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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쿠치 칸] 오케하자마 전투桶狹間合戦 (2) ┗ 日本合戰譚



  이 글은 패전 이전 일본의 유명 대중소설 작가로 출판사 분게이슌쥬文藝春秋의 창립자 겸 초대 사장이자, (고인이 된 친구들의 이름을 따) 아쿠타가와 상芥川賞 / 나오키 상直木賞이라는 일본의 저명한 문학상을 만들어내기도 한 키쿠치 칸菊池寬 씨의 저서《일본합전담日本合戦談》에 포함된【 오케하자마 전투桶狹間合戦 】편을 번역한 글입니다.

  덧붙이자면, 이 글의 내용은 일본 전국시대를 둘러싼 지금의 통설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자인 키쿠치 씨가 별세하신 때로부터만 쳐도 이미 67년이 지났으니 말이죠. 특히 오다 노부나가의 3대 전투(오케하자마 / 아네가와 / 나가시노 전투)의 경우 최근의 학설에 의해 전투의 양상과 전개 자체에 대한 해석이 크게 뒤집어져서, 이《일본합전담日本合戦談》에 수록된 이야기는 상당히 낡은 감을 감출 수 없습니다.(지금 통설로 자리잡은 오케하자마 전투의 내용에 대해서는 제가 언젠가 정리해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좋든 싫든 현대의 역사가들이 '1차 사료가 아니다' 는 이유로 가지쳐낸 내용이 여기에는 제법 섞여있기 때문에, 이 내용을 그대로 믿기보다는 흥미 위주로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서진西進

  군웅들이 할거한 센고쿠 시대戦囯時代는 얼핏 보면 그저 혼란만 가득했던 암흑시대처럼 보이지만, 그런 혼란 가운데 자생적으로 통일을 지향하려는 기운이 꿈틀대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영웅호걸들이 동쪽에서 / 서쪽에서 싸워나가며 천하의 주인이 되겠다는 포부를 제각각 가지고 있었던 것은, 그들이 가진 단순한 영웅주의의 귀결이 아니라, 현실에서 존재한 - 정치상으로든 경제상으로든 - 통일의 기운에 편승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시대가 되면서 병농(兵農, 병사와 농민)의 분리는 명확해졌고, 지방에 따라 상업도 흥륭하여, 아시카가 시대(足利時代, 무로마치 막부 시기)부터 번성했던 사카이堺를 시작으로 동쪽의 오다와라小田原 / 서쪽의 오사카大阪, 야마구치山口 등 서서히 도회지가 형성되게 되었으나, 이 때가 되면서 작은 지방에서 자기가 보유한 기득권을 지키려고 하던 자들은, 보다 거대화하려고 하는 강자들에 의해 짓밟혀버리게 된다. 뜻을 둔 자들은 반드시 교토로 올라가上京 천자(天子, 텐노天皇) 밑에서 정치 / 경제의 대권을 틀어쥐고 부강함을 축적하려고 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이렇게 서상(西上, 역주 : 서쪽으로 진격하여 쿄토로 입성함)하려는 포부를 지닌 자들로는 타케다 신겐武田信玄이 있었고,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이 있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도 마찬가지로 3개 지방을 영유한 자로서 서상에 대한 꿈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역주 : 센고쿠 시대 다이묘들이라면 누구나 일본통일을 꿈꾸었고 수많은 다이묘=영주들이 천하를 잡기 위해 쟁란을 벌였다, 는 이미지는 요즘에는 거의 폐기된 상태입니다. 지방에서 올라가 교토에서 활약한 오우치 요시오키나 오다 노부나가, 특히 노부나가가 특별한 축이며,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입경하기 위해 오와리로 쳐들어가 오케하자마에 진을 친 것이 아니고 / 타케다 신겐의 마지막 원정이 과연 노부나가 / 이에야스를 쓰러뜨리고 단번에 입경하기 위한 것이었는가 하는 문제도 요즘에 와서는 부정적인 이야기가 많습니다) 

