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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쿠치 칸] 카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合戦 (3) ┗ 日本合戰譚




  이 글은 패전 이전 일본의 유명 대중소설 작가로 출판사 분게이슌쥬文藝春秋의 창립자 겸 초대 사장이자, (고인이 된 친구들의 이름을 따) 아쿠타가와 상芥川賞 / 나오키 상直木賞이라는 일본의 저명한 문학상을 만들어내기도 한 키쿠치 칸菊池寬 씨의 저서《일본합전담日本合戦談》에 포함된【 카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合戦 】편을 번역한 글입니다.




  야마모토(山本, 칸스케勘助) 등이 세운 작전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 2만 병력 중 1만 2천 명으로 하여금, 사이죠 마을西条村의 오쿠모리 평지奥森の平를 넘어서 쿠라시나 마을倉科村로 향하여 사이죠 산妻女山으로 쳐들어가, 내일 아침 묘시(卯の刻, 새벽 5 ~ 7시)에 전투를 시작한다. 켄신謙信은 이기든 지든 반드시 강을 건너 카와나카지마로 나올 것이다. 그 때 신겐信玄이 친위대 8천 명을 이끌고 귀로에 포진하여, 앞뒤에서 공격한다면 아군이 승리하리란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는 것이었다.

  신겐은 코사카 탄죠(高坂弾正, 마사노부昌信 내지는 토라츠나虎綱) / 오부 효부(飯富兵部, 토라마사虎昌) / 바바 민부(馬場民部, 노부후사信房) / 사나다 유키타카真田幸隆 등에게 1만 2천 병사를 인솔시켜 사이죠 산의 배후로 돌아가 (켄신을) 습격하게 하고, 켄신이 둥지에서 튀어나오면 이를 공격하기로 했다. 옛 사람들은 이를【 딱따구리啄木鳥 전법 】이라고 불렀다. 그 말은 딱따구리가 나무 속에 있는 벌레를 잡을 때, 구멍이 있는 쪽의 반대편을 콕콕 쪼아 벌레를 깜짝 놀라게 하여, 구멍을 통해 뛰쳐나오는 것을 잡아먹는 데서 유래되었다. 거기에 중양절이라는 명절을 이용하여, 적이 방심할 거라는 예상에 편승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딱따구리에게 구멍 속을 쪼였다고 해서, 순순히 기어나올 켄신이 아니었다.

  8월 16일 이래, 켄신은 오로지 산 속을 유유히 산책하며 옛 시를 읊고 비파를 타고, 스스로 소고를 치면서 측근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는 등 여유만만했다. 나오에 야마토노카미(直江大和守, 카게츠나景綱 내지는 사네츠나実綱)들은 이를 불안하게 생각하여 "적은 카와나카지마에 진을 치고 아군이 군량을 운반하는 길을 끊고 있기에, 우리 군의 양식은 앞으로 10일 후에 끊어집니다. 신속히 카스가 산성 잔류부대에게 구원을 명하여 코슈 군甲軍의 배후를 찌르는 게 어떻습니까." 하고 진언했으나, 켄신은 "10일 양식이 있다면 충분하다." 고 말하며 이를 듣지 않았다. 그러자 야마토노카미는 "혹시 하루노부(晴信, 신겐)가 카이즈 성의 병사들로 하여금 우리들을 견제하게 하고, 그 자신이 직접 에치고로 쳐들어가면 손쓸 수 없게 됩니다." 고 말하였는데, 켄신은 웃으며 "카스가 산은 엄중히 지켜지고 있으니 불안함은 없다. 만약 하루노부가 에치고로 들어간다면, 우리들 역시 코후甲府를 취하면 된다." 고 말하며 이야기를 마쳤다.

  9월 9일, 켄신은 중양 명절을 축하한 후, 저녁 무렵 평소와 같이 옛 시를 읊으면서 고지를 유유히 걷다가 저 멀리 있는 카이즈 성을 지켜보니 밥을 짓는 연기가 평소와 달리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켄신은 곧바로 코슈 군이 출동할 것임을 예감했다.【 닌자 병사(슷파 간첩) 】들이 가지고 온 정보에서도【 코슈 군이 부대를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사이죠 산의 배후로 돌아가고 / 다른 부대는 카와나카지마에서 (켄신 군을) 요격할 계획 】이라는 것을 알고서, '내가 선수를 쳐서 기습을 시도하겠다.' 고 결심했다. 켄신의 득의양양함을 추측할 수 있다. 이를 위해 24일 간을 참아온 것이다. 구멍 속에 있던 벌레는 딱따구리가 쪼아대기를 기다리지 않고서 스스로 뛰쳐나와 신겐을 습격하려 한 것이다. 이 때 에치고 군越軍의 군대구분은 아래와 같으며, 이윽고 행군을 개시했다. 그 때가 오후 6시였다.      

선봉

카키자키 야마토노카미(柿崎大和守, 역주 : 이즈미노카미和泉守의 오타. 카게이에景家)


중군(친위대)

이로베 슈리노신(色部修理進, 카츠나가勝長)
타케노마타 미카와노카미(竹俣三河守, 요시츠나慶綱)
무라카미 요시하루(村上義晴, 역주 : 요시키요義清의 오타로 추정됨)
시마즈 노리히사島津規久


우군右備

시바타 오와리노카미(新発田尾張守, 나가아츠長敦)
야마요시 마고지로(山吉孫次郎, 토요모리豊守)
카지 히코지로(加地彦次郎, 히데츠나秀綱)


좌군左備

혼죠 에치젠노카미(本庄越前守, 시게나가繁長)
아스다 지부쇼유(安田治部少輔, 나가히데長秀)
나가오 토오토우미노카미(長尾遠江守, 후지카게藤景)


후군後備

나카죠 에치젠노카미(中条越前守, 후지스케藤資)
코시 스루가노카미(古志駿河守, 카게노부景信)


후미부대後押

아마카스 오미노카미(甘粕近江守, 카게모치景持)


코니다(小荷駄, 보급부대)

나오에 야마토노카미(直江大和守, 카게츠나景綱 내지는 사네츠나実綱)   


 
  그리고 일반 병졸들에게는

【 1. 내일인 (9월) 10일 귀진한다는 뜻이 내려지셨다. 단 해가 짧기에 야심한 시각에도 행군해야 될지 모른다.
    2. 정숙하게 행군하며, 도중 적병이 길을 막아서면 격파하고 젠코사善光寺로 향하라는 것을 명심하라. 】고 전달되었다.

