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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쿠치 칸] 오케하자마 전투桶狹間合戦 (完) ┗ 日本合戰譚



  이 글은 패전 이전 일본의 유명 대중소설 작가로 출판사 분게이슌쥬文藝春秋의 창립자 겸 초대 사장이자, (고인이 된 친구들의 이름을 따) 아쿠타가와 상芥川賞 / 나오키 상直木賞이라는 일본의 저명한 문학상을 만들어내기도 한 키쿠치 칸菊池寬 씨의 저서《일본합전담日本合戦談》에 포함된【 오케하자마 전투桶狹間合戦 】편을 번역한 글입니다.

  덧붙이자면, 이 글의 내용은 일본 전국시대를 둘러싼 지금의 통설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자인 키쿠치 씨가 별세하신 때로부터만 쳐도 이미 67년이 지났으니 말이죠. 특히 오다 노부나가의 3대 전투(오케하자마 / 아네가와 / 나가시노 전투)의 경우 최근의 학설에 의해 전투의 양상과 전개 자체에 대한 해석이 크게 뒤집어져서, 이《일본합전담日本合戦談》에 수록된 이야기는 상당히 낡은 감을 감출 수 없습니다.(지금 통설로 자리잡은 오케하자마 전투의 내용에 대해서는 제가 언젠가 정리해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좋든 싫든 현대의 역사가들이 '1차 사료가 아니다' 는 이유로 가지쳐낸 내용이 여기에는 제법 섞여있기 때문에, 이 내용을 그대로 믿기보다는 흥미 위주로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결말, 그리고 남겨진 이야기

  이 전투에서 패군敗軍에 속하였음에도, 오히려 신기하게 운이 트인 자가 마츠다이라 모토야스松平元康, 훗날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이다. 모토야스는 5월 19일 아침에 마루네丸根를 함락시킨 후 오타카 성大高城에 주둔했으나, 해질 무렵 요시모토義元가 패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여러 무사들은 퇴군退軍을 권했으나 모토야스는 "만일 요시모토가 살아 있다면 그와 마주할 체면이 사라진다." 고 말하며 듣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삼촌인 미즈노 노부모토水野信元가 아사이 미치타다浅井道忠를 보내어 패배의 소식을 전해주었기에 모토야스는 부하를 시켜 이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 19일 오후 11시가 지나 달이 뜨기를 기다려 미치타다의 안내 하에 미카와三河로 퇴군하였는데, 도중에 도적떼를 만나 고생하기도 하면서 오카자키岡崎에 도착했다. 이곳에 도착하여 보니 오카자키 성에 있던 이마가와 군今川勢은 황망히 성을 버리고 퇴각하였기에, 모토야스도 "버린 성이라면 들어가도 괜찮겠지." 라고 말하며 이곳에서 지내게 되었다. 훗날 에이로쿠 5년(1562) 5월, 미즈노 노부모토의 중재하에 키요스 성清須城에서 (오다織田) 노부나가信長와 만나 연합을 약속하고, 어릴 적부터 은인자중한 보람이 있었던지 차츰차츰 세력을 불려갈 기반을 얻었다.

  모토야스는 요시모토에 대한 의義를 생각하여 그 아들인 우지자네氏真에게 (아버지의) 복수전弔合戰을 권유하였으나 받아들여질 낌새도 없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노부나가에 의해 일패도지一敗地했지만 3개 지방을 다스릴 만큼 어느 정도 통령이 될 재능을 갖춘 무장이었으나, 그 아들인 우지자네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암우(暗愚, 역주 : 사리분간을 못 하는 어리석은 사람) 했다고 할 수 있다. 요시모토가 학문과 예술文事을 사랑했다는 일화 중 하나로, 어느 전투에서 한 무사를 시켜 척후로 보냈더니 얼마 안 가 그 무사가 적의 수급을 하나 들고 돌아왔다. 요시모토는 그를 칭찬하지 않고 오히려 척후 역할을 태만히 했다고 하여 군법으로 처단하려 했다가, 그 무사가 고개를 숙이며 이에타카家隆가 지은 노래인 

솔새의 몸에 스미게 할 빛깔은 없지만
苅萱に身にしむ色はなけれども

보고 버리기 아까운 이슬 맞은 가지
見て捨て難き露の下折

  를 읊는 것을 듣고, 곧바로 얼굴빛이 밝아졌다고 한다. 지방의 대호족이었으므로 쿄토의 귀족들이 찾아오는 경우가 자주 있었던 듯 하여, 요시모토의 풍채도 자연스레 고상해지고 / 머리가락도 소우하츠(総髪, 역주 : 머리카락을 모두 빗어넘겨 뒤통수에서 묶은 형태)식으로 묶고 / 이도 검은 색으로 물들였다고 한다. 그런 반면, 이 전역 당시 쿠츠카게沓掛에서 낙마했다는 일화를 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어찌됐든 문무양도에 고루 마음을 쓰던 요시모토였으나, 우지자네로 내려오면 그 아버지의 나쁜 점밖에 물려받지 못했다.

