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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쿠치 칸] 오케하자마 전투桶狹間合戦 (3) ┗ 日本合戰譚


  이 글은 패전 이전 일본의 유명 대중소설 작가로 출판사 분게이슌쥬文藝春秋의 창립자 겸 초대 사장이자, (고인이 된 친구들의 이름을 따) 아쿠타가와 상芥川賞 / 나오키 상直木賞이라는 일본의 저명한 문학상을 만들어내기도 한 키쿠치 칸菊池寬 씨의 저서《일본합전담日本合戦談》에 포함된【 오케하자마 전투桶狹間合戦 】편을 번역한 글입니다.

  덧붙이자면, 이 글의 내용은 일본 전국시대를 둘러싼 지금의 통설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자인 키쿠치 씨가 별세하신 때로부터만 쳐도 이미 67년이 지났으니 말이죠. 특히 오다 노부나가의 3대 전투(오케하자마 / 아네가와 / 나가시노 전투)의 경우 최근의 학설에 의해 전투의 양상과 전개 자체에 대한 해석이 크게 뒤집어져서, 이《일본합전담日本合戦談》에 수록된 이야기는 상당히 낡은 감을 감출 수 없습니다.(지금 통설로 자리잡은 오케하자마 전투의 내용에 대해서는 제가 언젠가 정리해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좋든 싫든 현대의 역사가들이 '1차 사료가 아니다' 는 이유로 가지쳐낸 내용이 여기에는 제법 섞여있기 때문에, 이 내용을 그대로 믿기보다는 흥미 위주로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양군 접전, 오케하자마 전역桶狹間役

  무더웠던 18일의 밤이 지나간 19일 이른 아침, (마츠다이라松平) 모토야스元康의 부장 마츠다이라 미츠노리松平光則 / 마츠다이라 마사치카松平正親 / 마츠디이라 마사타다松平政忠 등이 이끄는 장병들이 먼저 마루네 성채丸根砦에 도달했다.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던 사쿠마 모리시게佐久間盛重 이하의 수비병들은 맹렬한 방어전을 벌였다. 마사치카 / 마사타다가 죽고, 미츠노리도 부상을 당했다고 하니 그 반격이 얼마만한 것이었을지 추측할 수 있다. 대장급이 저 정도였으므로 사졸들은 순식간에 겁을 먹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 틈을 주지 않고 모리시게 등은 성문을 열십자로 열어젖힌 후 밖으로 치고 나갔다. 모토야스가 이를 보고, "저들은 죽을 각오를 한 병사들이니 근접전을 벌이지 마라. 멀리서 둘러싸고 화살과 조총을 퍼부어라." 고 명령하였기에, 모리시게들은 순식간에 화살과 탄환의 한복판에 노출되어 그 사졸들과 함께 쓰러졌다. 모토야스의 부하 무사 카케이 마사노리筧正則가 이 기세를 타고 전진하여, 성문을 닫을 틈을 주지 않고 난전을 벌인 끝에 마츠다이라 요시타다松平義忠의 부하 무사 소우다 마사츠나左右田正綱가 이치반노리(一番乗り, 역주 : 공격군 소속으로 성내에 가장 먼저 들어감)를 달성하고, 이윽고 불을 질러 방화할 수 있게 되었다. 모토야스는 마츠다이라 이에츠구松平家次로 하여금 하타가시라旗頭 7명의 수급을 본진에 있는 (이마가와今川) 요시모토義元에게 가지고 가서, 승리를 보고하도록 했다. 요시모토는 "우리는 이미 이겼다." 고 기뻐하며 치하한 후, "우도노 나가테루鵜殿長照와 교대하여 오타카 성에 들어가 인마人馬에게 휴식을 주라" 고 명령하고, 나가테루에게는 "카사데라에 있는 선봉군과 합류하라" 고 명령했다. 이것이 양군이 접전을 벌이게 된 계기가 되었으나 키요스에 있던 (오다織田) 노부나가信長는 유유자적했다. 

  전날 밤 노부나가는 중신들을 소집하였으나, 전쟁에 대해서 논의하지도 않은 채 오로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만 하였다. 안절부절못하던 하야시 미치카츠林通勝가 앞으로 나가가서 말했다. "이미 마루네의 사쿠마가 적에 대한 정보를 알려왔는데, 요시모토의 대군에는 도저히 맞서기 어렵습니다. 다행히도 키요스 성清須城은 천하의 명성名城이므로 여기서 농성하면 될 듯 합니다." 라고.

