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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토리 시소] 오페르트 도굴원정대 (完) 아오조라문고


  이 포스트는 쇼와 시대 초중기 일본에서 마르크스주의 계열 (강좌파) 역사학자로 활약하신 故 핫토리 시소(服部之総, 1901~1956) 교수님이 1933년 9월에 집필하셨던,〈발릉원정대撥陵遠征隊〉라는 기고문을 번역한 것입니다. 원문이 쓰여진 지 85년, 저자분이 돌아가신지 62년이 지난 지금의 눈으로 보기엔 이러저러한 면에서 낡았다는 느낌은 부정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점을 감안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상하이를 출발한 것은 "어느 날씨 청랑한 아침" 이었다. 기선【 차이나 호 】에는 선장【 메러 】/ 【 페론 신부 】/ 그 조선인 동지들, 그리고 나(【 오페르트 】)와, "내게 가장 유용한 원조를 베풀어주신 미국 신사 I씨(젠킨슨)." 이상 간부들 외 12~13명의 유럽인 선원, 25명의 마닐라인과 몇 명의 중국인이 승선했다. 본 선박인【 차이나 호 】이외에 수심 2피트에서도 항행할 수 있는 소형 기선【 그레타 】를 예항시킨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다.

  나가사키長崎에 기항한 점에 대해선, 오페르트의《기행》은 완전히 생략해놓았다. 상당히 일기가 거칠었기에 대조 시기에 딱 맞추어 도착하려던 예정이 몇 시간 늦어져, 한밤중이 되었다. 다음날 새벽, 예의【 호위대 】를 인솔하여 작은 배로 옮겨탔다. 강폭은 약 반 마일. 평야지대로, 마을들이 코 앞에 있었다. 마을 사람이 수상쩍어하며 제방에 모여들었다.【 그레타 호 】는 강 중류에서 위치를 유지하면서, 30마일을 4시간 만에 항행하여 상륙예정지에 도착할 계획이었으나, 도착한 건 오전 11시였다.

  상륙했다. 작은 마을을 별 지장없이 통과, 나무그늘 하나 없는 평야를 지나치자, 이윽고 아름다운 구릉지대가 펼쳐지고, 상당한 크기의 마을이 보였다. 마을 외곽을 조용히 통과하려 했으나, 운이 나쁘게도 조선 병사 한 부대와 접촉하고 말았다.【 공갈 】을 치자 병사들은 흩어져서 도망쳤으나, 지휘관만은 결사적인 모습으로 길을 막아서고 있었다. 이번엔 조선어를 할 수 있는 페론 신부가 나섰다. 잘 설득한 모양인지, 이윽고 지휘관은 마침 그 때 일사병에 걸려 쓰러진【 호위대 】의 한 사람을 위하여 대나무 가마를 준비해주는 표변한 모습을 보였다.

  그건 괜찮았으나, 이미 중대한 계획 파탄의 위험이 찾아와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엄밀한 스케쥴에 따르면, 적어도 오후 1시에는 목적지에 도달해야 했으나, 지금 이 시간이 되어도 겨우 절반 정도 왔을 뿐, 거기에다 여기서부터는 오르막 언덕의 험난한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방은 더욱 아름다워졌고, 목인牧夫 두 세 사람을 제외하면 인가도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오후) 5시가 되기 전에, 가이드를 맡은 조선인이 손짓하며 부르는 곳을 올려다보자, 서쪽이 절벽이 되어 골짜기로 빠져들어간 험준한 산줄기가 비쳤다. 약 30분 후 우리 일행은 그 정상에 올랐다.

  오페르트로서는 태어나 처음 보는 절경이었다. 산허리의 삼나무 그늘에는 마을이 있었기에 이윽고 줄줄이 모여든 마을 사람들로부터 어렵지 않게 문제의 장소가 위치한 곳에 대해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저자 역주 : 조선의 사료에서는, 가동 민중들은 무장한 서양 오랑캐 일행을 보고 수위와 함께 뿔뿔히 흩어져 도망쳤다고 하는데, 여기에서는 오페르트의 주장을 따라가자) 

  대단히 구석진 장소였다. 그러나, 예상과 어긋났던 건 왕릉의 장엄하고 엄중한 구조였다.【 성스러운 유골 】은 단순한 석조건축물 속에 들어있을거라 상상하고 왔는데, 주위의 각 면들은 튼튼한 흙벽으로 지켜지고 있었다. 어찌됐든 우선 벽의 일부를 파괴하여 입구를 만드는 작업부터 착수하여야 한다. 원래부터 그럴 리는 없으리라 생각하고 도구도 준비해오지 않았기에, 마을에서 골라온 낫인가 뭔가를 이용하여 일을 시작했다.

