기인하였다는 건, 앞에서 서술한 그대로이다.

  그렇기에, 이는 "이에야스와 미츠나리 중 어느 쪽이 옳았던가." 같은 이야기는 아니며, 어느 쪽이 이기든 간에 지금까지 승자로 존재했던 자들 가운데서 다시 "솎아내기" 를 강요하는 사건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시즈가타케 전투나 코마키小牧 전투와도 공통되는 점이 존재하나, 이번의 것은 규모가 달랐다. 그 당시 존재하였던 외부세력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일본 전체가 토요토미 정권 아래로 편입되어 있었다.

  오닌의 난応仁の乱도 일본을 양분한 전쟁이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동일본과 큐슈 대부분의 지역은 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란 그 자체도 애매한 결착을 내며 끝난 바 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의 경우 일본의 거의 모든 제후들이 말려 들어가, 정말로 중립을 유지한 가문은 손으로 꼽을 수 있을만큼 적었다. 전쟁 자체도 케이죠 5년(1600) 9월 15일의 단판 싸움에서 결판이 났는데, 이로 인해 "승리자勝ち組み" 와 "패배자負け組み" 의 구분이 확연히 드러났다.

  "어느 쪽이 이기더라도.." 라는 건 그러한 의미인데, 이 말에 이의를 달고 싶으신 분도 많이 계실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그런 결말을 맞은 것은, 애초부터 뻔한 것이었다" 는 식의 논리가 횡행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결과론의 극치라고 하겠다. 당시의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결과가 뻔히 보였다면, 모두가 이길 만한 쪽에 붙었을 것이다. 결전 따위 벌이지 않고도 승패는 결정이 났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불세출의 큰 인물이므로, 미츠나리 같은 자가 대적할 수 있을 리 없으니 이길 만 해서 이긴 것이다." 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분도 많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전쟁을 체크해보면, 어느 쪽이 이기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까지 전개가 이루어졌음이 명백하다. "소인배 미츠나리" 를 거기까지 갈 수 있게 만든, 이에야스의 "대물다움" 도 뻔한 것이 아니겠는가?

  결과를 알고서 말을 하는 것이라면 어떤 소리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어떠한 명론탁설(名論卓說, 역주 : 이름난 논리와 탁월한 학설)을 전개한다고 해도, 결국은 고작 "사후예언" 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자들은 만약 서군이 이겼더라도 "그들은 이길 만 해서 이겼다" 고 말하며, 그 까닭을 득의양양하게 해설하였을 것임이 틀림없다.

  세키가하라에서 "승리자""패배자" 가 명확해졌긴 하지만, 천하의 행방이 확정된 것은 겐나 원년(1615) 5월, 오사카大坂가 함락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에서의 "승리자" 가 오사카 측에 가담한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하며, "패배자" 들만이 오사카로 모여들었다. 만약 오사카 측이 승리를 거두었다면 "승리자""패배자" 간에 대역전이 일어났을 것이며, 그러할 가능성도 있었으나, 결국은 토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것 외에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그어진 라인을 재확인받는 선에서 끝이 났다.    


덧글

  • 키키 2016/01/19 22:49 # 답글

    좋은 글 번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결과론의 극치'라는 말, 백번 동감합니다. 지금에야 서군을 두고 엉성한 군 조직 체계, 이시다 미츠나리의 군재의 부족 등등의 무수한 실패원인을 늘어놓지만 실상, 병력 수는 서군이 더 많았고, 명분 또한 확실했지요.. 서군이 이겼더라면 '명분의 미츠나리, 군사軍事의 모리가 절묘한 연합으로 이루어져 승리를 거머쥐었다.'식의 결과론을 폈었겠지요..
  • 3인칭관찰자 2016/01/20 17:58 #

    맞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결과를 알기 때문에 '이에야스가 이기는 게 기정사실화되어 있던 것처럼' 생각하는 게 아닐까요. 당대 사람들은 결과가 어찌 될지 정확히 예측하기 훨씬 힘들었을 겁니다. 요즘 저희들이 역사지식으로 알고 있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무대 뒷사정조차도 그 때의 사람들은 몰랐을 테므로.... 뭐 그 당시를 산 사람과 그걸 몇 백년 뒤에 관조하는 사람의 시선이 똑같을 수가 없는 거죠.

    서군이 이겼다면 키키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서군에게 메리트가 되었을 사정만 집중적으로 부각되었으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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