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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쿠치 칸] 신센구미新撰組와 이케다야 습격 (1) 아오조라문고



  이 글은 패전 이전 일본의 유명 대중소설 작가로 출판사 분게이슌쥬文藝春秋의 창립자 겸 초대 사장이자, (고인이 된 친구들의 이름을 따) 아쿠타가와 상芥川賞 / 나오키 상直木賞이라는 일본의 저명한 문학상을 만들어내기도 한 키쿠치 칸菊池寬 씨의 저서《대중유신사독본大衆維新史読本》7장을 번역한 글입니다.



  신센구미 결성

  신센구미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토쿠가와) 막부가 새로이 모집한 로시단(浪士団, 역주 : 특정한 번藩에 속하지 않아, 봉록을 받지 못하는 무사 계층이나 무사 지망생들의 집단)이 이에모치家茂 쇼군을 경호한다는 명목으로 에도를 출발한 건 분큐 3년(1863) 2월 8일이었다.

  총 인원은 약 240명. 23일에는 쿄토 교외에 있는 미부壬生에 도착했는데 이들을 신쵸구미新徴組라 부른다. 대장격이 되는 인물은 쇼나이庄內 지방의 키요카와 하치로清河八郎로, 체구가 날렵하게 뻗은 잘 생긴 호남아. 안광이 예리하여, 남을 꿰뚫어보는 듯한 남자였다고 전해진다.

  막부는 처음에, 로시들의 인원을 50여 명 정도로 묶을 방침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풍운을 바라고 있던 천하의 로시들이 '하타모토(旗本, 역주 : 쇼군을 섬기는 막부의 직속 무사)쯤은 될 수 있겠지.' 하는 심산을 가지고 속속 모여들었다. 코슈甲州의 협객(역주 : 건달 내지 깡패.. 정도로 이해하시면 되겠네요) 유텐 센노스케祐天仙之助가 꼬봉(仔分, 역주 : 표준어 아닌 건 알고 있습니다만, 꼬봉이라고 하는 게 조금 더 실감나지 않을까 해서 부하 대신 꼬봉이라 적었습니다) 20명을 데리고 가담하였고, 그 즉시 5번대의 오장伍長으로 채용된 건 등을 살펴보면, 이 로시단의 정체란 것도 대략 견적이 나온다.

  이들은 쿄토에 머무른 약 20일 만에 분열되어, 세리자와芹沢 / 콘도近藤 등 13명이 키요카와에게 반기를 들고, 숙소로 쓰고 있던 야기 겐노죠八木源之丞의 집 앞에【 미부 마을 로시 주둔소 】간판을 내건 것이, 흔히 말하는【 신센구미 】의 기원이 되었다.

  그 대원 나가쿠라 신파치永倉新八, 즉 스기무라 요시에杉村義衛 옹(타이쇼 4년까지 생존해 있었다)이 이야기하신 걸 기록한 바에 따르면, 총 인원 13명으로 시작한 신센구미도 처음에는 정말로 빈곤했다. 3월에 부대가 만들어져, 5월이 되었는데도 아직 솜이 들어간 옷을 입고 있는 자가 많았다. 이리저리 궁리한 끝에, 세리자와가 앞장서 8명의 로시들이 직접 오사카까지 행차, 코우노이케(鴻池, 오사카의 거상 가문)를 위협하여 200냥을 빌려 돌아왔다. 허울 좋은 폭력단이었다.

  이 돈으로 삼베로 만든 하오리에다 문양이 새겨진 홑옷, 코쿠라하카마小倉の袴를 새로 짓게 하여, 에도에서 온 이래 처음으로 입고 있던 옷을 벗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하오리라는 것도 대단하여, 츄신구라忠臣蔵의 의사들처럼 소매에 가로줄무늬 모양을 내어 남색으로 물들였다.   

  이것이 당시 신센구미의 제복이 되었고, 훗날 이케다야 습격 때에도 대원 일동은 이 하오리를 입고 분전했던 것이다.

