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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쿠치 칸] 신센구미新撰組와 이케다야 습격 (完) 아오조라문고



  이 글은 패전 이전 일본의 유명 대중소설 작가로 출판사 분게이슌쥬文藝春秋의 창립자 겸 초대 사장이자, (고인이 된 친구들의 이름을 따) 아쿠타가와 상芥川賞 / 나오키 상直木賞이라는 일본의 저명한 문학상을 만들어내기도 한 키쿠치 칸菊池寬 씨의 저서《대중유신사독본大衆維新史読本》7장을 번역한 글입니다.   



  순난殉難한 여러 무사들

  반대로, 지사 측에선 그날 밤을 어떻게 관찰하고 있었을까. 당시 초슈 번長州藩의 쿄토 잔류를 책임진 노미 오리에乃美織江의 수기에 따르면, 형세가 긴박해져가면서 유지有志들이 경거망동에 나서는 것을 자중시키는 데 열심이었다. 카츠라 코고로桂小五郎 / 쿠사카 요시스케(久坂義助, 겐즈이玄瑞) 등에 대한 막부 관리들의 추적이 빈번해지면서, 초슈 번은 그들에게 영지로 돌아올 것을 명하고, 번 저택 내의 유지들에게도 외출을 삼가게 했다.

  요시다 토시마로吉田稔麿에게도 시중의 여관에 묵지 말고 번 저택에서 기거하도록 권고했으나 듣지 않았고, 미야베 테이조宮部鼎蔵들의 외출도 극력 제지하고 있었다. 그날 밤의 수기에 따르면,

【 노미는 즉각 스기야마 마츠스케杉山松助 / 토키야마 나오하치時山直八를 보내, 상황을 알아보게 했다. 두 사람 돌아와 보고하여 말하길 "슌타로가 체포되면서 어쩌면, 불온한 일이 생길지 모른다. 반드시 저택 문의 방비를 엄중히 해야 하며, 오늘 밤 다수의 유지들이 이케다야池田屋에서 모인다고 들었는데, 그 인원이 몇 명인지는 소상히 듣지 못했다."  】

【 밤이 되자 스기야마 마츠스케, 은밀히 창을 들고 "외출하겠다" 고 말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팔을 잘린 마츠스케가 피범벅이 된 채로 저택으로 돌아와, "급변이 생겼다." 고 고하였기에, 저택 문을 닫고 비상사태에 대비했다. 노미가 어째서 외출했느냐고 묻자, "이케다야에 가려고 하다가 그 도중에 이렇게 되었다. 너무나 한스럽다." 고 답할 뿐이었다. 】

  스기야마는 도중에 습격받은 것이리라.

【 번 저택 근방에서 요시다 토시마로의 시체를 발견했다. 미야베는 이케다야에서 죽었고, 그 동생은 부상을 입고 저택으로 들어왔다. 이케다야의 여주인도 즉사했다. 카츠라 코고로는 옥상을 통해 도망쳐, 잠복지인 타이슈(対州, 쓰시마 번) 저택으로 돌아갔다. 】

  근황파들이 이 이케다야 사건에서 가장 큰 손해를 본 것은, 미야베 테이조와 요시다 토시마로가 죽음을 당한 점일 것이다. 요시다 토시마로는 와키자시脇差를 들고 힘써 싸우며, 여관 뒤의 정원에서 오키타 소지와 1대 1 대결을 벌였다. 그의 실력도 상당한 것이었으나, "검을 잡으면 천재" 라고 일컬어지던 오키타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어깻죽지를 베인 채로 도망쳐, 이웃집의 정원 앞에서 감시를 하고 있던 쿠와나 번桑藩의 혼마本間 아무개를 죽이고 쿠로카와黑川 아무개에게 중상을 입힌 후, 다시 달려가서 카와라마치河原町에 있는 (초슈) 번 저택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저택의 문이 굳게 잠겨져 있어서, 토시마로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 몸은 중상을 입었기에, 결국에는 진퇴유곡에 빠져 문 밖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그 때의 나이, 24세였다.

  요시다 토시마로는 (요시다) 쇼인 문하의 기재奇才로, 이 때는 쵸슈 - 막부간을 조정하는 계책을 도모하며 영지로 돌아가던 도중, 쿄토에 머물렀다가 난을 만나 죽었다.

  그 날도, 쿄토 잔류자들의 책임자였던 노미 오리에가 여느 때처럼 제지하자, "아니, 금방 돌아오겠다." 라고 말한 후, 영주님으로부터 하사받은 코즈카小柄 등을 노미에게 맡기고 밖으로 나간 것이었다. 이 때 그는 직접 머리를 묶었는데, 상투가 세 번이나 끊어지는 것을 보고,


묶고 다시 또 묶어도 흑발이
헝클어져 물드는 세상을 어찌 할 것인가.

