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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합전대전》오케하자마 전투 정면공격설 (上) 역사



  이 글은 (舊)《歷史群像シリーズ 50 戰國合戰大全 上》P.192 ~ 195에 수록된, 오다 노부나가의 "기습전" 으로 널리 알려진 오케하자마 전투가 실제로는 "노부나가는 정면돌격을 감행하여 승리하였다." 는 것이라고 하는 역사가 후지모토 마사유키藤本正行 씨의 주장이 정리요약된 글로, 본 글이 쓰여져 책에 처음 수록되었을 때에는 꼭 그렇지는 않았지만, 21세기로 들어선 이후 일본에선 사실상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학설입니다. 지난번 (아오조라 문고를 통해) 키쿠치 칸菊池寬 씨가 (패전 이전에) 집필한 것을 번역한 오케하자마 전투의 양상과는 상당히 차이가 날 내용이 되겠습니다.


  에이로쿠 3년(1560) 5월, 스루가駿河의 영주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는 스루가 / 토오토우미遠江 / 미카와三河의 대군을 인솔하여, 오와리尾張 / 미카와 지방의 접경지대로 진출했다. 오와리 키요스 성주淸洲城主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이를 요격하여, 오케하자마(桶狹間, 현 아이치 현愛知縣 토요아케 시豊明市) 부근에서 벌인 전투에서 요시모토를 쓰러뜨렸다. 이를 오케하자마 전투桶狹間の戰い라고 한다.

  이 전투는 오래도록 "열세에 놓인 노부나가는 대역전을 위해 요시모토를 쓰러뜨리겠다 생각했다. 그리하여 적은 병력을 이끌고 샛길로 우회, 요시모토의 본진을 기습하여 그를 쓰러뜨린 것" 이라고 여겨져, 기습전의 전형典型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이 우회기습설을 뒷받침할 사료는 전혀 없으며, 전장의 지형과도 부합하지 않아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점이 많았다. 그렇기에 본인은 쇼와 57년(1982)에, 노부나가의 가신 오타 규이치(太田牛一, 전투 당시 34세)의 저서로, 오케하자마 전투의 전투기록으로서 가장 많이 참고하기 마련인《신쵸코우키信長公記》를 주된 근거로 삼아【 노부나가는 정면공격을 가하여 승리했다 】고 발표했다. 많은 사람들의 상식을 뒤엎은 이 견해는, 단순히 기이한 설奇說로 사장되지 않은 채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에도 일반적으로는, 옛부터 계속 이어진 우회기습설 쪽이 더욱 널리 알려져 있을 거라 생각되며, 군사사 연구자들 가운데도 기습설에 고집하는 분이 많은 걸로 안다.

  그렇기에《신쵸코우키》를 요약하면서, 지금 한 번 오케하자마 전투의 경위를 검증해보려고 한다. 


  노부나가의 행동은 감시받고 있었다

《신쵸코우키》는, 요시모토가 출동하게 되기까지의 경과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 (오와리 / 미카와 지방 접경 근처에 위치한) 오다 측의 거점, 나루미 성鳴海城의 야마구치 사마노스케山口左馬助가 이마가와 쪽으로 배반하여, 부근의 오타카大高 / 쿠츠카케沓懸 두 성까지 조략(調略, 정치공작)을 통해 탈취했다. 요시모토는 이 3개 성에 많은 수비병을 투입시켰다. 이에 맞서, 노부나가는 나루미 성 부근에 츠케지로(付城, 적 측의 성 근처에 공략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짓는 성)로 탄게丹下 / 센죠지善照寺 / 나카지마中嶋 / 마루네丸根 / 와시즈鷲津의 다섯 성채를 쌓았다. 】

  요약하자면, 이마가와 군이 나루미 성을 탈취 -> 노부나가가 츠케지로를 쌓아 나루미 성을 봉쇄 -> 구원(고즈메後詰라고 부른다)을 위해 요시모토가 출동, 이란 수순에 의해 오케하자마 전투가 일어났을 뿐으로, 흔해빠진 군웅들 사이의 영역다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요시모토의 당면한 목표는 나루미 성을 확보하는 것이었으나, 그 과정에서 유리한 조건으로 노부나가를 포착할 수가 있다면, 노부나가와 결전을 벌일 생각이었으리라. 단, 원정이 장기화되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크고, 무리한 공격을 벌이는 데는 커다란 희생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한편, 그와 접경을 맞대는 영주로 타케다 신겐武田信玄 / 호죠 우지야스北条氏康가 있었던 데다. 영지 내, 특히 미카와 지방의 정정이 불안정했기에, 희생을 돌아보지 않고 결전을 벌일 수는 없었다.

