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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쿠치 칸] 카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合戦 (1) ┗ 日本合戰譚



  이 글은 패전 이전 일본의 유명 대중소설 작가로 출판사 분게이슌쥬文藝春秋의 창립자 겸 초대 사장이자, (고인이 된 친구들의 이름을 따) 아쿠타가와 상芥川賞 / 나오키 상直木賞이라는 일본의 저명한 문학상을 만들어내기도 한 키쿠치 칸菊池寬 씨의 저서《일본합전담日本合戦談》에 포함된【 카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合戦 】편을 번역한 글입니다.




  카와나카지마에서 벌어진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 VS 타케다 신겐武田信玄의 1:1 대결은 모두가 다 알고 있겠지만, 그 전투의 양태에 대해 아는 사람은 대단히 적다. 비파를 곁들여 부르는 노래琵琶歌에서【 텐분 23년(1554) 한가을 무렵이라 들었다 】고 노래하고 있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코(甲, 타케다) / 에츠(越, 우에스기) 두 무장의 관계가 끊기게 된 것은 텐분 22년(1553)으로, 교전상태에 돌입한 후 26년간 (대립이) 이어졌는데, 그 중 주된 전투는 코지 원년(1555) 7월 19일 사이가와 강가犀川江畔에서 벌어진 전투와, 에이로쿠 4년(1561) 9월 10일에 벌어진 카와나카지마 전투 2개뿐이다. 다른 것들은 그닥 언급할 필요가 없다. 뒤의 9월 10일 전투야말로 코에츠 전기의 클라이막스로, 켄신은 아즈키 나가미츠小豆長光의 명검을 휘둘러 신겐을 칼로 아홉 번 내리쳤다고 전해진다.

  타케다 신겐도 우에스기 켄신도, 그 군대의 편제로 보나, 통솔력으로 보나, 집단전법으로 보나, 용병술로 보나, 센고쿠 시대의 (다른) 군웅들을 아득히 능가하였기에 그야말로 우리 나라(역주 : 일본이겠죠) 전술의 시조開祖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두 사람이 카와나카지마에서 용호상박의 대격전을 벌였으니, 센고쿠 시대에 벌어진 크고 작은 무수한 전투들 가운데서도 그 에센스(精華, 정수) 라고 하겠다.

  타케다 가문은 미나모토노 요시이에源義家의 동생 신라사부로 요시미츠新羅三郞義光의 후손으로, 제 16대 당주 (타케다) 노부토라信虎의 아들이 바로 신겐이었다. 어릴 적의 이름은 카츠치요勝千代, 텐분 5년(1536) 16세의 나이로 쇼군將軍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義晴로부터 이름 한 글자를 하사받아 하루노부晴信라고 불렸다. 그 해 아버지 노부토라는 신슈(信州, 시나노 지방信濃囯) 사쿠佐久의 운노구치 성에 있던 히라가 겐신平賀源心을 공격하였으나 우려빼지 못하여 포위를 풀고 돌아가던 도중, 신겐이 고작 3백 기를 인솔하여 되돌아 가서는, 한숨 돌리고 있던 적의 방심에 편승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성장城將 겐신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아버지 노부토라는 조금도 이를 칭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무렵부터 부자지간은 불화하여, 신겐은 이후 텐분 10년(1541) 매부인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영지인 스루가駿河로 아버지를 강제은퇴시킨 후, 카이 지방(역주 : 지금의 야마나시 현山梨県)의 영주가 되었다. 이 때의 나이가 21세.

  젊은 시절, 문학청년으로 시문만을 열심히 짓던 적이 있었기에, 이타가키 노부카타板垣信形에게서 간언을 들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무장들 가운데서도 가장 교양이 있었으며, 그가 지은 시로는


처마 밖의 풍광 너무도 새로워
簷外風光分外薪

발을 걷고서 산색을 어떻게 노래할까 고민했다네
捲簾山色悩吟身

험준한 산세에 미인의 눈썹같은 신록이 트니
孱願亦有娥眉趣
 
희미하게 비치는 저 모습은 미인의 미소가 아닐런지
一笑靄然如美人


노래로는

【 장맛비가 정원에 내려서는 여울을 이루어 모초가 휩쓸리는구나
옆에 세워둔 보람 없구나 벛꽃에 소나무 천고의 색을 붙여놓았건만. 】

  시가 잘 된 것인지 본인은 잘 모르겠으나, 노래 쪽은 무장치고는 최상급으로 분류될 것이다.


  그리고 경서經書와 병법서兵書를 두루 읽었으며,《손자孫子》를 애독하여 그 군기軍旗에다《손자》군쟁편軍争篇의 묘어妙語인


움직일 때는 바람과 같고疾如風
고요해야 할 때는 숲과 같고徐如林
침략할 때는 불과 같고侵略如火
움직이지 않을 때는 산과 같다不動如山

  
  는 구절을 2행에 걸쳐서 쓰게 하여, 카와나카지마 전역 이후 대장기로 삼아 본영에 걸게 하였다. 그 외에도 스와묘진諏訪明神을 신앙하여【 스와 난구 상하 다이묘진諏訪南宮上下大明神 】라고 한 행에 커다랗게 쓴 깃발도 사용하였다. 