  신센구미가 결성된 지 6개월이 지났을 때, 콘도 이사미近藤勇 / 히지카타 토시조土方歳三는 그 첩의 집을 습격하여 자신들의 대장인 세리자와 카모芹沢鴨를 살해했다. 

  세리자와는 미토水戸의 하급무사郷士로, 본명은 시모무라 츠쿠지下村継次. 미토 텐구도水戸天狗党의 생존자였다. 텐구도에 있을 때, 이타코의 여관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다고 하여, 부하 세 명을 집합시켜 목을 베어버리거나 / 카시마 신궁鹿島神宮에 참배하였을 때, 하이덴(拝殿, 역주 : 신사에서 예배하기 위해 본전 앞에 지은 건물)에 있던 북이 너무 커서 거슬린다고 말하며 쇠부채를 마구 휘둘러 북을 때려부쉈다고 할 정도로 난폭한 자였다. 

  세리자와가 죽은 후의 신센구미는 당연히 콘도와 히지카타의 천하가 되어, 막부의 후원과 쿄토슈고쇼쿠京都守護職 마츠다이라 카타모리松平容保의 신뢰를 받으며, 부대의 기세는 하루가 다르게 등등해져 쿄토에서 획책하는 근황지사들에 맞서, 은연한 일대 적국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콘도 이사미

  신센구미 대장 콘도 이사미라고 하면, 검극剣劇이나 대중소설에 수백 번 넘게 출연한 막부 말기 이야기의 히어로이나, 그 실질에 대해서는, 폭력단 단장 이상으론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검술에 능한 반동적 무사라 일컬어지는 정도이며, 지극히 호의적으로 보는 사람도 "삼대가 은총을 입은 하타모토 8만 기가 쓰잘데기 없었던 데 비해, 산타마三多摩의 토호 출신으로 막부를 위해 사력을 다한 것은 훌륭하다." 고 평가하는 정도가 고작이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는 콘도 그 사람의 전모를 모두 드러낸 게 아니기에, 그에게 있어선 안타까울 따름이다.

  콘도의 형사刑死는, 게이오 4년(1868) 4월 25일에 이루어졌는데, 그 해 6월 6일 발간된《츄가이 신문中外新聞》에서는【 윤 4월 8일, 前 신센구미 대장 콘도 이사미라는 자의 수급이 칸토에서 올라와, 산죠 강변三條河原에 효수되었다. 그 몸은 이미 주륙誅戮 당하였기에 행적의 옳고 그름을 논하기보다는, 그 용맹을 놓고 "아까운 장부였다" 고 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고 적혀 있다. 이 무렵에 역적군賊軍이 되어 사형에 처해진 자는 오늘날의 공산당 피고 이상으로 간주되었기에, 출판물에 이 정도 기록한 것만 해도 용이한 일이 아니다. 역적군에 속하였으나 그의 평판이 당시엔 대단히 좋았다는 건, 이 기사를 봐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사미가 태어난 때는 텐보 5년(1834). 콘도 슈스케의 양자가 되어, 신센구미에 가입하기 이전까지는 검술도 학문도, 딱히 뛰어났다고 할 수 있는 경지는 아니었다. 신쵸구미에서 빠져나왔을 때부터 이사미는 점차 두각을 드러냈다. 아이즈 번会津의 스즈키 탄게鈴木丹下가 쓴《소요일기騷擾日記》에 따르면,【 그 중에서 콘도 이사미라는 자는 지용을 겸비하여, 무슨 일을 의논해도 지체 없이 대답한다. 】고 적혀 있어, 이 무렵부터 "지용겸비" 와 같은 찬사가 바쳐지고 있다.

  그는 토슈東州란 호를 쓰며, 상당히 멋진 서예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학문은 대단한 건 없었으나, 당시의 검객으로선 남에게 뒤쳐지지 않을 정도의 소양은 갖추었을 것이다.