  벽을 부수는 작업에만 5시간을 허비했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더욱더 커다란 곤란에 부딪혔다. 어떻게 벽을 부숴 놨더니 기대한 통로가 나오기는 커녕, 커다란 포석이 등을 드러내면서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돌을 떼어내기 위해선 앞으로 또 5 ~ 6시간을 투자해야 된다는 걸 알았을 때, 이제는 완전히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유감천만이나, 나는 페론에게【 이미 예정시간을 12시간이나 초과하였기에, 이 이상 머무르면 나는 여러분의 생명을 보장하기 어렵다. 】는 뜻을 고했다. 생각건대 물길이 말라버리기 전에 선박으로 돌아가려면, 지금 당장 출발해야 겨우 시간에 맞출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우선 살고 봐야 하는 막다른 판국에 조우하면, 유골강도고 나발이고 없었다. 실제로 신속히 철수하여【 그레타 호 】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물길은 마르기 시작하여, 4~5시간만 늦었다면 완전히 배가 주저앉아, 다음 대조가 있기까지 1개월은 움직일 수 없게 될 터였다.

  오페르트의《기행》은, 조선 민중들과의 관계가 평화적이었다는 점을 아주 열심히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상의 근거가 있었다. 말하자면 - 대원군의 학정은 일반 민중들에게 원망의 대상이 되어 있다. - 는 것. 그렇기에 예를 들자면, 실패한【 그레타 호 】가 황망히 강을 따라 내려가는 도중에도 "사람들은 대단히 우호적이었다. 상륙하여 쉬고 가라고 여러 번 제안했으나, 그 때 그렇게 하기는 힘들었다. 점점 우리의 목적을 알게 되고, 증오스러운 섭정(대원군) 그 자를 노린 행위라는 점이 명백해지면서, 도처의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우리들의 실패를 슬퍼해주었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동검도東檢島로 근거지를 옮기고 난 후의 기사인데 "사람들은 우리 일행의 실패를 슬퍼하고, 술을 마신 후와 같은 때는, 육상에서였다면 목이 달아나고도 남을 만큼 섭정을 공격하는데 열중했다. 그 중에서도 섭정이 화폐를 개악하여 주머니를 배불렸다는 이야기, 내지는 인민들은 반드시 외국인들이 이윽고 무장하여 돌아와 자신들을 이 폭정에서 구해줄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던 이야기!"   

  이론은 이론으로 놓아두고, 후자(동검도)의 경우 "사람들" 이라는 건 오페르트의 수기에 따르면【 관리 】로, 그것도 대원군이 일행에게 보낸 답장을 가지고서 이 때 동검도 앞바다에 있던【 차이나 호 】를 찾아온 사신이었기에, 사실의 문제로서는 사리가 들어맞기는 힘들어보인다. 첫 번째는【 섭정에게 쇄국정책을 포기시키기 위한 제 2 책략 】으로서 "조선의 글로 적은 후 (오페르트가) 서명한"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 편지를 대원군에게 보낸 데 대하여 4일 만에 답신이 왔다는 자체도 미심쩍은데, 그 사신이 섭정을 통렬히 험담하고, 다음 날 동검도 관청으로 오페르트 일행을 초대하겠다고 말한 후 하선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삼중의 터무니없는 일들이 혹시라도 완전히 있었다치고, 그리고 그 일체의 행동이 서양 오랑캐들을【 쿠로후네(黑船, 서양 선박) 】에서 내리게 하여 육상으로 끌어낸 뒤에 공격하려는 책략에 의한 것이라며 오페르트의 이야기를 합리화해보려고 해도, 그 다음 날 상륙한 후에 일어난【 불상사 】의 원인에 대해 어디까지나 오페르트는 "일행 중에서 유일한 부도덕자였던 한 외국인 선원" 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들 - 오페르트 / 선장 / 페론 신부 이하 - 은 관병官兵들과 사이좋게 담소하면서 산보를 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그 부도덕자가 조선인의 송아지를 훔쳐 돌아가려고 했기에 조선 병사들의 사격을 받아, 마닐라인 1명이 사망, 1명이 부상을 입었다. 문제의 그 부도덕자도 부상으로 인해 죽었다. "마닐라인은 불쌍했지만, 사건의 원흉인 부도덕자가 결국 천벌을 피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우리 일동을 만족시켰다. 송아지는 당연히 반환했다...."

