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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투 오다 군단》키타바타케 가문의 멸망 (下) ┣ 激鬪 織田軍團 (完)



  이 글은 (舊)《歷史群像シリ-ズ 20 激鬪 織田軍團》의 P. 94 ~ 97페이지에 수록된,《노부나가와 지정학》제 4화로, 일본 남북조 시대 이후 이세伊勢 남부 지역에 뿌리를 박고 세력을 떨치던 키타바타케 가문北畠家이, 신흥 세력 오다 노부나가 앞에 어떻게 패배하였고, 또 어떻게 농락당하며 멸망당했는가를 다룬 글입니다. 필자는 건축사학자 미아카미 시게타카宮上茂隆 씨입니다.


  코쿠시囯司 노부카츠, 타마루 성田丸城에 입성하다

  챠센마루는 후나에船江의 야쿠시사藥師寺에 있다가, 겐키 2년(1571) 여름, 키타바타케 토모노리北畠具敎의 다섯째 딸, 즉 고혼죠(御本所, 토모후사北畠具房)의 여동생과 후나에 성船江城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오코치 성大河內城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다음 해, 노부타다信忠 / 노부타카信孝와 함께 성인식을 치르고, 키타바타케 산스케 토모토요北畠三介具豊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이 무렵 노부나가는 나가시마 잇코잇키長島一向一揆 토벌을 반복한 끝에 텐쇼 2년(1574) 9월에는 쿠키 수군九鬼水軍까지 동원하여 신도들을 섬멸하였다. 토모토요도 이 전투에 참가했다. 

  텐쇼 3년(1575) 6월, 키타바타케 토모토요는 정오위하 사코노에콘노츄쇼左近衛權中將에 서임하여, 같은 달 23일에는 토모후사로부터 가문을 물려받아 고혼죠=코쿠시를 자처하면서, 바로 다음 날, 타마루 성으로 옮겨갔다. 그 해 겨울에 성 축조가 완료된 후 옮겨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토모토요는, 타마루 성이 이름난 성名城이라고 하여 이 곳을 탐내어, 성주였던 타마루 나오오키(田丸直息, 키타바타케 일가)는 이를 거스르지 않고 성을 양도한 후, 자신은 근처에 있는 이와데 성岩出城으로 옮겨갔다. 그의 아버지 이하 일가 사람들은 이치노세一の瀨로 물러나, 이치노세 고쇼라고 불렸다. 토모토요의 의붓아버지 토모후사만이 그대로 타마루 성에 잔류했다. 토모토요가 노부카츠信雄, 토모후사가 노부오키(信意, 역주 : 오류이다. 기실 토모후사는 개명하지 않았고, 토모토요만 노부오키로 개명하였다. 훗날 토모토요=노부오키는 노부카츠信雄로 다시 개명한다) 라고 이름을 고친 것이 이 무렵이었다고 추측된다. 이는 오다 가문이 키타바타케 가문을 탈취하였으며, 오다 정권이 남부 이세를 지배하에 두었다는 증표이기도 하였다.

  노부카츠는 타마루 성의 중심부에 석조공사를 하여 개조했다. 그 지휘를 맡은 것은 노부카츠의 후견인으로 남부 이세의 행정관을 맡았던 오다 카몬노스케(織田掃部助, 츠다 카즈야스津田一安)였으나, 그 권세를 시기한 자들의 참언에 의해, 노부카츠는 텐쇼 4년(1576) 말에 건설 현장에 있던 그를 살해하게 했다.

  이 시기 축조가 이루어진 타마루 성의 석루는 지금도 남아있다. 텐슈다이天主台도 그대로 남아 있다. 텐슈의 복원공사도 예정되어 있으며 본인은 이 연구조사와 설계를 맡았는데,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그 텐슈는 코쿠시 노부카츠가 거주하던 어전으로, 즉 노송나무 껍질로 지붕을 인檜皮葺き 텐슈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즉, 타마루 성 텐슈는 키타바타케 측에서 노부카츠에게 헌납한 어전이었다는 것이다. 아즈치 성安土城의 텐슈와 동시기에 조영된 것이나, 형태는 완전히 다르다.


