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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쿠치 칸] 아네가와 강姉川 전투 (4) ┗ 日本合戰譚



  이 글은 패전 이전 일본의 유명 대중소설 작가로 출판사 분게이슌쥬文藝春秋의 창립자 겸 초대 사장이자, (고인이 된 친구들의 이름을 따) 아쿠타가와 상芥川賞 / 나오키 상直木賞이라는 일본의 저명한 문학상을 만들어내기도 한 키쿠치 칸菊池寬 씨의 저서《일본합전담日本合戦談》에 포함된【 아네가와 강 전투姉川合戦 】편을 번역한 글입니다.

  덧붙이자면, 이 글의 내용은 일본 전국시대를 둘러싼 지금의 통설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자인 키쿠치 씨가 별세하신 때로부터만 쳐도 이미 68년이 지났으니 말이죠. 특히 오다 노부나가의 3대 전투(오케하자마 / 아네가와 / 나가시노 전투)의 경우 최근의 학설에 의해 전투의 양상과 전개 자체에 대한 해석이 크게 뒤집어져서, 이《일본합전담日本合戦談》에 수록된 이야기는 상당히 낡은 감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리고 좋든 싫든 현대의 역사가들이 '1차 사료가 아니다' 는 이유로 가지쳐낸 내용이 여기에는 제법 섞여있기 때문에, 이 내용을 그대로 믿기보다는 흥미 위주로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아사쿠라 vs 토쿠가와 戰

  아네가와 강姉川은, 비와 호琵琶湖의 동북쪽 / 오우미 지방의 북쪽 경계선에 존재하는 카네쿠소 산金糞岳에서 출발한 아즈사가와 강梓川이, 이부키 산伊吹山 서쪽에 이르러 서쪽으로 굽어져 흘러나가는데, 이 근처를 일컬어 아네가와 강이라 부른다. 이 강물은 다시 또 서쪽으로 흘러가 나가하마長浜 북쪽에서 호수로 들어간다. 아네가와 강이라는 명칭은, 염라대왕閻魔大王의 누님으로 용왕竜王인 분이 이 강에서 살고 있었다고 하여 아네가와 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전설이 존재하나, 염라대왕의 누님들 중에 용왕이 있었다는 말은 그다지 들어본 적이 없으므로, 이는 토속적 전설에 불과할 것이다. 노무라野村 / 미타무라三田村 부근은 오른쪽 강변의 높이가 6 ~ 7척 이상이라 올라가고 내려가기가 불편했던 듯 하다. 그러나 당시의 수심은 3척 정도였다고 하니, 강물을 흐트러뜨리며 밀고 밀리는 싸움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6월 28일 오전 3시, 아자이 군浅井軍은 노무라에, 아사쿠라 군朝倉勢은 미타무라에 포진했다.

  동이 트기를 기다려 요코야마 성横山城을 포위하고 있는 오다 군織田軍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다織田) 노부나가信長는 27일 야밤에 적진에서 일렁이는 화톳불을 보고 적이 진격하는 낌새를 눈치채어, '그렇다면 이쪽에서 역습해 주지.' 라고 하면서 아네가와 강의 좌측 강변으로 진출하여, 아자이 / 아사쿠라 군이 배치된 것을 보고는 오다 / 토쿠가와 측에서 먼저 활과 조총을 쏘아대머 싸움을 걸었다. 이는 아자이 / 아사쿠라 군으로선 상당히 의외였을 것이다.

  미타무라의 아사쿠라 군에는 (토쿠가와徳川) 이에야스, 노무라에 있는 아자이 군에 대항하는 건 노부나가 군이었다.

  토쿠가와 / 아사쿠라 쪽이 먼저 전투를 시작했다. 이에야스는 오가사와라 나가타다小笠原長忠를 선봉으로 삼고, 우측에 사카이 타다츠구酒井忠次 /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康政 등을, 좌측에 혼다 헤이하치로 타다카츠本多平八郎忠勝 / 나이토 노부시게内藤信重 / 오쿠보 타다요大久保忠世 등을 두고, 자신은 친위대旗本를 이끌고 정면에 포진했다.

  혼다 타다카츠 /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모두 23세 나이였기에, 혈기가 왕성하였다.

