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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투 오다 군단》키타바타케 가문의 멸망 (上) ┣ 激鬪 織田軍團 (完)



  이 글은 (舊)《歷史群像シリ-ズ 20 激鬪 織田軍團》의 P. 94 ~ 97페이지에 수록된,《노부나가와 지정학》제 4화로, 일본 남북조 시대 이후 이세伊勢 남부 지역에 뿌리를 박고 세력을 떨치던 키타바타케 가문北畠家이, 신흥 세력 오다 노부나가 앞에 어떻게 패배하였고, 또 어떻게 농락당하며 멸망당했는가를 다룬 글입니다. 필자는 건축사학자 미아카미 시게타카宮上茂隆 씨입니다.


  노부나가는 이세 지방伊勢國에 대해 각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걸로 보인다. 웅지를 품고 있던 노부나가의 아버지 노부히데信秀는 식년천궁이 100년 이상 중단되었던 이세 신궁을 위하여, 텐분 9년(1540) 이세 외궁의 가전假殿 수리비용을 기부한 바 있다. 노부나가는 이세를 지배하에 두기 위해 두 명의 아들, 남동생, 그리고 일족들 중 4명을 파견하였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이세를 공략하려고 했던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하나는 노부히데가 본거지로 삼고 있던 오와리 지방 츠시마津島에서 키소 강을 사이에 두고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한 곳이 이세 북부 지방이었기 떄문이리라. 그리고 이세 지방은 고대부터 일본 동부東國로 가는 입구로, 당시에도 이세 만 수운은 번성하여 이세의 여러 항구와 미카와 만이 두툼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이세에서 서쪽으로 스즈카 산맥鈴鹿山脈을 넘어 오우미近江 지방을 거치면 쿄토로 갈 수 있었으며, 이가伊賀 지방을 거쳐 야마토大和 / 키이紀伊 지방으로 통하는 가도도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오다 가문이 이세에 집착한 데는, 그 선조가 에치젠越前 지방 오다츠루기 신사織田劍神社의 신관神主이었다는 점, 그리고 노부나가가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淸盛의 자손이라고 자칭하고 있었던 점들도 연관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이세 지방은 헤이케(平家, 타이라 씨)의 발상지였기 떄문이다.  


  남조 이래의 명가 키타바타케 씨
 
  이세는, 카마쿠라 시대 막부의 싯켄執權이었던 호죠 씨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겐코 3년(1333), 고다이고 텐노後醍醐天皇는 카마쿠라 막부를 쓰러뜨리고 켄무建武 친정 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3년 만에 붕괴, 텐노는 요시노吉野로 도망갔고,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는 쿄토에서 코메이 텐노光明天皇를 옹립하였다. 그 이후 60년 간 이 상태가 지속되었는데, 이를 남북조 시대라 부른다. 요시노의 텐노와 쿄토의 아시카가 씨 사이에서 전국적으로 격렬한 전란이 반복된 끝에, 막부를 연 아시카가 씨가 패권을 확립했다.

  그 동안 남조를 떠받친 군사세력의 중심은, 무라카미 텐노村上天皇를 뿌리로 둔 귀족 가문인 키타바타케 씨北畠氏였다. 고다이고 텐노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키타바타케 치카후사北畠親房는, 요시노에서부터 이세 남부 일대까지를 영유하며, 남조의 기점을 확보하였다. 그 중심지로서 축성된 것이 타마루 성(田丸城, 타마키쵸玉城町)이었다. 이 곳은 미야카와 강宮川의 북쪽 강변에 위치하여 남쪽 강변의 이세 외궁과, 강 입구에 위치한 오미나토大湊를 장악하기가 유리했고, 요시노쿠마노 가도와, 나라 지방으로 가는 하세 가도의 분기점에 위치한 요충지였다.