  그 정치상의 주의에 대해서는, 그의 상소문에【 원래 우리들은 진충보국을 하려 하는 지사들로, 이번 부르심을 받고 지난 2월 멀리서 교토로 올라와, 황명을 받들어 외적 오랑캐를 몰아내고 배척하는 영단이 내려지리라 믿고 교토에 머물렀습니다. 】(분큐 3년 10월 15일 상소) 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기온祇園 이치레키루一力楼에서 아이즈 히고노카미(会津肥後守, 마츠다이라 카타모리)의 초청으로, 삿(薩, 사츠마 시마즈 가문) / 토(土, 토사 야마우치 가문) / 게이(兿, 아키 아사노 가문) / 아이(会, 아이즈 마츠다이라 가문) 등 각 번의 중진들이 열석한 모임에서도 그는 당당히 자기 주장을 피력하며, "곰곰히 생각하여 어리석은 견해를 말씀드리자면, 지금까지는 쵸슈 번長藩의 양이攘夷가 있을지언정, 그걸 진정한 양이라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이리 된 이상 공무합체公武合体로 똘똘 뭉쳐, 이에 기반하여 막부가 단연코 양이를 지시하신다면 자연히 국내도 안전해지리라 봅니다." (콘도의 편지 중 한 구절) 고 의견을 개진하였다고 한다.

  콘도의 의견은 공무합체. 즉 공고한 거국일체 내각 아래 양이(역주 : 서양 오랑캐를 무찌름)를 단행해야 한다는. 근황양이 / 공무합체설이었다. 그는 이 주장을 위해 한 목숨 바쳐 나라에 보답하겠다며 분기해 있었기에, 신센구미가 단순한 비상경찰처럼 간주되고 있었던 데에는 크게 불만이었던 듯하다.    

【 저희들은 작년 이래로, 진충보국尽忠報国의 뜻을 품고 모집에 응하여 즉각 부름을 받고 상경, 지금까지 체재하고 있지만서도. (쿄토) 시내를 순찰하기 위해 모집에 응한 건 아닙니다. 】(겐지 원년 5월 3일 상소문의 한 구절) 고 하였다. 그에게도 아직 근심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시세를 걱정하고, 시세를 알아가는 와중에 입장이 달라졌긴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사츠마 / 쵸슈의 지사들에게 꿇릴 것은 없었다.

  특히 콘도에게 있어 영광이라 할 수 있는 건, 궁중 제일의 호걸이셨던 쿠니노미야 아사히코 신노(久邇宮朝彦親王, 역주 : 유신 이전 나카가와노미야中川宮라 불리며 공무합체파, 그리고 막부 옹호파의 거물로서 활동하였기에,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계에서 축출당했다)와의 관계이다. 신노의 일기에는 콘도의 이름이 확인되며, 케이오 3년(1867) 9월 13일 항목에는,【 막부의 수완가辣腕家 하라 이치노신(原市之進, 역주 : 최후의 쇼군 토쿠가와 요시노부의 심복, 수완가 / 모략가로 알려졌으며, 그 해 8월 14일날 막부 내부의 보수파에게 암살당했다)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콘도이다. 내가 직접 콘도를 등용하고 싶다. 】고, 황송하게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폭력단의 수령이라기보다, 시류의 파도를 타는 데 실패한 지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덧글

  • 레이오트 2015/10/03 05:11 # 답글

    1. 신센구미는 일본 근현대사에서 이렇게 그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무장집단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신화 그 자체이지요.

    2. 한국의 경우에는 바람의 검심에서 미부의 늑대는 길들일 수 없다며 아돌이라는 이름의 찌르기 검술을 구사하는 경찰 사이토 하지메 덕분에 많이 알려지게 되었죠. 저도 그렇게 알게된 사람 중 한 명입니다.

    3. 사이토 하지메는 이런 요절한 풍운아들의 집단이라는 이미지의 신선조 출신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48세로 경찰 밀정 일을 그만두고 여학교 회계 & 서기라는 정말 평화로운 일을 했다고 하며 1915년 세상을 떠났습니다(향년 7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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