  아사쿠라 군은 쿠로사카 빗츄노카미黒坂備中守 / 코바야시 즈이슈켄小林瑞周軒 / 우오즈미 사에몬노죠魚住左衛門尉를 선봉으로 삼아 치고 들어왔다. 토쿠가와 이에야스로서도 영예로운 전투였기에 전군이 죽음을 무릎쓰고 싸웠으며, 아사쿠라 군도 마찬가지로 분전했다. 아사쿠라 군이 좌측 강변으로 몰려들면 이에야스 군이 이를 우측 강변으로 밀어내고, 토쿠가와 군이 우측 언덕으로 밀어닥치면 아사쿠라 군이 이를 좌측 강변으로 밀어붙였다.

  그러던 가운데 토쿠가와 군이 약간 후퇴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사쿠라 군은 좋아, 이 전투에는 이겼다! 고 하며 아네가와 강을 건너 좌측 강변으로 쇄도했는데, 토쿠가와 군은 이들을 끌어들여 좌우에서 이들을 요격했다. 사카이 타다츠구 /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등은 아네가와 강의 상류를 건너 아사쿠라 군의 측면에서 옆구리를 찔러, 앞뒤 돌아보지 않고 맹렬히 공격했기에 아사쿠라 군은 이윽고 혼란에 빠졌다. 토쿠가와 군은 이 기세를 타고 추격하였기에, 아사쿠라 군은 낭패하여 강을 건너 퇴각을 시도했고, 대장인 마고사부로 카게타케孫三郎景健조차 난군 속에서 뒤쳐져 버렸다. 이 때, 아사쿠라 가문에서 유일한 호걸이라 알려진 마가라 쥬로자에몬 나오타카真柄十郎左衛門直隆가 돌아와서는 분전했다. 쥬로자에몬은 이번의 전투에서 '카게타케를 후견하라' 고 요시카게로부터 특별히 부탁받아 출진한 남자였다. 그는 강담講釈 세계에서도 유명한 남자로, 홋코쿠 지방에선 비할 자 없는無双 괴력을 가진 자였다. 그가 사용하던 타치太刀는 유명한 타로타치太郎太刀였다.

  에치젠越前 지방의 치요즈루千代鶴라는 대장장이가 만들어 낸 7척 8촌의 타치였다고 한다. 강담에 따르면 "대단히 폭이 넓어서, 전방을 보는 데 방해되지 않도록 칼에다 창窓을 달아두었다" 고 했다.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중량을 줄이기 위해 여기저기 창을 만들어 놓았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일설에 따르면 5척 3촌이라고 하니, 이 쪽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마가라의 영지 내에서 이 타치를 들 수 있었던 농민은 고작 1명. 언제나 부하들 4명이 이 칼을 들고 옮겼다고 하니만큼, 7척 8촌이었다는 쪽이 진실인지도 모른다.

  이에 맞선 지로타치次郎太刀라는 칼도 있었다. 그 쪽은 6척 5촌(일설에 따르면 4척 3촌)이었다고 한다.

  나오타카는 카게타케가 고전하는 걸 보고서, 타로타치를 "나기나타薙刀를 다루듯" 휘두르며, 양손을 자유롭게 놀리며 적을 베어 쓰러뜨리고 또 베어 쓰러뜨리면서 돌아보지 않고서 달려가며, 맞서는 자들의 투구 전면 / 갑옷 소매를 박살이 날 정도로 베고 다녔기에 그 토쿠가와 군도 나오타카 한 사람에게 저지당하여, 나오타카가 향하는 곳에는 주변 4 ~ 50간이 갈아엎은 논밭처럼 황량해졌다. 그렇게 하여 마고사부로 카게타케의 위급함을 구한 후, 드디어 오른쪽 강변으로 퇴각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많은 아군이 왼쪽 강변에 남겨져 고전하고 있는 걸 보고, '그렇다면 도와줘야겠다' 고 하며 다시 돌아왔다.