  노부나가는 담박하게 대답하기를 "옛부터 농성을 하여 운이 트인 전례는 없다. 내일 새벽에 나루미鳴海를 향해 출동하여, 내가 죽든 그들이 죽든 결판을 낼 것이다." 고 했다. 이를 들은 모리 산자에몬 요시나리森三左衛門可成 / 시바타 콘로쿠 카츠이에柴田權六勝家 등은 기뻐 용약하며 "(주군의) 말 앞에서 전사하겠습니다." 라고 답했다. 심야가 되었을 무렵 노부나가는 큰 거실로 나와서는, '사이' 라는 이름의 시녀에게 몇 시냐고 물었다. "야반이 넘었습니다." 라고 답하자, "내 말에 안장을 얹고, 더운 물에 만 밥(湯漬け, 유즈케)을 가져와라." 고 명령했다. 시녀가 황송해하며 다시마와 황밤을 곁들여 밥을 내 오자 유유히 먹어치웠다. 배를 채우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식사를 끝내자 걸상에 걸터앉아서는 작은 북을 잡고서, 동쪽을 향하여 요코쿠謠曲《아츠모리敦盛》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아츠모리敦盛》는 노부나가가 언제나 즐겨 부르던 노래였다.


이 세상은 영원한 거처가 아니니
この世は常の栖にあらず

풀잎에 떨어진 흰 이슬,
草葉に置く白露

물가에 깃든 달보다 더욱 괴이한 곳
水に宿る月より猶怪し

카나야金谷에서 꽃을 노래하던 영화는 이미
金谷に花を詠じし栄華は先立て  

덧없는 바람 속으로 이끌려가고
無常の風に誘はるる

남쪽 누각에 걸린 달을 희롱하던 자들도
南楼の月を弄ぶ輩も

달보다 먼저 세속의 구름에 숨어버렸다네
月に先立て有為の雲に隠れり

인생 오십년 사왕천의 시간에 비교하면
人間五十年化天内を較ぶれば

꿈 속 환상과도 같이 짧은 것
夢幻の如く也

한 번 생명을 받아 태어나
一度生を稟け

멸망하지 않는 존재가 있을 것인가.
滅せぬ物のあるべきか

 
  낭랑하고 위축됨이 없는 노부나가의 노랫소리는 숲처럼 고요하게 진영에 울려퍼졌다. 부하 장병들도 대장의 결사적인 심정을 가슴 속으로 느꼈을 것이다. 노부나가는 혼죠 마사무네本庄正宗의 태도大刀를 허리에 찬 후, 즉시 밤색 말에 올라타 걸터앉았다. 성 안을 빠져나왔을 때 뒤를 따르던 자는 이와무로 나가토노카미岩室長門守 / 하세가와 쿄스케長谷川橋介 / 사와키 토하치佐脇藤八 / 야마구치 히다노카미山口飛憚守 / 카토 야사부로賀藤彌三郞 이상 5기騎에 지나지 않았다. 그대로 정문으로 향하자, 일단의 무리가 새까맣게 늘어서 있었다. 쳐다보니 모리 / 시바타를 대장으로 한 2백여 기였다. "두 사람 모두 빠르군. 빨라." 라고 치하한 후, 돌아보지 않고 말을 달려 아츠다 신궁烈田神宮 앞에 도착했을 때는 그 병력이 1천 8백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아츠다 마을 입구에서는 카토 즈쇼노카미 요리모리加藤図書助順盛가 영접하러 나와서, 출진식 법도에 따라 과자를 준비해놓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기뻐하며 신사에 참배하여 기원문을 바치고 신주神酒를 마셨다. 기원문은 타케이 뉴도 세키안武井入道夕菴에게 명령하여 작성하게 한 것이라 전해지며,

지금의 세상이 혼탁한 것을 근심하여 스스로 천하를 평정하려 생각하고 있었으나, 횡폭한 요시모토가 쳐들어 왔습니다. 적과 아군의 병력차는 그야말로 수레 앞의 사마귀, 모기가 철로 만든 소를 물어뜯으려는 것과도 같습니다. 바라건대 천하를 위하여 신께서 도와주시기를. 】이라는 의미의 내용인데, 과연 이와 같은 기원문을 봉납했는지 어떤지는 다소 수상쩍은 부분이 있긴 하나, 이 싸움이 천하평정의 제 1보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은 의심하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한다. 