  요시모토는 먼저 후방에 대한 근심을 끊기 위해, 자신의 딸을 타케다 하루노부(武田晴信, 훗날의 신겐)의 아들 요시노부義信에게 시집보냈다. 호죠 씨北条氏와도 화친했다. 그렇게 드디어 서상을 도모할 단계에 이르자, 우선 미카와 서쪽의 여러 호족들, 특히 오와리尾張 지방의 노부나가를 박살내지 못하면 쿄토에 다다르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요시모토는 당시 스루가駿河 지방의 코쿠후(囯府, 특정 지방囯의 중심이 되는 관청)에 거주하던 마츠다이라 타케치요松平竹千代에게 그 선봉에 설 것을 명령했다. 타케치요는 바로 훗날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이다. 타케치요의 삶은 불우하여, 처음에는 아츠미 군渥美郡 무로 마을牟呂村 1천 석밖에 주어지지 않아, 가신들을 먹여살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토리이 이가노카미 타다요시鳥居伊賀守忠吉가 자신의 사재를 털어 마츠다이라 가문을 위해 비용을 댔다고 전해진다. 훗날 미카와 무사三河武士로 불리게 되는 가신들은 어떤 일이 생겨도 인내하며,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시모토의 명령에 따라 서상군의 선봉을 맡아 많은 공적을 세웠음에도, 요시모토의 꿈이 분쇄당하게 되면서 오히려 타케치요(코지 2년=1556년 말 요시모토의 매부인 세키구치 치카나가関口親永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그 후 모토야스元康란 이름을 쓰다가, 다시 이에야스家康로 개명했다)의 운명이 트이게 될 거라고는, 그 자신도 예측하지 못했으리라.

  마츠디이라 모토야스가 선봉에 서서 얼마나 우수한 활약을 했는지를 간단히 짚어보자면, 코지 3년(1557) 4월에 카리야刈屋를 공격하고, 7월에는 오오후大府로 향했으며, 다음 해인 에이로쿠永䘵 원년(1558) 2월에는 요시모토를 배반하고 노부나가와 내통한 테라베 성주寺部城主 스즈키 시게노리鈴木重敎를 공격했고, 그 해 4월에는 오타카 성大高城에 군량兵糧을 보급했다.

  (역주 : 현재의 정설에 따르면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이에야스가 오타카 성에 군량을 보급한 시기는 오케하자마 전역이 시작된 1560년 5월 18일입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인 5월 19일 모토야스는 오다 측의 마루네 성채를 공격하죠) 

  물론 그 무렵에는 노부나가 쪽에서도 게으름 없이 준비를 해 놓고 있었기 때문에, 이 오타카 성 같은 곳도 충분히 감시하면서 군량이 반입되는 것을 엄중히 경계했다. 만약 이마가와 측에서 오타카에 군량을 반입하려는 낌새가 보이면, 오타카와 가까운 와시즈鷲津 / 마루네丸根 두 성城이 소라고둥을 울리고, 그 고둥소리를 신호로 테라베 등의 여러 성채가 신속히 오타카를 향하여 출격하게 하는 한편, 탄게丹下 / 나카지마中島 두 성의 병사들은 마루네 / 와시즈에 구원군으로 출격하라고 명령하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었다. 