  이 때 아사쿠라 측의 대장, 쿠로사카 빗츄노카미 / 마에바 신파치로前波新八郎, 여전히 좌측 강변에 남겨져 분전하고 있었다. 앞에서 서술한 대로 오가사와라 요하치로 나가타다小笠原与八郎長忠는 타지에서 벌이는 싸움에 함께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뭇 사람들의 눈을 놀라게 할 정도로 분전하면서, 쿠로사카 빗츄노카미에게 달려들었다. 두 사람 모두 십자창을 들고 있었으나, 오가사와라의 십자창이 더욱 길었기에 쿠로사카가 십자창에 (옷이) 걸려 위태한 지경에 빠지자,【 오가사와라, 창을 버리고 타치를 빼들어서는 빗츄노카미의 투구 정면을 내리쳤다. 쿠로사카는 어지러워하면서도 간신히 말 안장에 매달려있었으나, 오가사와라의 두 번째 칼날이 그가 탄 말의 아래쪽을 베어 (쿠로사카를) 쓰러뜨렸다. 】쿠로사카가 칼을 맞자 아사쿠라 군은 혼란에 빠져, 전군이 위태한 지경에 빠져 있었을 때, 마가라 쥬로자에몬과 그 장남 쥬로사부로 나오모토十郎三郎直基가 달려와 아버지는 타로타치 / 아들은 지로타치를 들고 종횡무진 적을 베었기에 토쿠가와 군도 좌우로 허물어져, 에치젠 군은 드디어 위기를 모면하여 아네가와 강을 건너 퇴각했다.

  마가라 부자가 후미부대殿를 맡아 물러나려고 하던 그 때, 토쿠가와 군 중에서 사키사카 시키부匂坂式部 / 사키사카 고로지로匂坂五郎次郎 / 사키사카 로쿠로고로匂坂六郎五郎 / 그 부하인 야마다 소로쿠山田宗六 주종 4명이 마가라에게 달려들었다. 마가라는 "대군 가운데 고작 4명이서 내게 달려들다니, 가상하구나." 라며 되돌아왔다. 시키부가 단창手鑓으로 마가라의 쿠사즈리 끄트머리를 노려 한 창을 내질렀으나, 마가라는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이 커다란 타치를 들어 맞아치고, 다시 역습을 가하여 사키사카 투구의 후키카에시吹返し를 쳐 박살내고, 다음의 일격으로 창을 쳐서 떨어뜨리게 했다. 시키부의 동생 고로지로, 형을 보호하기 위해 맞서자, 마가라는 엄청난 괴력을 휘둘러 (고로지로의) 타치의 하바키를 두 동강낸 후, 오른쪽 허벅지를 베었다. 고로가 타치의 손잡이만을 움켜쥐고 위태한 상황에 몰려있던 것을, 그 동생 로쿠로와 소로쿠가 틈을 주지 않고 구원하러 왔다.

  마가라는 타치를 고쳐 잡고, 소로쿠를 머리에서부터 세로로 곧게 쪼개어 버렸으나, 그 때 로쿠로가 겸창鎌槍을 휘둘러 마가라를 쳐 넘어뜨렸다. 아무리 괴력무쌍의 마가라라도, 이 때는 60세가 다 되어가는 늙은 무사였던 데다, 아침부터의 활약으로 피곤해져 있었던 탓도 있으리라. 다시 일어난 마가라는 태연히 "이제 여기까지다. 마가라의 목을 베어 무사의 영예로 삼아라." 고 말하였다.

  로쿠로는 형 시키부에게 목을 베라고 권했으나, 시키부는 "부상을 입어 힘들다. 네가 베어라." 고 말하였기에 로쿠로가 달려가서 (마가라의) 목을 잘랐다.《타이코키太閤記》에서는【 사키사카 형제들이 마가라 한 사람에게 당하고 있던 것을, 혼다 헤이하치로 타다카츠가 말을 몰고 달려들어, 한 장이나 되는 철봉을 휘두르며 마가라와 30여 합의 결전을 벌여, 홋고쿠 제일로 불리는 용사와 동일본에 비할 바 없다는 장사들끼리 맞붙었는데, 마가라가 노쇠했기에 결국 타다카츠에게 당하고 말았다, 】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용사 마가라의 최후를 치장하기 위해 "혼다 타다카츠에게 당했다." 고 한 것이리라. 마가라와 타다카츠가 30여 합을 겨루었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의 1대 1 대결一騎討로는 이를 능가할 메인 이벤트도 없을 것이나, 사실은 역시 사키사카 형제들에게 당했을 것이리라.

  그 아들 쥬로 나오모토(十郎直基, 타카모토隆基라 적은 책도 있다)는 아버지가 당했다는 말을 듣고, "적어도 아버지께서 전사하신 모습이라도 봐야겠다." 고 하며 말머리를 돌리려던 차에, 아오키 쇼자에몬青木所左衛門가 치고 나와 "소문의 마가라 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돌아와서引返し 승부를 겨룹시다!" 라고 소리를 치자, "물러난다引く니 무슨 말인가. 미운 놈들이 말하는 단어가 아닌가. 본때를 보여주지." 라 하면서, "아버지보다 못한 타치이긴 하지만, 맛보도록 해라!" 고 하면서 6척 5촌의 지로타치를 휘둘러, 막아서는 아오키의 부하들을 좌우로 베어넘겼다. 쇼자에몬은 겸창을 휘둘러, 나오모토의 오른손 팔꿈치를 잘라버렸다. 나오모토도 "이제 여기까지구나." 하면서, 얌전히 목을 내밀었다.