  이 때 노부나가는 시줏돈을 신주 앞에 던지면서, "(동전) 앞면이 나오면 우리가 이긴다." 고 말했다. 신관에게 가서 알아보게 하니, 모든 동전이 앞면을 드러내고 있다고 해서 장병들은 용약했다. 사실 이것은, 동전의 뒷면과 뒷면을 미리 접착제로 붙여놓았기에 모든 동전이 앞면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이 때에는 날이 완전히 밝아서, 이 날의 더위를 보증해주는 듯한 태양은 산등성이를 넘어서 높이 떠 있었다. 노부나가는 뒤를 돌아보며 결사의 장병 1천 8백 명이 조용히 따르는 것을 확인했으나, 이마가와 군은 어쨌든 10배가 넘는 대군이다. 조금이라도 아군의 숫자를 많아보이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카토 요리모리에게 "창포로 만든 기치 / 목면 조각들을 모아 대나무에 부착시켜, 아츠다 사람들로 하여금 한 사람당 (그) 장대 1개씩을 들고 고지로 올라가서 이를 사시모노처럼 세워놓아, 가짜 부대를 만들라" 고 명령했다.

《오케하자마 전투기桶狭間合戦記》에,【 아츠다로 출진했을 때 노부나가는 타고 있던 말의 안장 앞 부분과 뒷 부분에 두 손을 걸고서 말에 비스듬히 걸터앉아서는, 말안장 뒷부분에 의지하여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고 적혀 있다. 아마, 앞에서 나온《아츠모리》와 마찬가지로 좋아하던 "죽는 것은 정해진 것. 추억거리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반드시 남기고 떠나야 할 말은..." 이라는 가사의 유행가小唄라도 입에 담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결전이 코 앞에 다가왔음에도 이런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걸 보면 누가 뭐래도 천재적인 무장답다. 이러한 모습으로 신궁을 나오자, 도로 옆에서 20세 정도 되어보이는 하오리를 입은 젊은이가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노부나가에게 무언가를 아뢰려고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았다. 노부나가가 뜯어보니 용모수려한 자로, "누구인가?" 하고 물어보니, "쿠와바라 진나이입니다." 고 답하며, "과거 요시모토가 자주 놀러다니던 절에서 동자승으로 지낸 적이 있었기에 요시모토의 얼굴을 잘 알고 있으므로, 바라는 바인데 이번 싸움에서 요시모토와 격투를 벌여 그 목을 베고 싶습니다." 고 답했다. 노부나가는 칼을 하사하며 대열에 가담시켰다. 모리 신스케毛利新助 / 핫토리 코헤이타服部小平太 두 사람이 이 말을 듣고, '이 젊은이를 따라가면 요시모토를 찾을 수 있겠구나.' 고 생각했다.

  지금의 시간으로 오전 8시 경, 신궁 남쪽의 카미치가마노야시로上知我麻祠에서 목격된 훨씬 남쪽에서 불어오는 한 줄기 연기가, 때마침 내리쬐이고 있던 태양빛에 의해 짙은 보라색빛으로 빛나면서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마루네 성채가 함락되어 불타고 있었기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다. 인마를 채근해 코나루미古鳴海 앞에 있는 가도에 도착하여, 싸움터의 먼지에 찌든 전령병과 마주쳤다. 마루네가 함락되고 사쿠마 다이가쿠 / 이오 오우미노카미飯尾近江守가 지금 전사했다는 것을 노부나가가 듣고는, "다이가쿠는 나보다 먼저 갔구나." 라고 말하며 측근 무사에게 은제銀製 염주를 가지고 오게 하여, 어깨에 비스듬히 메고서 앞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이제 너희들의 목숨, 내게 맡겨라!" 고 말하기 무섭게 밤색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나갔다. 뒤를 따르는 무사들도 이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그 뒤를 쫓아, 우에노 가도는 순식간에 말발굽에 따른 먼지가 솟아오르며 희뿌옇게 되었다.
 