  4월 17일 밤이 되자, 함께 준비를 하고 있던 마츠다이라 지로사부로 모토야스는, 18세의 젊은 무사로서 대임을 완수하기 위해 출발하려고 했다. 사카이 요시로 마사치카酒井与四郞正親 / 사카이 코고로 타다츠구酒井小五郞忠次 / 이시카와 요시치로 카즈마사石川 与七郞数正 등이 "노부나가라면 반드시 성에 조치를 취해놨을 겁니다. 병량을 반입할 수 있을 거라곤 도저히 생각되지 않습니다." 라고 간언했으나, 가슴 속에 비책이 있었던 모토야스가 들을 리가 없었다. 1장 8척의 바탕에 검은 접시꽃 문양 3개를 칠한 7개의 깃발을 앞세운 4천여 병력이 소리 없이 진군했다. 이에야스는 병사 8백 명을 인솔하여, 마바리 1천 2백 대를 지키며 오타카 성에서 20여 정 떨어진 곳에서 기다렸다. 선봉군은 와시즈 / 마루네 / 오타카를 옆으로 지나쳐간 후, 테라베 성으로 향하여 이 곳을 불시에 공격했다. 마침 우시미츠(丑満, 역주 : 새벽 2시)의 시각에 습격을 받았기에 오다 군은 크게 놀라며 방어전을 펼쳤으나, 마츠다이라 군은 이미 이치노키도一ノ木戶를 짓부수고 쳐들어와, 불을 지른 후 곧바로 철수했다. 물러갔다고 안심하자 이번엔 우메가츠보梅ケ坪 성으로 향하여 니노마루二の丸와 산노마루三の丸까지 치고 들어와 이쪽도 마찬가지로 불을 질렀다. 엄중히 오타카 성을 감시하고 있던 마루네 / 와시즈의 보초병들은 멀리서 함성소리가 나는 것을 감지한 그 때, 어둠을 뚫고 테라베 / 우메가츠보 두 성에 불길이 오르는 것을 보고 놀라는 한편으로 또 미심쩍어했다. 오타카 성과 가장 가까운 마루네 / 와시즈를 내버려두고 테라베 성 같은 말성末城을 먼저 공격하는 일은 없다고 멋대로 수긍하고 있었던 것이다. 괴이쩍게 보긴 했으나 아군이 위험에 처해 있는 건 확실했다. 챙길 것도 제대로 챙기지 않은 채 성을 비워두다시피 하고 출격했다. '내 계략에 걸려들었군.' 어둠 속에서 싱긋 미소를 지은 모토야스였다. 이 틈에 손쉽게 오탸카 성에 군량을 반입할 수 있었다.

  이 오타카 성 병량 반입은, 이에야스의 출세 두루마리出世絵巻의 첫 번째 풍경이었다. 오타카 성에 병량을 공급하는 데 성공한 이에야스는 5월에 다시 오오후로 향하여 8월에는 코로모 성衣城의 항복을 받았다. 다음 해인 에이로쿠 2년(1559)에는 카리야를 공격하고, 7월에는 히가시히로세東広瀨 / 테라베 두 성을 함락시킨 후, 12월에는 무라키 성채를 점령하고 다음 해(1560) 정월에 이를 무너트렸다.

  이미 이렇게 된 이상, 정면충돌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에이로쿠 3년(1560) 5월 1일,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드디어 전군에 출발령을 내렸다. 선봉군은 10일에 이미 출발했고, 하루 늦어진 12일, 요시모토는 아들 우지자네氏真를 영지에 잔류하게 한 후 스스로 후츄(府中, 지금의 시즈오카 시)를 출발했다. 그 총수는 2만 5천. 이를 4만 명이라고 자칭하고 있었다. 과장하는 버릇은 오늘날 지나(支那, 중국)의 대장들과 꼭 닮았다.

  요시모토가 출발할 때 여러 가지로 흉조를 알리는 사건들이 일어났었다고 전해진다.

  원래 요시모토는 형 우지테루氏輝가 가문을 상속했기에 자신은 선승禪僧이 되어 후지 젠토쿠사善徳寺에서 지냈다. 그러나 우지테루에게 아들이 없었기에 20세가 된 요시모토를 환속시켜서 가문을 잇게 한 것이다. 이마가와 지로다유 요시모토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이 때 옆에서 끼어든 것이 요시모토의 둘째 형으로 하나쿠라花倉의 절 주인寺主인 료신良真이었다. 료신의 견적에 의하면 형인 자신이 가문을 상속해야 하는데, 자신이 우지테루 / 요시모토와 어머니가 다르다는 이유로 밀려났다고 하여 결국은 요시모토와 싸움을 벌였다가 패배하고, 하나쿠라사花倉寺에서 자살한 일이 있었다.

  그 하나쿠라사의 료신이 요시모토가 출진하는 날 밤에 나타났다. 요시모토는 머리맡에 두던 명도銘刀 마츠쿠라고松倉鄕를 뽑아 그를 베었다. 유령이므로 베인다 하더라도 별 타격이 없었으리라 생각되지만 료신은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난 후, "너의 운명이 다했다는 것을 알리러 왔다." 고 말했다. 막 출진하려던 차에 재수없는 소리를 일부러 알려주러 왔던 것이다. 요시모토도 지지 않고 "나는 너의 원수이다. 어째서 나에게 길흉을 고하는 것인가?" 며 인간이 아니라도 거짓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다그쳤다. 료신은 "과연 그렇군. 너는 나의 원수이다. 그러나 이마가와 가문이 멸망하는 것이 슬퍼져서 알리러 온 것이지." 라고 말하기 무섭게 그 모습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 외에도 슨슈(駿州, 스루가 지방)의 친쥬소쟈다이묘진鎮守総社大明神 신사에 신의 전령神使으로 간주되던 흰 여우가 살고 있었으나, 요시모토가 출진한 날 배가 찢어져 죽었다고도 전해진다. 