  에치젠 군 1만여 기 가운데, 마가라 부자의 용감한 싸움과 그 초연한 최후는 훗날에 이르기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타이코키太閤記》에 따르면, 나오모토는 전사하기 전에 아버지의 시신과 아버지가 사용하던 타치를 부하에게 떠맡기며, 고향으로 가지고 가도록 했다고 한다. 전쟁중에 이러한 여유는 없었으리라 생각되지만, 그래도 옛날의 전쟁은 뭔가 느긋한 면이 있었으므로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은 없었으리라.

《산슈시三州志》에 따르면, 카가加賀 지방의 하쿠 산 신사白山神社에【 마가라의 타치 】라며 전해 내려오는 것이 있는데, 손잡이가 3척 + 도신이 6척 = 도합 9척에 두께가 6분 / 폭이 1촌 6분으로, 카마쿠라의 유키미츠行光가 만들었다고 한다. 유키미츠는 마사무네正宗의 아버지이다. 반면 에치젠의 케비 신사気比神社에는 마가라의 칼집만 남아 있다. 이 칼집에는 팥 석 되를 담을 수 있다 하며, 이 칼집의 길이와 하쿠 산 신사의 길이는 약간 차이가 난다고 한다.

  아네가와 강 연안은 무논이 많아 인마가 활동하기 어려웠으며, 거기에다 에치젠 군(越前勢, 아사쿠라 군)은 이 곳의 지형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에, 무논과 소택지에 인마가 빠져 그대로 죽음을 당하는 자가 많았다. 마가라 부자를 위시하여, 마에바 형제 / 코바야시 즈이슈켄 / 류몬지竜門寺 / 쿠로사카 빗츄노카미 등 대장급 다수가 전사하였다. 이에 비하면 지형을 알고 있는 아자이 군은 전사자가 적었다.

  이렇게 써 보니 토쿠가와 군은 그다지 고심을 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에치젠 군은 배반부대裏切り組라는 것을 만들어 백 명 정도의 장사壮士를 선발, 각자에게 길쭉하게 만들어진 4척 5촌짜리 노타치野太刀를 들려 보내, 전투가 한창일 때 수풀로부터 뛰쳐나와 불의에 이에야스 친위대를 향해 달려들게 했다. 이 떄문에 친위대는 크게 무너지다가, 시미즈 큐사부로清水久三郎가 이에야스의 말 앞에 버티고 서서 5~6명을 베어 쓰러뜨리자 드디어 안정을 찾았다.

  이것은 훗날의 이야기지만, 토쿠가와 요리노부(徳川頼宣, 역주 : 이에야스의 10남, 키이 지방의 영주)가 언젠가 이야기를 하며,【 카토 키스케 마사츠구加藤喜介正次가 언제나 칼刀이나 와키자시脇ざし의 손잡이에 손을 얹고 다닌다, 고 하자 모두가 웃었는데, 카토 키스케는 "아네가와 강 전투 당시, 아사쿠라가 2기의 병사를 아군으로 변장시켜 이에야스 공의 근처로 다가가 칼을 빼어 베려고 했다. 키스케는 언제나 칼에 손을 대고 있기에 즉각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베고, 또 한 사람은 아마노 사부로베에天野三郎兵衛가 숨통을 끊을 수 있었다. 이 때 이에야스 공도 타치를 한 자 정도 빼셨는데, 그 타치에 피가 묻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평생에 걸쳐 칼 손잡이에 손을 얹고 있는 것이다." 고 말했다고 하나, 키스케보다도 이 아사쿠라의 용사들이 더욱 용감하였다. 적 한복판에 고작 두 사람이서 치고 들어가 전사한 것이다. 거기에다 두 사람은 목에 "일족무간一足無間" 이라고 적은 서약서를 걸고 있었다고 한다. 이것 참, 단단히 결심한 호걸이 아닌가. 】라고 칭찬했다고 하니, 이 일화를 보아도 아사쿠라 측이 제법 활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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