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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151029 -《일본인의 전쟁관》中 독서



  구 막료장교의 전기(戰記)

  이 시기(역주 : 1950년대) '전쟁기록물' 의 또 하나의 특징은 특히 강화조약 발효를 전후하여 막료 근무 경험을 가진 육ㆍ해군 영관급 엘리트장교의 저작이 잇달아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일이다. 대표적인 예로 1950년에 출판된 츠지 마사노부(辻政信)의『15대 1』『잠행 3천리』4), 이노구치 리키헤이(猪口力平)ㆍ나카지마 타다시(中島正)의『신풍특별공격대』5), 후치다 미츠오(淵田美津雄)ㆍ오쿠미야 마사타케(奧宮正武)의『미드웨이』『기동부대』6), 1952년에 출판된 쿠사카 류노스케(草鹿龍之助)의『연합함대』7), 약간 시대를 내려와 1956년에 출판된 핫토리 타쿠시로(服部卓四郞)의『대동아전쟁 전사 1~8』8) 등이다.

  구 막료장교에 의한 이 일련의 저작은 모두 강한 편견을 갖고 있는데, 일단 여기에서는 두 가지만 지적해 두겠다. 첫째, 핫토리 타쿠시로의『대동아전쟁 전사』가 전형적으로 보여주듯 저작들은 그들 자신의 사고방식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면서 작전지도ㆍ전쟁지도라는 한정되고 좁은 각도에서 본 전쟁사의 서술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대동아전쟁 전사』는 핫토리의 저작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는 각 지구의 작전참모급의 구 막료장교가 분담 집필했고, 대본영 참모 이나바 마사오(稲葉正夫)가 전체 정리를 맡았다. 그런 의미에서도 막료장교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을 비춰주는 저작이라 할 수 있겠다.

  '합리주의적' 이라 얘기되는 해군 관계자의 저작은 육군 관계자의 저작들과 비교한다면 적어도 패인분석에 관해서는 심도 있게 고찰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앞의『기동부대』가 "태평양전쟁은 하늘의 싸움이었다. ...... 하지만 비행기가 중심이 되는 근대전에서는 장기적이고 계획적인 군비가 여의치 않은 법이다. 항공군비는 국가의 총력과 직결되며 국민생활의 잠재능력이 바로 승부를 가른다" 고 결론짓고 있듯이, 패인은 오로지 경제력='물자' 의 문제로만 환원하고 있다.

  동시에 본디 그들의 전문영역이어야 할 협의의 군사사 분석에는 독특한 왜곡이 더해진다. 특히 중국전선의 광범위한 게릴라전의 전개로 상징되는 민족적인 저항이 거대한 대항력을 형성했다는 시대적인 큰 흐름이 전혀 시야에 들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모든 저작이 공통적이다. 핫토리 타쿠시로와 면식이 있던 경제평론가 하세가와 케이타로(長谷川慶太郞)는 이 점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 전후『대동아전쟁 전사』를 발표한 핫토리 대령에게 "중국 전장, 필리핀 전장을 포함하여 각지에서 일본군을 괴롭혔던 게릴라전에 대한 기술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 대답으로 "우리는 정규군이며 전사란 정규군끼리의 전투를 다루는 것이므로 게릴라전 등은 전황의 대세를 움직이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생략했다" 는 얘기를 듣고 놀란 기억이 있다. 】9)

  아시아ㆍ태평양전쟁중 두 차례에 걸쳐 참모본부 작전과장과 같은 요직에 있던 인물의 아시아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일본인 자신의 아시아관을 되묻는 의미에서도 기억되어야 할 사항이다.

  구 막료장교 저작의 두 번째 특징은 군부와 그 중추에 있었던 자신의 전쟁책임 문제에 대한 자각과 반성을 완전히 누락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 점에서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1950년대 초에 많은 베스트셀러를 집필한 츠지 마사노부일 것이다. 츠지의 저작은 작전참모로서 자기의 전쟁체험에 토대를 둔 전기이지만, 기략과 행동력이 풍부한 활약상과 무위무책한 군 상층부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독자에게 강한 인상을 준 듯하다.

  오야케 소이치(大宅壯一, 역주 : 원문의 오류. 실제로는 '오야 소이치' 이다)가 츠지의 저작에 대해 "주인공이 사나다 유키무라(眞田幸村)와 같은 대전략가가 되어 신출귀몰한 대활약을 벌이는 점이 점령하에 있던 사람들의 피를 들끓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이며 대중문예이다." 고 했듯이10), '강화의 실현=점령의 종결' 에 따라 고삐 풀린 내셔널리즘의 격류가 그 배경에 있었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저작 속에서 전혀 언급하지 있지 않지만 츠지 자신은 참모본부 작전과 전력반장 시절 대미 개전론의 최선봉이었으며, 타나카 신이치 작전부장, 핫토리 타쿠시로 작전과장과 함께 "대동아전쟁 개전의 원동력" 이 된 인물이다. 요컨대 적어도 대미 개전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츠지는 그 점에 관해 완전히 입을 닫고 있는 것이다.11)

  한편 패전과 그 후의 현실이 구 군인의 사상에 어떤 변화를 초래했는가의 시각에서 구 군인의 전후 사상을 분석한 츠루미 슌스케(鶴見俊輔)는 제8방면군 사령관이었던 이마무라 히토시(今村均)와 구 막료장교로『대동아전쟁 전사』의 저자인 핫토리 타쿠시로를 다음과 같이 비교했다. 이마무라는 "메이지 태생의 육군으로 사상의 원칙을 바꾸지 않으면서 그 원칙(예를 들면 군인의 정치 불간섭)을 과거 자신의 시대에 적용했던 이상으로 엄격하게 적용하여 15년전쟁에서 군인들의 행동을 반성하는 형태로 약간 전향했" 던 데 비해, 핫토리는 패전이라는 현실에 "거의 완전히 비전향으로 맞서나갔다" 고 결론지었다.즉 츠루미에 따르면 "이 두 사람의 차이는 핫토리와 달리 이마무라에게 있던 강한 책임의식" 이었다.12)