  치카후사와 장남 아키이에顯家는 오미나토에서 배를 타고 오슈奧州로 건너가, 아키이에는 무츠陸奧 지방 코쿠시國司에 서임하여 료젠 성(靈山城, 후쿠시마 현 료젠쵸靈山町 오이시大石 / 소마 시相馬市 타마노玉野)에 코쿠시 저택을 짓고 이곳에 웅거하여, 다테伊達 / 유우키 씨結城氏 등을 아군으로 거느리며 일본 동부에서 남조의 세력을 신장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치카후사의 차남 아키요시顯能는 고다이고 텐노로부터 이세 코쿠시로 임명받아, 이후 그 자손들이 대대로 이세 코쿠시를 칭했다. 타마루 성이 막부군의 공격을 받아 함락된 이후에는, 본거지를 타케(多氣, 미스기 마을美杉村)에 있는 키리야마 산성霧山城으로 옮겼다. 그 곳은 야마토의 우다 / 요시노로 이어지는 가도를 장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3대 코쿠시 미츠마사滿雅는 남북조가 통일된 후, 남조 편에 섰던 황자들의 처우를 동정하여 아사카 성阿坂城에서 거병했다가 패하고 전사했으나, 그 동생 아키마사顯雅는 막부로부터 이치시一志 / 이이다카 군飯高郡 지배를 인정받아, 이후로는 쇼군 가문을 지탱하는 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8대 코쿠시 토모노리具敎는 문무에 능한 명장으로, 키이와 이세 북부로까지 영향력을 넓혔다.


  북 이세의 세 가문을 계략으로 포섭하다

  노부나가는, 에이로쿠 10년(1567) 봄부터 북 이세 침공을 개시했다. 선봉으로 우선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를 파견하여 쿠와나桑名 / 인베員弁 2군을 탈취하고, 8월에는 미노 사이토 씨의 이나바 산성을 함락시킨 여세를 몰아, 직접 오와리 / 미노 지방의 군대를 이끌고 쿠스 성楠城을 함락시킨 후, 칸베 씨神戶氏의 가로인 야마지 탄죠山路彈正가 지키는 타카오카 성(高岡城, 스즈카 시鈴鹿市)을 공격했다.

  다음 해인 에이로쿠 11년(1568)에도 다시 타카오카 성을 포위하였으나 함락되지 않았기에, 노부나가는 3남인 산시치마루(三七丸,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를 칸베 가문의 양자로 들여보내고 화친했다. 그리고, 아노하나오카 성安濃花岡城에 있던 나가노 지로 토모후지(長野次郞具藤, 토모노리의 차남)를 내쫒은 후, 나가노 가문에도 자신의 동생 산쥬로 노부카네信兼를 들여보냈으며, 츠 성津城에서는 일가인 오다(츠다津田) 카몬노스케 노부카네(掃部助信包, 역주 : 츠다 카몬노스케란 노부카네가 아니라,《코요군칸甲陽軍鑑》에서 오다 타다히로織田忠寬란 이름으로 등장하는 츠다 카즈야스津田一安일 확률이 높을 듯하다)를 입성시켰다. 카메야마 성주龜山城主 세키 모리노부關盛信도 항복하여, 북 이세의 세 가문 모두가 노부나가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기후로 돌아간 노부나가는, 7월에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맞아들여 8월, 오우미 지방 슈고 사사키 롯가쿠 씨佐佐木六角氏를 끌어내리고 입경하여, 요시아키를 쇼군으로 앉혔다. 에이로쿠 12년(1569) 2월에는 쇼군의 거처가 될 니죠 성二條城 공사를 개시, 8월에는 코츠쿠리 성주木造城主 키타바타케 토모마사北畠具政가 코쿠시 토모노리를 배반하고 노부나가와 내통한 것을 기회로 삼아, 7만 대군을 이끌고 이세 남부를 침공했다.


