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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쿠치 칸] 카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合戦 (2) ┗ 日本合戰譚



  이 글은 패전 이전 일본의 유명 대중소설 작가로 출판사 분게이슌쥬文藝春秋의 창립자 겸 초대 사장이자, (고인이 된 친구들의 이름을 따) 아쿠타가와 상芥川賞 / 나오키 상直木賞이라는 일본의 저명한 문학상을 만들어내기도 한 키쿠치 칸菊池寬 씨의 저서《일본합전담日本合戦談》에 포함된【 카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合戦 】편을 번역한 글입니다.





  원래, 시나노 지방에는 다섯 호족이 할거하고 있었다. 다음과 같다.

  (1) 히라가 겐신(平賀源心, 사쿠 군佐久郡. 히라가 성平賀城)
  (2) 스와 요리시게(諏訪頼茂, 스와 군諏訪郡, 우에하라 성上原城)
  (3) 오가사와라 나가토키(小笠原長時, 치쿠마筑摩 / 아즈미 군安曇郡, 후카시 성深志城 = 현 마츠모토松本)
  (4) 키소 요시야스(木曾義康, 키소다니木曾谷, 후쿠시마 성福島城=현 후쿠시마)
  (5)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清, 치이사카타小県 / 하니시나更科 / 미노치水內 / 타카노이高井 여러 군, 쿠즈오 성(葛尾城, 현재는 카츠라오 성이라 읽음))

  신겐은 텐분 9년(1540)부터 텐분 17년(1548)에 이르기까지 이들 호족들을 순차적으로 공격하여 이들을 멸망시켜 갔고, 그 중에서 가장 강대한 무라카미 요시키요를 몰아내, 결국 요시키요는 켄신에게 그 곤궁한 사정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카와나카지마 전투는 무라카미 요시키요를 구원하기 위한 의로운 싸움義戦이라 불린다. 그러나 시나노 북부 지역까지 타케다의 마수가 뻗어온 이상은 에치고도 절대 안전한 곳이 아니다. 시나노에서 카스가 산성까지는 고작 백여 리에 지나지 않는다. 상습적으로 타케다의 위협을 받게 되면 켄신은 입경하려는 뜻도. 칸토 경영의 웅지도 펼칠 수 없게 된다. 지금 시나노 북부의 호족들이 애원하며 달려온 것은 다시 없는 기회였다. 의로운 싸움임을 내걸고 타케다를 응징할 때가 찾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카와나카지마로 출진할 때, 에치고越後 지방 이와후네岩船의 이로베 카츠나가色部勝長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생략) 눈 내리는 와중에 대단히 수고하시는 것은 알지만, 밤을 낮처럼 생각하여 신속히 착진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슈(信州, 시나노)의 아군이 멸망하게 되면, 우리 지역의 방비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라고 적고 있다. 의로운 싸움임과 동시에, 자위전自衛戦이기도 했다.      

  신겐도 마찬가지로 입경에 뜻을 두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후방의 근심을 끊기 위해서라도 켄신에게 큰 타격을 즐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호죠 우지야스北条氏康 /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과 통혼하여 남쪽의 근심을 끊고서, 오직 북방 경영에만 힘을 쏟으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켄신이 멀리 출진하여 오다와라小田原를 포위했을 때, 신겐은 시나노로 출병해 책동을 걸고 있었다.

  켄신은 에이로쿠 4년(1561) 봄에 오다와라를 포위하던 도중, 신겐이 움직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에야말로 신겐과 결판을 내기 위해서" 에치고로 달려 돌아왔다. 2년간의 칸토 체진으로 병마가 피로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즉각 출진명령을 내려, 매형姉夫 나가오 마사카게長尾政景에게 1만 병력을 주어 카스가 산성을 지키게 한 후, 자신은 1만 3천 명의 병력을 인솔하여 한 부대는 홋코쿠 가도北囯街道에서 오오타기리大田切 -> 오다기리小田切의 험준한 지형을 넘어 젠코사善光寺로 나왔고, 다른 부대는 지름길인 쿠라토미 고개倉富峠를 통해 이이야마飯山로 빠져나왔다.

【 (신겐의) 이번 신슈에서의 책동은 이전보다도 더욱 심한 것으로, 유한遺恨은 더욱 깊어졌기에 이 한 싸움에 국가의 안위를 걸 것이다. 】고 하였으니, 켄신의 굳은 각오를 엿볼 수 있다. 