  역으로 노부나가의 입장에선, 요시모토의 이 약점을 이용하여 전황을 교착상태로 끌고 가 요시모토에게 부담을 지우는 동시에, 적당한 전과를 거둘 수만 있다면, 위기는 자연히 피할 수 있게 된다. 오래도록 열세에 있었던 노부나가는, 최초부터 일발대역전을 노리고 요시모토 본인을 쓰러뜨리려고 했다고 알려져 왔으나, 현실주의자였던 그가 이런 공상적인 것을 생각할 리 없으며, 또 그럴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전투 직전의 상황에 대해《신쵸코우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 요시모토는 5월 17일 쿠츠카케에 도착하여, 18일날 밤에는 오타카 성에 군량을 보급했다. 18일 저녁, 와시즈 / 마루네 성채에서 내일 아침에 (적의) 공격이 개시된다는 연락이 들어왔으나, 키요스 성에 있던 노부나가는 군사회의도 열지 않고, 가로家老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19일 새벽, 와시즈 / 마루네 성채에서 전투가 개시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노부나가는《아츠모리敦盛》춤을 춘 후 출진했다. 타츠노코쿠(辰剋, 오전 8시 경)에 아츠다熱田에 도착하여, 동쪽에서 피어나는 연기를 보고 와시즈 / 마루네가 함락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때는 기마무사 6기 / 잡병 2백 명 정도가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아츠다에서 탄게 성채를 거쳐 센죠지 성채로 급행, 여기서 부대를 집결시키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

  오다 측의 최대거점인 센죠지 성채는, 이마가와 측의 나루미 성과 언덕으로 이어진 곳에 위치했다. 양자의 간격은 수백 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센죠지 성채에서는 나카지마 성채를 조망할 수 있으며, 그 남쪽에 있는 와시즈 / 마루네 성채가 지어진 구릉도 확인할 수 있다.(와시즈 / 마루네 성채 자체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마가와 측은 와시즈 / 마루네 성채를 함락시킨 시점에서 곧바로 센죠지 성채를 감시하에 둘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노부나가는 와시즈 / 마루네 성채가 함락된 것을 진군 중에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센죠지 성채에 들어갔다. 이것은 그가 이 행동을 은폐할 의사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는 노부나가가 최초부터 기습을 가해 요시모토의 목을 벨 작정으로 그 행동을 은폐했다고 여겨져왔으나, 현지에서는 노부나가가 군대를 이끌고서 몸을 숨길 장소 따위 어디에도 없었다. 섣불리 몸을 숨기고자 하여 소극적인 행동으로 종시終始한다면, 이길 수 있는 기회도 떠나가기 마련이다. 실제로는, 노부나가는 전장에 도착한 후, 상시적으로 이마가와 군이 목격할 수 있는 정도에서 행동을 하였다.

【 요시모토는 오케하자마 산에서 군대를 쉬게 했다. 우시노코쿠(牛剋, 정오)에는 술해(戌亥, 북서쪽) 방면을 향해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마루네 / 와시즈를 공략한 데 만족하며, 노래謠를 세 번 불렀다고 한다. 이마가와 편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선봉이 되어 오타카 성에 군량을 보급하고, 마루네 / 와시즈 성채를 공략한 후, 오타카 성에 입성해 휴식을 취했다. 】

  요시모토는 오케하자마에서 휴식을 취했다. 요시모토가 방심하여 깊은 골짜기의 저지대에 진을 친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으나, 이 부근의 실제 지형은 낮은 구릉지대로 골짜기도 그다지 깊은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여기에 "오케하자마 산桶狹間山" 이라고 적혀 있으니, 요시모토가 있던 곳은 저지대라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오케하자마 산에서 북서쪽으로 고작 2km 떨어진 곳에 오다 측의 나카지마 성채가 존재한다. 오케하자마 산과 나카지마 성채는 얕은 골짜기를 따라서 직선으로 이어져있었다.

  요시모토가 이 위험한 지형을 무시했을 리는 없다. 그 자신은 친위대旗本와 함께 후방에 있었으나, 그 전방에 한 부대(가칭으로 전군前軍으로 부르겠다)를 진출하게 하여 나카지마 / 센죠지 두 성채를 견제하게 했을 터로, 실제로도《신쵸코우키》에【 북서쪽을 향하여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고 적혀 있다. 이렇게, 센죠지 성채의 노부나가와 오케하자마 산의 요시모토는 바로 정면에서 대결하게 되었다.

【 노부나가가 센죠지에 도착한 것을 확인한 오다 군의 소부대가 공격에 나섰다가 격파되었다. 이를 지켜본 요시모토는, "요시모토의 창 끝에는 천마귀신도 버텨낼 수 없지." 라고 기뻐하며, (다시) 노래를 불렀다. 】

  이 소부대의 행동에 대해선, 노부나가가 기습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명령한 양동작전(陽動作戰, 적의 주의를 끌어, 본래의 목적을 감추기 위해서 사용한다. 명백한 작전행동)이라는 설도 있으나, 단순한 돌출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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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8비트소년 2015/11/21 21:57 # 삭제 답글

    오 저희 집에 있는 문건이네요
  • 3인칭관찰자 2015/11/21 23:08 #

    8비트소년님도 갖고 계셨군요. 역사군상 시리즈 중에선 손으로 꼽을만한 명저가 아닐까, 합니다.

    (출간된 지 많은 시간이 흘렀기에 지금에는 폐기된 이론도 전국합전대전에선 몇 개 보이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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