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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합전대전》오케하자마 전투 정면공격설 (下) 역사



  이 글은 (舊)《歷史群像シリーズ 50 戰國合戰大全 上》P.192 ~ 195에 수록된, 오다 노부나가의 "기습전" 으로 널리 알려진 오케하자마 전투가 실제로는 "노부나가는 정면돌격을 감행하여 승리하였다." 는 것이라고 주장하시는 역사가 후지모토 마사유키藤本正行 씨의 주장이 정리요약된 글로, 본 글이 쓰여져 책에 처음 수록되었을 때에는 꼭 그렇지는 않았지만, 21세기로 들어선 이후 일본에선 사실상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학설입니다. 지난번 (아오조라 문고를 통해) 키쿠치 칸菊池寬 씨가 (패전 이전에) 집필한 것을 번역한 오케하자마 전투의 양상과는 상당히 차이가 날 내용이 되겠습니다.


  전군前軍을 격파한 후, 친위대旗本를 향해 돌격

  센죠지 성채善照寺砦에서 아군의 패전을 목격한 (오다織田) 노부나가信長는, 성채를 나와 진격을 개시했다. 종래의 학설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요시모토義元를 기습하여 쓰러뜨리기 위해 센죠지 성채에서 동쪽으로 진군, 산 속을 크게 우회하여 요시모토의 본진 배후에 도달하였다고 하나, 비합리적인 이야기이다. 이미 전장의 과반을 이마가와 군에게 점령당한 노부나가가, 요시모토가 있는 곳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곤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 정확한 정보를 얻었다손 치더라도, 이것이 정말로 정확한 정보인가를 시급히 판단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허위정보虛報에 놀아날 위험은 항상 따라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오다 군의 야나다 데와노카미梁田出羽守가 "요시모토는 오케하자마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다." 는 정보를 가지고 왔기에, 노부나가가 이를 기습하기 위해 우회로를 통해 진격했다는 말이 있으며, 이로 인해 야나다는 전투의 최대 공로자로 은상恩賞을 받았다고 이야기되고 있기까지 하다. 이러한 점에서 이 전투를【 정보전의 승리 】로 간주하는 연구자도 많으나, 이 이야기를 뒷받침할 사료는 전혀 없으며, 상식적으로도 믿기가 힘들다.

  만약 요시모토가 본진을 친 소재지가 밝혀졌다고 해도, 오다 군이 그 곳으로 향하는 도중에 적에게 발견되지 않았으리란 보장은 없으며, 한 번 발견되기라도 한다면 기습은 불가능해진다. 만에 하나 기적적으로 적에게 발각되지 않는다 해도, 목적지에 도달하는 동안에 요시모토가 본진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는다는 보장도 마찬가지로 없다. 그리고 한 번 본진을 먼 곳으로 옮기게 되면, 노부나가는 놓쳐버린 적을 찾아 전장을 우왕좌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가령 노부나가가 처음부터 요시모토 한 사람을 노리고 있었고, 그리고 요시모토의 본진이 위치한 소재지를 확인했다면, 우회로 따위를 취하지 않고, 최단코스를 통해 전력을 다하여 급행했을 것이다. 실제로 노부나가가 있던 센죠지 성채에서 요시모토가 있는 오케하자마 산桶狹間山까지는, 나카지마 성채中嶋砦를 경유할 경우 직선코스로 갈 수가 있었으며, 그 거리도 3k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요시모토 한 사람을 노리려 한다면, 이 최단코스를 취하지 않고 우회로를 선택하여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여기서《신쵸코우키信長公記》를 보자.