 
  라는 노래를 읊고서, 노미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 구절이 결국, 그의 사세구가 된 것이다.
 
  미야베 테이조는 난전 중에 이케다야에서 죽었다. 일설에 따르면, 진퇴유곡에 빠져 계단 아래에서 배를 갈라 죽었다고 한다. 향년 45세였다. 미야베는 히고 출신으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과는 친구 사이. 존왕양이파尊攘派의 쟁쟁한 일원으로, 동지들로부터 선배로 추앙받던 인물이었다. 쇼인은 과거에 미야베를 두고【 나라를 걱정하며, 군주에게 충성하는 한편으로 좋은 친구들과 교류하며, 신의가 있다. 그 인품은 친절하고 정이 두터우며, 굽힐 줄 모른다. 나는 옛부터 이 사람을 남다르다 생각했다. 】라고 평했다.

  산죠 사네토미三條実美도 미야베를 깊이 신뢰하였기에 (산죠의) 명을 받들어 그 사신으로서 사방을 오갔으며, 마키 이즈미真木和泉와 함께 나이와 수완 쌍방에서 으뜸가는 자로, 지사들 사이에서 가장 존중받던 인물이었다. 만약 살아남았더라면 그 자손은 후작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노미의 수기에 따르면 카츠라 코고로는 이케다야에서 타이슈 저택으로 도망쳐 들어가, 간신히 목숨을 건진 걸로 되어 있으나, 사실은 그와는 다른 것 같다. 

  그 날, 코고로는 한 번 이케다야를 찾아갔으나, 아직 동지들이 모두 도착한 게 아니었기에 쓰시마 번 저택을 찾아가 오시마 토모노죠大島友之丞와 오랫동안 이야기하던 중에, 시가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사람을 보내 동태를 살피게 하니, 신센구미가 이케다야로 쳐들어갔다고 한다. 카츠라가 칼을 들고 그 곳으로 달려가려고 하자, 오시마가 억지로 그를 뜯어말렸기에 그 날 밤의 난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나마 이 때, 키도 타카요시(木戶孝允 = 카츠라 코고로)가 온전히 살아남은 것은 쵸슈 번과, 나아가서는 메이지 유신에 있어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카츠라 코고로도 이 사건에 대해서 간단한 수기를 남기며,【 텐노 산天王山으로 출병한 건, 이 사건(이케다야) 때문이었다. 】 고 매듭짓고 있다.

  간결하긴 하지만, 역시나 정확히 판단하고 있다. 이케다야에서 저지른 막부 측의 폭거는, 쵸슈 번 무사들을 크게 격앙시켰다. 8월 18일 정변 이래, 인내에 인내를 거듭해 오던 쵸슈 번도 결국은 인내의 끈이 닳아버린 것이다. 결국 이는 쵸슈 군의 입경으로 이어져, 텐노 산으로 본거지를 전진시킨 이후 하마구리 문의 전투蛤御門の戦闘로 발전하였다.

  적어도 이케다야 사변은, 금문전쟁禁門戰爭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사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콘도 이사미의 최후

  그 외에도 이케다야에서 죽은 지사들 가운데는 오타카大高 형제 / 이시카와 쥰지로石川潤次郞 등, 재능있는 근황가들이 섞여 있었다. 그들의 시체는 모두, 체포에 나선 자들의 손에 의해 산죠나와테의 미엔사三縁寺 경내로 실려가, 그대로 방치되었다. 한창 무더울 시기였기에, 나중에는 이 시체가 누군지 판명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하여, 이케다야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불러 "이것이 미야베 씨, 이것은 오타카 씨" 하는 식으로 식별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케다야 사건을 계기로, 신센구미는 더욱 더 크게 비약하게 되었다. 대원도 부족해졌기에, 콘도는 가까운 친척에게 편지를 보내【 용사는 토고쿠(東國, 동일본) 에만 있다 생각합니다. 】고 말하며 기염을 토했다. 토고쿠 출신인 콘도로서는 당연한 이야기로, 어쩌면 이케다야 사변은 당시 상당히 경시되기 일쑤였던 칸토 남아의 의기를, 카미카타 사람들에게 시위한 것이라 해도 될 것이다.

  여기서부터 후시미 토바 전투伏見鳥羽の戰い까지가, 신센구미의 황금시대였다. 

  하마구리 문의 전투에서는, 빨간 색 바탕의 천에【 誠 】자를 그려넣은 깃발을 들고 선두에 서서, 아이즈의 호걸 하야시 콘스케林權助의 지휘하에서 분투한 바 있다. 