  오코치 성大河内城에서 키타바타케 씨를 격파하다

  이보다 앞서서 이세 코쿠시 겸 츄나곤中納言 토모노리는, 오다 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이세 만에 면한 호소쿠비(細頸, 마츠가시마松ケ島)에 어전을 짓고, 오코치 성大河內城을 수축하여 타케에 있던 본거지에서 옮겨가, 장남 토모후사具房에게 가문을 물려주고 오혼죠御本所라 부르게 하고, 자신은 오고쇼大御所라 칭했다.

《신쵸코우키信長公記》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8월 20일에 출진, 23일에 코츠쿠리 성에 도착하여, 비를 피해 머무른 후, 26일에는 키노시타 토키치로(木下藤吉郞, 역주 : 훗날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선봉에 서서 아사카 성을 공격, 성문을 열게 했다. 노부나가는 작은 성들에 개의치 않고 코쿠시 부자가 농성한 오코치 성으로 향하여 오코치 성 동쪽의 산에 진을 치고, 그날 밤 우선 성하 마을을 박살내고 방화한 후, 28일날 사방의 산들을 달리면서 지형을 숙지하고는, 포진을 결정했다.

  남쪽 산에는 오다 코즈케노카미(織田上野守, 노부카네) / 타키가와 사콘(滝川左近, 카즈마스) / 츠다 카몬(津田掃部, 카즈야스一安) / 이나바 이요(稻葉伊豫, 통칭 잇테츠一鐵, 요시미치良通) / 이케다 쇼사부로(池田勝三郞, 츠네오키恒興) / 가모 우효에노다유(蒲生右兵衛大輔, 카타히데賢秀) /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 서쪽에는 키노시타 토키치로 / 우지이에 보쿠젠氏家卜全 / 사쿠마 우에몬(佐久間右衛門, 노부모리信盛) 등, 북쪽에는 사이토 신고齋藤新五 등, 동쪽에는 시바타 슈리(柴田修理, 카츠이에勝家) / 모리 산자에몬(森三左衛門, 요시나리可成) / 삿사 쿠라노스케(佐佐內藏助, 나리마사成政)가 진을 쳤다. 사방에는 시시가키(鹿垣, 산 위에 있는 사람이나 동물이 내려오지 못하도록 쌓아올린 돌담)를 2중, 3중으로 빙 둘러 이어 쌓아 여러 곳의 입구를 차단했다.

  그리고 9월 8일, 이나바 잇테츠 / 이케다 쇼사부로 / 니와 나가히데가 서쪽에 위치한 뒷문에서 야습을 결행했다. 그러나 때마침 내린 비로 인해 조총을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완벽하게 패퇴, 강건한 무사 20여 명이 전사했다.

  이렇게 되자 9월 9일에는 타키가와 사콘에게 명령하여, 타케에 있는 코쿠시의 어전을 비롯한 모든 건물에 불을 질렀다. 거기에다 작물들도 모두 거둬 버리고, 성을 말려 죽이기 위한 작전에 들어갔다. 1개월이 지나자 성에서 아사자가 나오기 시작하였기에, 노부나가의 차남인 챠센마루(茶筅丸, 훗날의 노부카츠信雄)를 토모후사의 양자로 삼아 가문을 양도하겠다는 약속 하에 화친이 성립되어, 10월 4일 토모노리 부자는 타키가와 사콘 / 츠다 카몬들에게 오코치 성을 양도하고 퇴성했다.  

  노부나가는 타마루 성을 위시한 이세 지방의 성들을 부술 것을 명령하고, 이 지역의 여러 관문을 오가는 여행자들을 괴롭히던 세금을 폐지하여, 이후로도 관문 통과 비용 징수를 엄격히 금지시켰다. 그리고 이세 야마다山田로 가 10월 6일 이세 내궁 / 외궁 / 아사마 산浅間山 콩고쇼사金剛証寺를 참배한 후 다음 날 귀로에 올라, 교토로 올라가 쇼군에게 이세 지방 평정을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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