【 소부대가 격파당하는 것을 지켜본 노부나가는, 나카지마 성채로 옮겨가려고 했다. 가로家老들은 논 한가운데의 좁은 길로 가면, 아군의 병사가 적다는 것이 적 측에 들통나게 된다며 말렸으나, 이를 뿌리치고 나카지마 성채로 옮겨갔다. 이 때의 병력은 2천 명이 채 되지 않았다. 】

  노부나가는 센죠지 성채에서 북방으로 우회한 것이 아니라, 남쪽에 위치한 나카지마 성채로 옮겨갔다. 나카지마 성채는 가장 저지대에 위치하여, 그 남쪽에 있는 마루네丸根 / 와시즈鷲津 성채가 있는 구릉과, 동쪽에 있는 구릉은 이미 이마가와 군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다. 따라서, 노부나가의 이동이 이마가와 군에 포착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이를 알고서도 나카지마 성채로 옮겨간 이상, 노부나가에게는 은밀한 행동을 취해 요시모토를 기습할 의도가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 노부나가는 나카지마 성채에서 다시 또 진격했다. 사람들은 더욱 더 열심히 만류했으나, 노부나가는 "저 적은 한밤중에 군량을 가지고 야간행군을 하여 오타카 성에 군량을 보급했고, 와시즈 / 마루네 성채에서 전투를 벌여 극도로 피곤해져 있다. 반면 우리 쪽은 손실이 없는 군대이다. 적이 공세로 나선다면 물러서고, 적이 물러난다면 추격하라. 반드시 적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고 훈시했다. 】

  이 노부나가의 훈시가 중요하다. 낮은 지대의, 그리고 개방되어 있는 장소에 있던 그가 "저 적..." 이라고 가리킬 수 있었을 정도이니, 이마가와 군 쪽은 오다 군의 움직임이 더욱 더 잘 보였을 것으로,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말리려 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훈시의 내용은 유연한 것으로, "적의 친위대를 노려라" 라든가 "요시모토 한 사람을 쓰러트려라" 라는 턱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저 적은 야간행군을 하여 오타카 성에 군량을 보급했고, 와시즈 / 마루네에서의 전투로 피로해져 있다." 는 건, 노부나가의 오해이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오타카 성에 군량을 반입하고 두 성채를 공략한 (토쿠가와徳川) 이에야스家康는 오타카 성에서 휴식 중이었고, 노부나가의 정면에 있던 것은 이마가와 군의 전군前軍이었다. 그리고 오다 군은, 노부나가의 오해를 진실로 받아들여 분전하게 되었다.  
  
【 노부나가는 산기슭까지 군대를 진군시켰다. 갑자기 큰 비大雨가 (동쪽을 향하여) 내렸다. 날이 개이는 것을 보고 노부나가는 공격을 명령했다. 오다 군의 기세를 본 이마가와 군은 단번에 무너져, 투구와 갑옷까지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요시모토가 타고 다니던 옻칠한 가마조차 버려졌다. 이에 이르러 노부나가는 "친위대는 저기 있다. 저기를 공격하라!" 고 명령했다. 히츠지노코쿠(未剋, 오후 2시 무렵)에 이르러 동쪽 방향을 공격했다. 요시모토는 무리들에 둘러싸여 퇴각했으나, 끊임없는 방어전을 벌이는 동안에 그 병력이 줄어들었고, 결국은 목이 달아났다. 】

  오다 군은 이마가와 군을 정면에서 공격한 것이다. 이마가와 군은 간단히 무너져버리긴 했으나, 딱히 기습을 가한 것이었다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 후에 노부나가는 비로소 "친위대는 저기 있다." 고 지시하였다. 이것은, 요시모토의 친위대가 조직적인 퇴각전을 벌이고 있었으며, 최초에 공격을 받아 무너져버린 것은 친위대가 아니었다는(즉 전군前軍이었다)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오쿠보 히코자에몬 타다노리大久保彦左衛門忠敎의 저서《미카와모노가타리三河物語》의 오케하자마 전투에 대한 기술도, 오다 군이 높은 곳으로 올라와 공격하였으며, 최초에 벌어진 전투가 요시모토 친위대와의 싸움이 아니었다는 것 등이《신쵸코우키》의 기사와 분명 일치한다. 오쿠보 일족은 토쿠가와 군으로 참전하고 있었으며, 적 / 아군의 기사가 기본적으로 일치한다는 점은 무시할 수가 없다.