  토사 번土佐藩의 거물,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는 어느 날 콘도 이사미와 만났는데, 쇼지로는 즉각 "졸자는 귀공이 허리에 찬 물건이 몹시 싫소만." 라고 말했다. 이사미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 칼을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놓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아마 이 시기의 이야기이리라.

  그만큼 콘도 이사미의 이름은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사미는 단순한 테러리스트로서의 자신에 만족하지 않고, 정치적으로도 부쩍 슈고쇼쿠 / 쇼시다이 / 공경公卿들 사이에 끼어들었으나, 순역을 거스른 슬픔이여. 시대의 대세는 하루가 다르게 어긋나 갔다.

  후시미 토바의 전투는, 막부군에 치명상을 입힘과 동시에, 신센구미에게도 철저한 타격을 가했다. 대부대를 중심으로 삼은 근대식 포격전 앞에 1:1 전법은 소용이 없었고, 후장총元込め銃 앞에 코테츠의 이가 들어갈 길은 없었다.

  에도로 도망쳐 돌아간 콘도는 그 후 여러모로 획책해 보았으나, 한번 내리막길을 타자 하는 일마다 틀어져, 코슈甲州 카츠누마勝沼 전투에서 패배하고, 결국 시모우사下総 나가레야마流山에서 관군의 손에 붙들렸다.

  이 당시 정적政敵이었던 토사 번의 타니 모리베(谷守部, 타테키干城)는,

  "교활한 역적이 오랫동안 악을 행하였다. 뜻있는 무리들을 살해한 것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데, 이제 운이 다하여 사로잡히게 되었구나. 그 모습을 보면 삼척동자도 알아차릴 것을, 멍청하게도 목을 내밀고 찾아왔다. 늙은 너구리가 교묘하게 사람을 홀리게 해도, 결국 마지막에는 대낮에 나와 아이들에게 사로잡힌다는 고금의 익살스런 이야기가 있다. 정말로 세상이 다 알던 콘도 이사미. 병사 한 사람의 노고도 들이지 않고 포승줄에 묶이게 된 것도, 여우너구리의 씨가 마르게 된 것과 일맥상통하구나." 며 단호히 혹평하였다. 얼마나 콘도가 관군 측으로부터 미움받았는지를 알 수 있음과 동시에, 타니 타테키의 그릇이 작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인간이 내리막을 타면, 그 생각도 저열해진다. 코요 진무대甲陽鎭武隊 당시 영주가 된 양 행세를 하며, 고향으로 금의환향할 작정으로 벌인 치기와 같은 것들은, 왕년의 콘도 이사미와 비교할 때 다른 사람이 된 듯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콘도 이사미만의 결점이라 할 수 없다. 생각건대, 득의해 있을 때와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은, 쉽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콘도 이사미가 고료카쿠(五稜郭, 역주 : 홋카이도 하코다테 시에 지어진 별 모양의 근대요새. 토쿠가와 막부의 잔여세력들이 마지막으로 항전한 곳이다. 콘도를 보좌했던 신센구미의 부장, 히지카타 토시조는 이 곳의 전투에서 전사했다)에서 전사하였더라면, 일생을 깨끗이 끝맺을 수 있었으리란 건, 지당한 말이다.

  사나다 유키무라真田幸村나 고토 모토츠구(後藤基次, 마타베에又兵衛), 키무라 시게나리木村重成 같이 이전 시대를 위해 목숨바친 사람들이 토쿠가와 시대에 민간영웅이 되었던 것처럼, 콘도 이사미가 현대의 민간영웅이 된 건, 유쾌한 일이다. 대중이라는 자들은, 어용역사의 왜곡을 자연스럽게 바로잡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콘도 이사미의 인기는 영화와 대중문예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이 두 가지가 없었더라면, 지금만큼 유명해지진 않았을 것이다. 지하에 있는 콘도 이사미도, 이 점에 대해서는 쓴웃음을 짓고 있으리라.          

        

덧글

  • 레이오트 2015/10/05 21:34 # 답글

    1. 신선조는 막말로 수구꼴통 정치깡패 취급만 받고 살았을 팔자였는데 바람의 검심, 박앵귀와 같은 정도가 다르지만 신선조를 제대로 미화한 서브컬쳐의 특혜를 제대로 받은 조직이지요.

    2. 대중매체의 영향으로 신선조는 발도 돌격만을 고집한 조직으로 나오지만 사실은 많은 수의 총병을 운용했다고 합니다.