  요시모토가 죽은 후에도 아사히나 효부다유朝比奈兵衛大夫를 비롯한 훌륭한 가로家老들이 4~5명 남아 있었으나, 우지자네는 그들을 조금도 존중하지 않고 미우라 우에몬 요시모토三浦右衛門義元라는 유약한 무사만을 중용하며, 춤과 술판으로 소일했다. 본인(키쿠치 칸)이 옛날 집필했던 소설로《미우라 우메몬의 죽음》이라는 작품이 있으나, 그와 같은 소년은 아니었던 듯 싶다. 자기 마음에 드는 자에게는 그 자신의 첩을 하사하고, 손톱을 붉게 물들이고서는, 타인의 딸의 아름다움에 취해 노래를 선물하는 등 무사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완전히 망각한 듯한 소행을 벌였다. 그 미우라 같은 경우도, 오케하자마의 용사였던 고故 이이 나오모리井伊直盛의 영지를 탐내고, 더 나아가서는 요시모토의 애첩이었던 키쿠즈루菊鶴라는 여성을 남몰래 아내로 삼으면서 국정에 임했다고 하니, 이마가와 가문 쇠망의 싹을 만들어 양식 있는 무사들이 차츰차츰 등을 돌리게 하였던 것이다.

  텐분 22년(1553)에 요시모토가 우지자네를 훈계한 편지가 남아 있다.

【 네 소행은 정말로 무분별하구나. 장차 어찌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궁술弓과 마술馬은 남자가 익혀야 할 일로 이에 능하든 능하지 못하든 무조건 수련해야 하는 것이다. 문무文武 양도가 없이는 조금도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다. (중략)... 그리고 군자君子 중후하지 않으면 이윽고 위엄이 서지 않는데, 나(요시모토) 본인도 의외로 행동거지에 경솔한 점이 있다 생각한다. 그렇기에 일가친척 이하 개개에게 내 지혜(가 뛰어나다는 것) 외 여러 가지를 각인시켜 놓았으니 내 대에는 어쨌든 별 일이야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상하구분이 희박한 것을 체념하고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있지만, 네 대까지도 그렇게 하면 영지를 잃게 될 것이다. 잘 생각해서 분별을 갖추어야 한다... 】요시모토가 자신의 결점을 드러내면서까지 우지자네에게 깨우침을 주려고 한 마음씀은 알고도 남음이 있다.

  요시모토가 문文에 기울어진 무장이라면, 노부나가는 오히려 진성 무장이었다. 센고쿠戦囯 쟁란 시기에는 문치파文治派보다는 무단파武断派 쪽이 승리를 거둔다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 노부나가가 도장印形을 팠을 때 자기 자신의 것은【 천하포무天下布武 】, (3남) 노부타카信孝의 것은【 과검평천하戈劍平天下 】, (차남) 노부카츠의 것엔【 위가해내威加海內 】라고 새기게 했다. 그야말로 노부나가가 품은 뜻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노부나가가) 무단에만 기울어지지 않았다는 건, (한 때) 암살하려고 했던 이나바 잇테츠稲葉一徹가, 그【 설옹남관(雪擁藍関, 역주 : 중국 당나라 한유韓愈의 시 구절) 】의 시를 잘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용서해 준, 요시모토가 와카和歌 한 구절을 듣고 부하를 용서해준 것과 닮은 일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유소년기부터 거칠고 포악했다." 고 하는 비난이 있는데, 물론 성격적인 면도 있었겠지만, 스스로 이 점에 대해 세심한 주의를 하고 있었다는 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아시카가 말기의 형식화된 생활에 대한 혁명적인 정신의 발로로 읽을 수 있는 점도 존재한다. 그가 세심했다는 건 사람을 다루던 데에서도 드러난다. 노부나가의 성공과 요시모토의 실패는, 그 절반 정도를 재능의 거부挙否로 환원시켜도 될 것이다.

  가까운 예를 들자면 이 오케하자마 전역에서 야나다 데와노카미梁田出羽守에게, "훌륭한 한 마디 (제언)로 대승을 거두게 했다" 고 하여 쿠츠카게 마을沓掛村 3천 관의 땅을 하사했으나, 요시모토의 목을 벤 모리 신스케毛利新助에게는 야나다만큼의 상을 주지 않은 점이다. 상을 내리는 일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경중을 살피는 데 오류가 없었다.

《토쿠시요론読史余論》의 저자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가, 그 저서에서 노부나가가 성공한 이유를 조목조목 들면서,

【 오닌의 난 이후 사람들이 전투를 즐기면서 민력이 날로 피로해졌고, 나라의 재원이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던 차에 빈고노카미 노부히데備後守信秀가 비옥한 땅沃饒の地에 거하며, 부국강병의 기술을 이용해 경제와 군사력에 힘을 써 병사와 재원 모두가 풍요해졌기에, 노부나가가 그 사업을 이어받아 영웅적인 무사들을 얻어 백전의 공을 세웠다. 그 지방(囯, 오와리尾張) 은 사방으로 통하는 땅으로, 케이시(京師, 교토京都)에 가까웠던 데다가 아시카가 님 십수 대의 여광余光을 빌려 떨쳐 일어났기에 그 위광이 천하에 미쳤다. 】라고 말하였는데, 타당한 평론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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