  이상의 이야기를 정리한다면, 전투의 경과는 다음과 같다. 그날 낮, 늦게나마 노부나가가 센죠지 성채로 진출했을 무렵에는, 그 남동쪽에 있는 구릉(나카지마 성채에서 동방에 위치한)에 이마가와 군의 일부(전군)가 진출하여, 센죠지 / 나카지마 성채를 제압하기위해, 북서쪽을 향하여 포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배후(동쪽)에 있는 오케하자마 산에는 요시모토의 친위대가 포진하고 있었다. 오다 군의 소부대가 이마가와의 전군에 공격을 가했다가 격파당했다. 이를 본 노부나가는 나카지마 성채로 옮겨가, 이곳에서 동진하여 전군前軍에 정면공격을 시도했다. 전군은 간단히 무너져, 이 혼란이 후방에 있던 요시모토 친위대를 직격했다. 요시모토는 퇴각을 시작했으나, 이를 간파한 노부나가는 이 곳에서 처음으로 요시모토를 타겟으로 삼아, 비로소 쓰러트릴 수 있었다.

  노부나가가 승리한 원인은, 적이 피로해져 있다고 오해한 점 / 주력을 온존시켜 놓았던 점 / 노부나가의 진두지휘하에 굳게 결속되어 있었다는 점 / 기동력이 뛰어났다는 점 / 나카지마 성채라는 거점이 있었다는 점 / 병력을 배치하기 용이한 평지에서 적이 세로로 늘어선 산골짜기 개구부로 진격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요시모토가 패배한 원인은, 나루미 성의 확보라는 최초의 목표가 주력결전을 벌이는 것으로 변경되였던 점 / 임기응변의 행동을 취하기가 어려운 전군이 오다 군 주력의 집중공격을 받았던 점 / 전군의 혼란이 요시모토 친위대에 파급되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오후 2시에 전투가 개시되었던 점(원래는 새벽녘에 전투가 일어난다)과, 소수의 병력이 낮은 장소에서 공격해 올라왔던 것 등도 예상 외였으리라.

  노부나가는 최초엔 요시모토 본인이 아닌, 전선의 성채를 공격하여 피로해진 적들 중 적당한 부대를 온존해 놓은 자군의 주력으로 격파하려고 했다. 이는 요시모토 본인에 비한다면야 가치가 낮은 목표이긴 하나, 포착하여 격파할 수 있을 확률은 비약적으로 높으며,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전과라면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이와 같이 불필요하고 턱없이 높은 목표를 잡지 않았다는 점이, 대승리로 이어졌던 것이다.

  참고로 오케하자마 전투를 우회 / 기습전으로 보는 설은, 에도 초기의 작가 오제 호안小瀨甫庵이 그의 저서《신쵸키信長記》에서 창작한 것이다. 이 책이 출판물로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기 때문에, 이에 따라 기습설도 널리 퍼졌다. 이 설은《소켄키総見記》,《카이세이미카와고후도키改正三河後風土記》를 비롯한 에도 중 / 후기의 군담물에서 윤색ㆍ증보되었고, 내용은 더욱 더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메이지 이후의 작가들이나 역사가들의 억측과 해석이 이에 섞여들어간 결과, 오케하자마의 우회ㆍ기습설이 성립되었고, 정설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 상세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졸저《노부나가의 전국군사학》(헤이세이 4년=1992년, 타카라지마샤宝島社 출간)를 참조하시길 바란다.   
   

 

덧글

  • 맹한 범고래 2015/11/23 17:34 # 답글

    군사/역사 정보글 벙커 밀게넷 한번 놀러오세여
    검색창에 밀게넷 치면 나와여.
  • 키키 2016/01/19 21:39 # 답글

    20대 중반의 혈기에 넘친 '멍청이' 오다 노부나가가 부채춤을 한판 거하게 추고 '야 인생 뭐 있냐 한번 개돌가자'식의 전법... 이겼기에 망정이지, 졌으면 희대의 또라이로 각종 군기에 기록되었을겁니다. 시바타 가츠이에나 여러 제장들이 말리지않고 묵묵히 따랐던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들도 가망성이 있다고 생각한건지.. 아니면 이 젊은 또라이 다이묘의 묘한 카리스마라도 있던건지..
  • 3인칭관찰자 2016/01/20 17:45 #

    뭐 아버지의 유산을 이어받고 오와리 주요 지역을 거의 장악하기에 이르는 약 10년 간의 노정을 헤쳐나왔으니, 나름대로 역량과 카리스마가 붙긴 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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