  9월의 달이 서산으로 기울자(오후 11시 경?) 우에스기 군은 조용히 행동을 시작했다. 병사들은 입을 다물고, 말들의 혀를 묶어 울지 못하게 했다. 전군이 조용히 사이죠 산을 내려와 마치 큰 뱀이 산을 나서는 것처럼 이누가 여울狗ヶ瀨를 건넜다. 때는 이미 오밤중으로 쥐죽은 듯이 조용한 가운데 들리는 건 오직 쿠사즈리(草摺, 갑옷 아래로 늘어뜨려 허벅지를 보호하는 도구)가 내는 작은 소리뿐이었다. 오로지 아마카스 오미노카미만이 사이죠 산의 북쪽에 있는 아카사카 산赤坂山에서 멈추어, 후미부대로서 적을 경계하면서 쥬니가 여울十二ヶ瀬을 건너 오모리小森 부근에서 대기했다. 한편 사이죠 산에는 진중의 화톳불들을 평소처럼 계속 피워놓고, 종이로 만들어진 가짜 깃발도 밤하늘 속에 무수히 휘날리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10일 새벽 2시 30분 경, 에치고 군은 사이가와 강犀川 남쪽에서 동쪽을 향하여 포진하여, 강용무쌍剛勇無比한 카키자키 이즈미노카미를 선봉으로 삼은 대장 켄신은 히노마루 깃발을 진두에 세운 후 제 2진으로 대기하며, 결전의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다. 단 코니다(보급부대)를 인솔한 나오에 야마토노카미는 홋코쿠 가도를 북진하여, 코이치 나루터小市の渡에서 사이가와 강을 건너 젠코사로 퇴각하였다. 아마카스 부대는 먼 남쪽의 오모리에서 대기하여 사이죠 산에서 달려올 적에 맞서 대비케 했다. 이 때 카와나카지마는 그 전날 이슬비가 내렸던 탓인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가 끼어있었다.

《카와나카지마고토캇센키川中島五度合戦記》에【 에치고 진채에서 풀 베는 자 2 ~ 30여 명이 새벽부터 나와서 돌아다녔다. 】고 되어있는 것은, 텐분 23년(1554)에 있었던 일이라 나와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으로 아마 이 때의 일일 것이다. 에치고 군에서 농부로 변장한 척후가 나와서는 카와나카지마를 오른쪽으로 갔다 왼쪽으로 갔다 조용히 정찰하였던 것이리라. 켄신은 척후를 풀어 적 친위대의 행동을 탐지하게 하고, 코슈 군이 히로세 여울広瀬을 건너간 것을 알고는, 기습으로 적을 분쇄하여 친위대를 포위한 후 신겐의 목을 베리라 생각하고, 미즈사와水沢 방면을 향해 조용히 전진하였다. 싸우기도 전에 켄신은 십이분十二分의 승리를 거두고 있었던 것이다.  

  사이죠 산으로 향한 코슈 군은 지리에 밝은 코사카 탄죠의 선도 하에, 달이 서산으로 기울 무렵에는 카이즈를 출발하여 쿠라시나 산을 넘어 사이죠 산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이 행군은 산간지방의 좁은 길을 걸어야했던 데다가 가을의 풀들이 길을 뒤덮고 있어서 진군하는 데 난항을 겪었다. 거기에다 1만 2천 명의 대군이다 보니 새벽이 되기 전에 사이죠 산에 도착했어야 했던 것이 대폭으로 늦어졌다.

  한편 신겐의 친위대는 강용剛勇한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昌景가 선봉에 서서, 10일 인시(寅の刻, 새벽 4시)에 카이즈 성을 나와 히로세 여울을 통해 치쿠마 강千曲川을 건너 야마가타는 신메이神明 부근에서 서쪽으로 면하여 포진하고, 왼쪽의 미즈사와에는 타케다 노부시게(武田信繁, 역주 : 신겐의 동생) / 그 왼쪽에는 아나야마 이즈(穴山伊豆, 노부키미信君)가 진을 쳤으며, 오른쪽으로는 모로즈미 분고兩角豊後 / 나이토 슈리(内藤修理, 마사토요昌豊 내지는 마사히데昌秀)가 타나카田中 부근에 진을 쳤다. 신겐은 하치만 신사 동쪽 부근에, 다른 부대들은 신겐의 전후좌우에 진을 쳤다. 그 위치는 지금의 미타치나나타치三太刀七太刀라고 불리는 곳이라고 한다. 신겐의 옆에는 스와 신의 깃발諏訪神号旗과 손자孫子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때마침 낀 짙은 안개(카와나카지마의 명물) 때문에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코슈 군은 에치고 군이 카와나카지마에 도착하는 건 진시(辰の刻, 오전 8시)라 예상했기에 엄중한 대형을 짜놓고 있지 않았던 듯하다. 단지 신겐은 자리에 앉은 채로 사이죠 산을 바라보며 무언가 변화가 생기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우에스기 군이 반리 전방에 배치되어 있으리라고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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