  둘 다 요어망탄妖語妄誕한 이야기라 진위여부는 알 수 없다. 만약 요시모토가 이 싸움에 이겼더라면, 이와 같은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고 경사스런 일화로 바뀌었으리라.

  쓸데없는 이야기는 각설하고, 15일 선봉군은 치리우, 17일에는 나루미에 도착해 주변 마을들을 방화했다.

  요시모토는 16일날 오카자키에 도착하여, 다음과 같이 군대를 배비했다.

  오카자키 성 수비 - 이오하라 모토카게庵原元景 등 1천여 명
  오가와 / 카리야 감시 - 호리코시 요시히사堀越義久 1천여 명
 

18일에는 이마무라今村을 거쳐 쿠츠카게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여기서 전군의 부서를 정했다.

마루네 성 공격 - 마츠다이라 모토야스 2천 5백 명
와시즈 성 공격 - 아사히나 야스요시朝比奈泰能 2천 명
원군 - 미우라 빈고노카미三浦備後守 3천 명
키요스 방면 전진부대 - 카츠라야마 노부사다葛山信貞 5천 명
본군 - 이마가와 요시모토 5천 명
나루미 성 수비 - 오카베 미츠노부岡部三信 7~8백 명
쿠츠카게 성 수비 - 아사이 마사토시浅井政敏 1천 5백 명  

  그리고 오타카 성에 있던 우도노 나가테루鵜殿長照로 하여금 마루네 / 와시즈 공격을 지원하게 했다. 이 우도노란 자는 노부나가의 병사들이 공격해와서 군량이 부족했을 때, 성 안의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캐어 싸우지 않는 날에는 이것을 먹이고, 싸움이 벌어진 날에만 진짜 쌀을 주었다고 알려진 용사였다.

 
이 이마가와 군의 공격과 진격에 맞서, 오다 군도 준비를 완전히 끝마친 상태였다. 바로

와시즈 성채 - 오다 노부히라織田信平 4~5백 명
마루네 성채 - 사쿠마 모리시게佐久間盛重 4~5백 명
탄게 성채 - 미즈노 타다미츠水野忠光 4~5백 명
센죠지 성채 - 사쿠마 노부타츠佐久間信辰 4~5백 명
나카지마 성채 - 카지카와 카즈히데梶川一秀 4~5백 명
   
  이들 성채는 탄게 성채만이 사방 40간이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사방 14~15간에 지나지 않았다. 병력도 이마가와 군에 비하면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열세였으나, 각 부장들 이하 모두가 죽음을 각오한 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마루네 성채의 사쿠마 다이가쿠 모리시게는 허망하게 무사들을 죽게 하는 것을 아깝게 여겨, 다섯 명의 하타가시라旗頭 - 핫토리 겐바노스케服部玄蕃允 / 와타나베 오쿠라渡辺大藏 / 오오타 사콘太田左近 / 하야카와 다이젠早川大膳 / 키쿠가와 오키노카미菊川隱岐守 - 에게 후퇴하여 후군과 합류하도록 권유했으나, 그들 중 누구 하나도 이 권유에 따르지 않았다. 

  에이로쿠 3년(1560) 5월 18일의 밤은 살기가 산야에 가득한 채 이슥해지고 있었다. 정말 무더운 밤이었다.   

 

덧글

  • 라라 2015/11/12 23:08 # 답글

    확실히 이겼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겼다라고 전해지겠군요
  • 3인칭관찰자 2015/11/13 18:44 #

    나쁜 징조가 많았는데 그럼에도 이겼다 내지는, 전투 직후부터 승리를 합리화할 미담들만 유포되어 세간에 알려지고 보급되었다... 둘 중 하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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