  시기는 그야말로 한가을, 행군하기에 좋은 시기이다. 이이야마로 나온 켄신은 젠코사에도 머무르지 않고, 대담무쌍하게도 적의 견고한 성인 카이즈 성海津城의 후방을 빙글 돌아서는, 카이즈 성에서 18정町 떨어진 사이죠 산(妻女山, 西条山이라고도 함)으로 향했다. 홋코쿠 가도에 있던 1군도 젠코사 근처에 있는 아사히야마 산성旭山城에 한 부대를 남긴 후, 젠코사에서 카와나카지마를 남진하여 카이즈 성의 전방을 유유히 지나쳐 사이죠 산에 도착했다.    

  코슈甲의 명장 코사카 탄죠 마사노부高坂弾正昌信가 지키는 견고한 성의 앞뒤를 거리낌없이 통과하고, 적지 깊숙히 침입하여 사이죠 산을 점거한 것이다. 너무나 대담무쌍한 행동에 적도 아군도 놀랐다. 그러나 사이죠 산이라는, 카이즈 성의 방어 정면을 교묘히 피하고 그 측면과 배후를 위협할 수 있는 바람직한 위치를 잡은 건, 전술상 지형판단의 묘미를 통달했기 때문인 듯하다. 평범한 무장凡將이었다면 치쿠마 강千曲川 좌측 강변에 진을 치고서 카이즈 성을 공격했음이 틀림없다.

《에치고군키越後軍記》에는【 신겐이 사이죠 산으로 공격해 올 때는, 그의 진형도 평소의 수비력을 잃을 것이다. 그 때 단판 승부를 벌여 결판을 내고자 한다】고 적혀 있다.

  8월 16일 사이죠 산에 도착한 켄신은, 평소 존경하고 신앙하던 비사문천琵沙門天의 비琵 자를 그린 깃발과, 용竜 글자를 그린 깃발을 가을바람에 휘날리게 하며, 카이즈의 코사카 마사노부를 위압하였다. 竜자를 그린 깃발은 돌격을 알릴 때 사용되어,【 용솟음치는 용의 깃발 】이라 불렸다.

  카이즈 성의 코사카 마사노부는 봉화를 울려 그 화급함을 코후甲府에 전달했고, 그와는 별도로 사신을 말에 태워 보내어 계속 말을 갈아타게 하면서 급보를 알렸다. 그리고 자신은 성의 해자를 더욱 깊이 파고, 사수할 결심을 굳혔다.

  이미 이렇게 되리라 내심 기다리고 있던 신겐은, 그 보고를 듣고서 시나노 남부의 제장들에게 군세를 출병시킬 것을 독촉하면서 18일에 코후를 출발, 22일에는 우에다上田에 도착했다. 그 용병술은 그야말로【 움직일 때는 바람과 같다疾如風 】였다.
 
  그리고 우에다에서 군사회의를 연 후, 카와나카지마로 진격했는데 이쪽도 켄신에게 뒤지지 않는 대담함을 보이며, 켄신이 진을 친 사이죠 산의 서쪽을 그대로 통과하여, (사이죠) 산 서북부에 위치한 챠우스 산茶臼山에 진을 쳤다.

  켄신이 카이즈 성을 본체만체하며 일부러 적중 깊이 들어오자, 신겐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본체만체하며 적의 퇴로를 끊어버린 것이다. 실로 통쾌하기 짝이 없는 두 무장의 응수였다.

  이렇게 켄신은 스스로 원하여 주머니 속에 빠진 쥐가 되어버렸다. 신겐은 크게 기뻐하며, 척후를 보내 사이죠 산의 진영을 염탐하게 했지만, 켄신은 소고를 치면서 요코쿠謡曲인《야시마八島》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는 신겐의 예상과는 달랐기에 다시 여러 방향으로 척후를 보낸 결과, 아사히야마 산성에 켄신이 숨겨둔 복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챠우스 산의 진채를 걷은 후 카이즈 성으로 입성했다. 자기 쪽이 사이죠 산과 아사히야마 산성에 있는 적군에게 협공당할 것을 걱정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신겐은 카이즈 성에서, 켄신은 사이죠 산에서 서로 대치하기를 십여 일, 어느새 9월 9일 중양절 명절이 되었다. 켄신은 유유자적하며, 본거지로 돌아갈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카이즈 성에서 직접 공세에 나서는 것은 불리하다. 명절 축하를 끝내고 신겐은 제장들을 모아 군사회의를 열었다.

  숙장宿將 오부 효부(飯富兵部, 토라마사虎昌)는 "몇 년 전 이래 한 번도 치열한 전투를 벌인 적이 없습니다. 이번엔 반드시 일전을 벌여야 합니다." 고 주장했다. 신겐도 공격에 나서기로 결심하고 야마모토 칸스케山本勘助 / 바바 민부(馬場民部, 노부후사信房, 훗날의 미노노카미 노부하루美濃守信春)에게 명령하여 공격계획을 세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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