덧글

  • 히알포스 2015/12/08 16:35 # 답글

    쭉 읽어나가다 이 부분에서 위화감을 느낍니다.....

    이 때 노부나가는 시줏돈을 신주 앞에 던지면서, "(동전) 앞면이 나오면 우리가 이긴다." 고 말했다. 신관에게 가서 알아보게 하니, 모든 동전이 앞면을 드러내고 있다고 해서 장병들은 용약했다. 사실 이것은, 동전의 뒷면과 뒷면을 미리 접착제로 붙여놓았기에 모든 동전이 앞면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라고 되어 있는데, 저 때 전통적인 일본 동전은 타원형으로 되어 있어서 저런 던지기에는 알맞지 않다고 알고 있는데 말이지요.....(생각해보니까 전통적인 이런 일본 동전이란 게 사실 이 때의 것은 아니고 에도시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지요.......아닐 수도 있겠군요.)
  • 3인칭관찰자 2015/12/08 20:15 #

    제가 알기로 일본의 화폐가 다시 통일되어 정착되어간 건 토요토미 정권을 거쳐 에도 막부가 세워진 후의 일로 알고 있습니다. 노부나가가 오케하자마 전투를 벌일 즈음의 화폐라면.. 지역마다 화폐를 쓰는 양상이 각기 달랐을 겁니다. 영주들이 금 / 은을 재료로 만들게 한 화폐도 제각각이고, 해외무역을 통해 축적한 중국의 영락전 같은 것들도 유통되었을 테니 반드시 노부나가가 던진 동전이 타원형이라고 장담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합니다.
  • 히알포스 2015/12/12 19:59 #

    네, 그렇지요. 전근대에는 대부분의 화폐가 그렇지요. 예외가 있다면 언급하신대로 중국과 베네치아, 전성기의 스페인이나 잉글랜드 정도일까요. 이들은 자국에서 통일된 화폐를 찍어내고 자국 권역에서 그 화폐만 쓴 나라들인데, 뭐 완벽하지는 않았지요 여러모로.

    특히 중국과 무역하는 쿠니에서는 중국화폐가 오늘날 미국달러를 자국화폐 대신 쓰듯이 쓰써다고 하는 말을...어디서 들은것같은데 확실하지는 않군요. (이 댓글에서는 확실하지 않다는 말을 왜이리 많이 하게 되는지)

    확실하게 한 나라의 경제권역을 건설하고, 국가가 화폐를 독점해서 신뢰를 심고, 중앙은행 만들기, 그리고 금본위제를 굳혀서 국제무대에 뛰어들 수 있는 체질을 갖추는 것이 근대국가의 요건 중 하나였고, 저 시대는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말씀하신 대로 말이지요.
  • 히알포스 2015/12/08 17:03 # 답글

    아니, 옛날 동전 운운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고.....동전을 던져서 운을 물어본다는 행동이 뭔가 안어울리는데.....전통적으로 일본에 저런 식의 문화가 있었나요?? 지금 우리도 동전 던지기로 운에 맞겨보는 건 많이 하지만, 이건 분명히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거든요.....

    간단히 말해서 동전 던지기를 넣은 건 작위적이라는 거지요.

    이렇게 느껴집니다. 이런 류의 글을 쓰는 일본인들은 "봐라, 일본은 다른 아시아보다 일찍 서양과의 교류가 있었고 지금도 다른 곳에 비해 합리적이고 서구화된 국가이다" 라고 말하고 싶다는겁니다.

    이 부분도 그런 의도를 어느 정도 가지고 쓴 것 같군요.
  • 3인칭관찰자 2015/12/08 20:17 #

    그런가요. 동전을 던져서 길흉을 맞히는 풍습이 서양에서 비롯되었던 것인가요.
    으음, 이 부분은 저도 잘 모르겠기에 뭐라 말씀드리기가....
  • 히알포스 2015/12/10 17:14 #

    예전에 그게 서양에서 유래된 것이고, 생각보다 오래된 것이라는 요지의 글을 봤고 그거 기억합니다. 그런데 정확히 어디에서, 제목이 뭔지는 잊어버렸지요.....그래서 근거가 부족한 말이 되었습니다만.

    어쨌든 제가 알기로는 동전 던지기는 서양에서 건너온게 맞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5/12/10 18:24 #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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