  키타바타케 일족을 멸살하다

  토모노리는, 노부나가와 화친한 후 출가하여, 타케 군 미츠세(三瀨, 오다이쵸大台町)에 은거하여 있었으나, 코쿠시 가문을 빼앗긴 데 원한을 품고 은밀히 카이甲斐의 타케다 신겐武田信玄과 내통하여, 노부나가를 토멸하고 키타바타케 가문을 재건하려고 도모하고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는, 오다의 지휘하에 들어간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던 가신들, 무사들에게도 전염되었다.

  텐쇼 4년(1576) 여름, 쿠마노熊野 신구 성주新宮城主 호리노우치 아와노카미 우지요시堀內安房守氏吉가 쿠마노 군을 동원하여 봉기, 오다 편에 선 키이 나가시마 성紀伊長島城을 육지 / 수상의 전투에서 우려뺐다. 노부나가는 이를 미츠케 고쇼 토모노리의 책동으로 간주하고, 오다 카몬노스케에게 토모노리 부자父子 3명 + 토모노리의 사위인 사카나이 효고노카미坂內兵庫頭 부자를 죽여버리라고 명령했다. 노부카츠는 오코치 고쇼까지 포함하여 총 6명을 해치우기로 하고, 살해 작업은 11월 25일, 일거에 실행되었다.

  그날 아침 미츠세 저택으로 향한 토벌자들은 타키가와 사부로베에(滝川三郞兵衛, 카츠토시雄利)와 토모노리의 옛 신하들. 대면한 자리에서, 방심한 토모노리를 창으로 찔렀다. 토모노리는 검성劍聖 츠카하라 보쿠덴塚原卜伝에게서 검술의 극의極意를 전수받았다고 알려진 검의 달인이었으나, 머릿수에는 당해낼 수가 없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살해당했다.  

  한편, 타마루 성에서는 토모노리의 차남 나가노 지로 토모후지長野次郞具藤 / 3남 시키부쇼유 후사카네式部少輔房兼 / 토모노리의 사위 사카나이 효부노스케들이 노부카츠의 연회에 초청받아 갔다가, 종 소리를 신호로 히오키 다이젠노스케日置大膳亮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리고 병에 걸려 있던 오코치 고쇼는, 문병을 가장하여 찾아온 츠게 사부로베에(柘植三郞兵衛, 야스시게保重)들에게 살해당했다. 이 때, 키타바타케 일족들 중에서 이들 외에 살해당한 자는,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해 13명에 달했다고 한다. 키타바타케 일족 중에서 난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노부카츠의 의붓아버지 노부오키(토모후사)와 이와데 성으로 물러난 타마루 나카츠카사다유 나오오키 뿐이었다.

  미츠세 / 오코치 / 타마루 성에서 탈출한 키타바타케의 후다이(譜代, 그 가문을 대대로 섬겨온 신하들) 가신들은, 산세 험한 타케多氣의 키리야마 산성霧山城에 집결했다. 키타바타케 누대의 은혜에 보답할 때는 이 때 뿐이라며, 이세 / 이가伊賀 / 야마토大和 / 키이 지방 등에서 달려온 무사들도 가담, 성장城將 키타바타케 마사나리北畠政成 아래, 성문을 굳게 닫고 / 울타리를 설치하고 / 골짜기, 성채마다 무사들을 배치하여, 오다 군을 요격할 견고한 방위체제를 정비했다. 이에 맞서 노부카츠는, 오다 군에 12월 2일 총공격에 나설 것을 명령했다. 격전이 벌어진 끝에, 키타바타케 일족과 가신들은 자살했다.