  우에스기 켄신은 본래 나가오 씨長尾氏로 헤이지(平氏, 다이라平 씨족 출신) 계였다. 원래 (그 조상이) 소슈(相州, 사가미 지방. 역주 : 지금의 카나가와 현神奈川県) 나가오 장원長尾莊에 기거하였기에 나가오 씨라고 칭하게 되었다. 그 선조는 칸토 지방에서 우에스기 씨上杉氏를 추종하여 에치고(越後, 역주 : 지금의 니이가타 현新潟県)로 따라와 그 중신重臣이 되었고, 우에스기 씨가 쇠퇴함과 동시에 득세하여 켄신의 아버지, 타메카게爲景 대에 이르러 지역을 장악했다. 타메카게가 죽고 (켄신의) 형 하루카게晴景가 뒤를 이었으나, 병약하여 지역 내의 군웅들조차 힘으로 복속시킬 수 없었기에 그 동생 켄신이 고작 14세의 나이로 전진戰陳에 나서 19세의 나이에 나가오 가문을 상속받고, 카스가 산성春日山城에 기거하며 지역을 진정시켜, 위명을 떨쳤다. 

  그러나 켄신이 우에스기 씨가 된 것은 에치고 우에스기 가문의 뒤를 이은 것은 아니며, 칸토 칸레이関東管領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山の內上杉家을 물려받은 것이었다. 즉 32세가 된 해에 야마노우치 노리마사山の內憲政의 요청을 받아, 칸토 칸레이 지위를 양도받고 우에스기 씨를 칭한 것이었다.

  그 책임상, 에이로쿠 3년(1560) 병사들을 이끌고 칸토 평야로 진군하여 칸토의 여러 영주들을 위압하여 복속시킨 후, 에이로쿠 4년(1561)에는 호죠 우지야스의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을 포위하여, 성의 해자가 있는 하스이케蓮池 근처까지 와서는 말에서 내린 후, 성 병사들이 조총으로 저격을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유낙낙 지휘용 의자에 앉아 차를 석 잔이나 마셨다.

  켄신도 문무를 겸비한 대장이었다는 점에서는 신겐에게 뒤지지 않았고, 문예취미가 두터워 시문으로는 널리 알려진


서리는 군영에 차고, 가을 기운 청량하다.
霜満軍営秋気清

기러기는 줄을 지어 날아가고 달은 오밤중에 걸렸다.
数行過雁月三更

에치고를 넘어 노토의 풍경까지 눈 앞.
越山併得能州景

고향의 가족은 원정간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遮莫家郷憶遠征


라는 시가 있으며, 노래 쪽으로는


【 갑옷소매를 베고 누운 무사의 머리맡을 울리는 기러기 소리 】

같은 것들이 있다. 현대의 정치가 / 실업가들의 노래보다는 훨씬 잘 된 것이다. 

  그리고 병학에도 정통했으며, 신을 경배하는 사람이었고, 창술槍은 당대 제일로 명창 카스카春日를 자유자재로 다루었으며, 검술에도 능하여 비젠 오사후네 / 아즈키 나가미츠 2척 4촌 5분의 대도大刀를 휘둘렀다고 하니, 그야말로 무장다운 무장이었다.

  신겐이 중후하고 정예하였다면 켄신은 첨예하고 과감한 불뚱이였다.

  오타 카즈마사(太田資正, 역주 : 현재는 이름을 스케마사라고 읽음)가 켄신을 평하길, "켄신 공의 됨됨이를 본 바로 말하자면 열에 여덟은 대현인, 나머지 둘은 대악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노기에 휩쓸려 행하는 일들은 대다수 도리에 어긋난 일이 되는데, 이것이 악한 점이다. 용맹하며 욕심 없고 청정하며 도량이 넓고, 결벽하며 숨기는 일이 없으며, 명민하고 통찰력이 뛰어난 데다 자애롭게 아랫사람들을 훈육하는 한편으로 즐거이 충성스런 간언을 받아들이는 점들이 그 장점이다" 고 했다.

  켄신을 카와나카지마의 1:1 대결 등의 일화 같은 것에서 연상해보면 위장부의 체구를 가지지 않았을까 생각하겠지만,【 테루토라輝虎, 체구가 작고 왼쪽 다리에 기종이 있다. 절름발이다. 】고 하니, 작은 체구로 살짝 다리를 절었다고 한다면 그 열렬한 기백이 작은 신체에 용솟음쳐 사람들을 위압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에이로쿠 4년(1561) 카와나카지마 전투 당시, 켄신은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이름 한 글자를 물려받아 (우에스기) 마사토라政虎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 다음 해에는 쇼군 (아시카가足利) 요시테루義輝로부터 한 글자를 물려받아 다시 테루토라로 개명하였다. 불문에 들어가 켄신謙信이라 불린 건, 보다 이전의 이야기(역주 : 현재의 통설로는 이후의 이야기)이다.   

  켄신이 이전에 말하길 "신겐은 언제나 그 이후의 승리까지 염두에 두어, 7리를 나아갈 수 있는 것을 5리만 나아가 6할의 승리를 거두는 것을 최상으로 생각하며, 7~8할의 승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반면 나는 그 이후의 승리를 염두에 두지 않고, 그저 지휘弓矢하는 자의 도리에 따라 싸울 뿐이다." 고 한 바 있다. 이를 따르면 이 두 무장이 군대를 지휘하던 양상을 알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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