  츠지와 핫토리로 대표되는 막료집단이란 육군의 경우로 보자면 각급 지휘관을 보좌하는 참모장교, 육군성ㆍ참모본부 등의 군 중앙부에서 군 수뇌부의 참모기능을 담당했던 엘리트장교를 가리킨다. '하극상' 이란 말로 상징되듯이 육군성을 불문하고 그들 막료집단은 15년전쟁 과정에서 군 상층부를 로봇으로 만들면서 군 내부의 실권을 확실히 장악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식상 그들은 직접적인 권한과 책임을 갖지 않는 보좌관에 지나지 않기에, 책임의식의 희박이라는 일본막료의 고유한 특질이 생겨난 것이다.

  조금은 구 막료장교의 저작에 집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문제를 중시한 것은 주요 사료의 발굴과 공개가 지극히 불충분하던 상황 속에서 그들이 전쟁의 전체상을 조망할 수 있는 입장이라는 강점을 십분 살려 전후사의 어느 단계까지 전쟁사의 해석을 거의 독점해 왔기 때문이다. 이 독점상태가 무너지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4) 辻政信,『十五對一』酣灯社, 1950 ;『潛行三千里』, 每日新聞社, 1950
  5) 猪口力平ㆍ中島正『神風特別攻擊隊』, 日本出版共同株式會社, 1950
  6) 淵田美津雄ㆍ奧宮正武『ミツドウェー』, 日本出版共同株式會社, 1950 ;『機動部隊』, 日本出版共同株式會社, 1950
  7) 草鹿龍之助『連合艦隊』, 每日新聞社, 1952
  8) 服部卓四郞『大東亞戰爭全史 1~8』, 鱒書房, 1956
  9) 長谷川慶太郞『近代日本と戰爭』, PHP硏究所, 1985
  10)『旬刊讀賣』1952년 3월 21호
  11) 高山信武『服部卓四郞と辻政信』, 芙蓉書房, 1980
  12) 鶴見俊輔『轉向硏究』, 筑摩書房, 1976


출처 : 요시다 유타카吉田豊 著, 하종문ㆍ이애숙 譯, 역사비평사 출간
《일본인의 전쟁관》P. 95 ~ 99(제 4장 이중잣대의 성립 - 1950년대 中)



덧글

  • BigTrain 2015/10/30 10:43 # 답글

    제복군인들이 비정규전에 관심을 안 가지는 건 일본만 그랬던 건 아니긴 한데, 일본은 의병전쟁의 경험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대중국전에서의 비정규전 대응에 관심이 없었다는 건 좀 의외긴 합니다. 아니며 작전 여건이 다른 조선과 중국/필리핀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했던 건지..
  • 3인칭관찰자 2015/10/30 22:25 #

    이미 대만 병합 / 갑오농민전쟁 시기부터 비정규부대와의 유격전을 벌여온 일본군이 게릴라전에 대해 무지했다,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하는 건 좀 석연치 않기는 합니다. 제 생각엔 오히려 핫토리의 진의는 '개뼉다구 같은 게릴라들의 저항 때문에 패한 게 아니라 천조국을 적으로 돌렸기 때문에 진 것이다' 는 쪽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대 게릴라전이라는 건 결국은 호쾌한 정규군끼리의 당당한 싸움이 아니라, 게릴라와 농민(-민중) 사이를 차단하기 위해 민중들을 억압하는 장면이 많고, 특히 중국에서는 견벽청야를 위한 삼광작전으로 이어져 수많은 중국인이 살해당하고 온갖 전쟁범죄가 벌어졌기 때문에 이를 역사책에 언급하지 않는 게 더 유리하다고 생각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 도연초 2015/10/30 13:51 # 답글

    1. 이러니 핫토리 타쿠시로가 노몬한사건의 주범 중 한사람이라는 평가가 내부에서 퍼지지 않는게 이상한(실제로도 패전의 원흉 중 하나이며 책임도 지지 않고 입 싹 씻어버렸으니 '반성'이 있을 리가)

    2. 이마무라 히토시가 라바울 주둔군 총사령관 재직시절 의외로 주둔군부터 현지 주민들에게까지 평가가 좋았다던데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었군요. 일단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었으니.
  • 3인칭관찰자 2015/10/30 22:44 #

    1. 한도 카즈토시 씨의《지휘관과 참모》라는 책에는 츠지 마사노부와 엮여서 출연했는데 분명 두 사람의 성격은 판이하지만 서로의 결점을 보완해주는 형태가 되어 그야말로 찰떡궁합이었다고 하더군요.

    노몬한에서 콤비가 되어 시원하게 말아먹고 나서도 살아남아서 다시 중앙으로 복귀해서는 미국과의 전쟁을 놓고 참모본부에서 의견이 갈리자 이 콤비가 나서서 회의론자가 많았던 참모본부의 분위기를 단번에 미국과의 전쟁을 벌이는 걸로 이끌어버렸으니..(결과론적으로 보면 그야말로 일본 역사상 희대의.. 덤앤더머가 아닐까 하고)

    2. 스가모 형무소에서 다른 전범들과 같이 비교적 쾌적한 삶을 살 수 있었음에도 부하들과 고락을 함께 하기 위해서 다시 파푸아뉴기니로 돌아와 열악한 여건 속에서 10년의 수형생활을 한 것만 봐도 확실히 대단한 사람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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