    3. 발도 돌격 이야기를 해서 그런데 이 발도 돌격, 특히 서남전쟁에서의 발도 돌격은 신정부군 병사들 상대로 엄청난 사기저하를 유발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게 당시 신정부군 병사는 거의 대부분 평민 출신이었고, 이들의 사무라이, 특히 발도 돌격하는 사무라이는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거든요. 그로인해 신정부군은 병력과 화력 우세에도 후퇴하는 추태를 보였고, 이에 대응해 따로 발도 돌격대를 조직했다고 하지요.
  • BigTrain 2015/10/06 09:09 # 답글

    09년 쯤 출간됐던 '최후의 무사 신센구미'를 보면 만화나 소설로 잡힌 신센구미의 이미지와는 좀 다른 모습이 꽤 나오더군요.

    1. 도바 후시미 전투 이후 총기를 주무장으로 삼는다던가. 이건 '칼에 지다'에서도 하코다테에서의 최종결전에서 사격전을 펼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걸 보면 대중문화 쪽에서도 알려지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2. 곤도 이사미의 전횡에 반발한 나가쿠라 신파치 이하 간부들이 상부인 아이즈번에 곤도를 탄핵한다던가. 지금 책이 제 옆에 없어서 확인은 안되지만 여기에 오키타 소지도 가담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사실 신센구미 붕괴 과정에서 기존 간부들 중 하코다테까지 따라간 간부들은 히지카타 외에는 거의 없죠. 병사한 오키타 소지는 빼더라도 나가쿠라 신파치, 사이토 하지메, 하라다 사노스케 등 주요 간부 세 명이 모두 중도이탈을 했는데, 아무래도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칼에 죽고 의리에 죽는 간지나는 칼잡이 모임하고는 좀 달랐을 것 같다는 생각이 요즘 듭니다.
  • 3인칭관찰자 2015/10/06 18:09 #

    《최후의 무사 신센구미》제때 구입하지 않은 걸 후회하는 책입니다. ㅜㅜ

    1. 신센구미가 처음으로 총기 훈련을 시작한 건 의외로 이른 시기(1864년)이긴 한데, 아무래도 쿄토 시내를 순찰하는 그들 업무적 특성상 훈련을 받아도 그걸 써먹어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대원들 모두가 검술이나 창술을 배운 사람이다보니 굳이 '무사답지 못한' 무기인 총이나 대포를 다루기를 꺼렸을 것 같기도 하고요. 도바 후시미 이후는 사실상 대세가 결정난 상황이었으니(...)

    2. 그 탄핵에 나가쿠라, 사이토, 하라다 세 사람은 분명히 가담한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몇 명이 더 있었는데, 그건 기억나지 않지만, 오키타는 가담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천연이심류 인맥(콘도 / 히지카타 / 오키타 / 이노우에 겐자부로 등등)들 간에는 눈에 띄는 트러블이 없었는데, 같은 지역에서 자란 동문이라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읽은 책에서 "신센구미가 탄생한 이래 멸망할 때까지 숱한 적을 처치하는 한편으로, 내부 숙청을 통해 자기 조직 내에서도 적지 않은 대원들을 죽였다. 일본 학생운동 당시의 우치게바를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는 글귀를 봤는데. 미디어에서 띄워주면서 많이 미화되었던 신센구미의 치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BigTrain 2015/10/06 18:18 #

    오키타 소지가 탄핵에 끼지 않았다면 정황만 봐서는 같은 창립 멤버들 사이에서도 신센구미 내 천연이심류 계파 vs 외부 출신 간부들 간의 분쟁이 꽤 심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야마나미 케이스케는 도주했다가 할복했고, 나머지 세 명은 신센구미 붕괴 와중에 중도이탈했으니..

    안그래도 내부 숙청도 활발했던 조직이니 신센구미 내 권력 갈등에 주목하는 작품도 나온다면 재미있을 것 같네요. 시바 료타로의 신센구미 혈풍록도 창립멤버간 갈등은 그리지 않았으니..
  • 3인칭관찰자 2015/10/06 18:49 #

    그러고 보니.. 끝마무리가 좋은 외부 출신 창단 멤버가 없군요. 한 명도요.(토도 헤이스케도 고료에지 가입했다가 살해당했으니) 아무리 시작을 같이 했더라도 그들은 결국 동문이 아니어서였을까요(...)

    《신센구미 혈풍록》과 마찬가지로 시바 씨의 작품인《타올라라 검》에서는 교양인적 속성을 가지고 콘도에게 접근하여 영향력을 늘리려던 조직 내 사람들이 꼭 토시조와 갈등을 빚고 부딪히는 걸로 그려놓고, 그들 대부분이 안 좋은 최후를 맞은 게 기억나네요. 그리고 (시바 씨의 소설에서는) 나가쿠라 / 하라다 / 사이토 같은 외부 간부와 콘도와의 대립은 최소한도로 그려지거나 생략되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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