  오늘날, 저택이 있던 터에는 키타바타케 신사가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아름다운 석조정원(사적으로 지정됨)이 그 때 그대로 남아 있어, 키타바타케 씨의 문화를 실감하게 한다.

  토모노리의 동생은 나라 코후쿠사興福寺의 벳토別當, 토몬인 승정東門院僧正이었는데, 미츠세의 변三瀨の變을 알고서는 환속하여 토모치카具親란 이름으로 텐쇼 5년(1577), 키타바타케의 은혜를 입은 무사들을 소집하여 거병했으나, 노부카츠는 이와데 성의 타마루 나카츠카사다유 / 타키가와들에게 이를 토벌하게 하여, 패배한 토모치카는 아키安藝의 모리 씨毛利氏를 의지해 도망쳤다.

  텐쇼 8년(1580), 노부카츠가 있던 타마루 성의 혼마루本丸 / 니노마루二の丸가 남김없이 전소되었다. 노부카츠가 재무행정관으로 발탁한 도보(同朋, 승려의 차림을 한 측근) 켄치玄智라는 자가 금은을 횡령하고, 이것이 발각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염초 창고에 불을 지른 것이었다. 격노한 노부카츠는 켄치를 붙잡아, 그 목을 톱질하여 처형하도록 했다.

  이 사건 이후 노부카츠는 마찬가지로 키타바타케의 성이었던 호소쿠비(마츠자카 시 동북쪽에 위치한 해안가)에 금박을 입힌 기와로 장식한 텐슈를 축조하고, 이 곳을 마츠가시마松ケ島란 이름으로 바꾼 후 본거지로 삼았다. 이와 마찬가지 시기에 노부타카信孝는 칸베 성神戶城 / 노부카네信包는 츠 성津城에 각자 텐슈를 축조했다.

  이렇게 하여 이세 지방은 오다 가문에 의해 평정되었으나, 텐쇼 10년(1582) 혼노사의 변이 일어났다. 이 때 토모치카는, 이세로 돌아와 다시 거병하였으나, 노부카츠의 군대에게 패배하여 이가 지방으로 도망갔다. 토모노리의 옛 신하 20여 명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 군에 가담,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戰い에서 히데요시 군과 싸워 죽음을 맞았다.

  이와데 성에 있던 타마루 나카츠카사다유는, 노부카츠가 타마루 성에서 퇴성한 후에는 이세 남부의 행정관을 맡았으나, 노부카츠가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결탁하여 히데요시와 대립했을 때는, 세키 나가토(關長門, 카즈마사一政) / 야마토大和 지방 우다 3인중宇陀三人衆과 함께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鄕의 요리키가 되어 활약하여, 우지사토가 이세 남부 12만 석을 하사받아 마츠가시마에 입성했을 때, 타마루 성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세키와 타마루는 오우미近江 히노 성주日野城主였던 가모 카타히데蒲生賢秀의 딸들을 아내로 두고 있었기에 우지사토에게는 매제들이었기 때문이다.

  텐쇼 18년(1590) 우지사토가 토요토미 정권의 오슈奧州 감시역으로써 아이즈會津 40만 석을 받아 와카마츠 성주若松城主로 영전했을 때, 타마루 나오마사田丸直昌와 세키 나가토는 우지사토를 따라, 각각 스카가와 성주須賀川城主 / 시라카와 성주白川城主가 되었다. 두 성 모두 과거 남조 측의 성들이다. 90만 석으로 가봉된 우지사토는 와카마츠 성에다 오사카 성 다음 가는 규모의, 유니크한 형태를 한 텐슈를 축조했는데, 이는 타마루 성의 텐슈를 원형으로 삼아 크기를 늘린 것이었다. 우지사토는, 과거 이 땅에서 활약했던 젊은 무사 키타바타케 아키이에北畠顯家와 자신을 겹쳐 보았을 것이다. 키타바타케는 이세에서 멸망했으나, 그 건축은 오슈 지방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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