  그렇다면 오페르트는, 그 적을 마지막까지 의심하려고 하지 않고, 책략에 걸려든 결과의 산물까지 오로지 자기 편의 부덕함으로 돌려 스스로를 책망할 정도의 선인 중의 선인으로, 교묘하게 자신을 그려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의《기행》속에서 등장하는 유일한 악인이라면 학정을 벌이는 대원군과, 소도둑 선원이 있을 뿐. 전자에 대한 왕릉 도굴사건도, 후자에 대한 죽음의 처벌도 모두 하늘의 이치와 세계의 정의가 발동한 것이며, 거기에다 오페르트가 마지막에 이르러 급작스럽게 가필한 내용에 따르면 그 부도덕자 소도둑은 "우리들의 내지진입(=도굴행)을 지연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어디서? 어떻게? 라는 건 일체 거론하지 않는다) 라고 하므로, 그가 하는 이야기는 하늘의 권선징악을 훌륭히 표현해낸 거대한 멜로드라마이기도 한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로서, 도굴원정대의 지휘자 오페르트와 제안자 페론 신부의 지고지순한 인격은, 어느 정도 논증된 모양새가 된다. 그러나 그렇다면 어째서, 또 하나의 대간부 - 그것도 이 원정대의 출자자이자, 이 사건에 의해 공판정에 선 유일한 간부였던 - 미국인 젠킨스의 인격을 위해선 왜 오페르트는 일언반구도 변명하지 않은 것인가? 젠킨스에 대해서는 마지막에 딱 한 번, 그것도 본명을 쓰지 않고 이니셜로 한 글자 끄적인 후, "내게 가장 유용한 원조를 해 준 아메리카 신사 I씨" 의 존재를 기록하였을 뿐이다.

  아무리 교묘하게 분식된 스캔들이라도, 단서를 더듬어 찾아가보면 그 지상적 본질은 맥없이 폭로되고 만다는 건 의옥사건疑獄事件을 맡은 검사보다도 범인 쪽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물며 성스러운 유골을 가지고 (조선의) 개국을 계획한 우에 대해 이를 성심으로 생각했다는 증거로서, 적의 술책을 최후까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 좋은 자기 자신' 을 그려낼 정도로 용의주도한 오페르트로서는, 오히려 출자자인 젠킨스에 대해서 (자세히) 쓸 리가 없는 것이다. 결국, 해적 취급을 당한 젠킨스 재판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선량한 사람으로 분식한 오페르트 기행을 통해서도, 여전히 도굴원정대 사건의 기본적인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이 사건에 관하여 어떤 것이 불명확한 것인지가 거의 밝혀진 이상, 2~3가지의 여벌쇠를 만들어내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젠킨스 재판 당시의 여론이나 구속이유,『참심』중의 한 사람이 훗날에 발표한 글이나, 마찬가지로 슈어드 총영사가 워싱턴 정부에 보낸 보고 -【 1~2곳의 조선왕릉에서 유골을 탈취하여 아마 이에 대한 몸값을 요구하려고 계획한 것. 】는, 젠킨스가 다른 누구와도 관계없이 스스로 원정자금을 투기한 사정으로서 타당하다. 그러나 그렇다면 "증거불충분" 으로, 의혹을 남겨놓을 필요도 없다.

  두 번째, 젠킨스가 총영사 슈어드로부터 도굴원정대 플랜을 털어놓고서 비용을 인출했다고 생각하는 건, 두 사람의 관계라든가 재판의 결과를 일면 뒷받침해주는 것이긴 하나, 미국의 이익과 도굴사건 간의 내적관계는《기행》이 페론을 통해 말하게 한 취지에선 물론이요, 그 외의 어떠한 취지로도 이유를 부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결국, 총영사 슈어드 씨가 영사관 통역자 젠킨스에게 크게 속아넘어갔다, - 그것도 발표할 수 없는 점에 대해서 속아넘어갔다. - 는 가설이 성립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슈어드는 어느 문헌에 따르면 "출발 전" 젠킨스로부터 원정대의 목적을 "조약을 체결하고, 미국 / 프랑스 정부에 대해 조선에서의 외국인 살해사건을 해명하기 위한 조선의 사절을 유럽으로 데리고 돌아오는 것" 이라고 통고받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슈어드는 도굴계획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으나, 원정대 그 자체에 대해서는 사전에 연관이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원래 젠킨스의 보고에 기반하여 슈어드가 본국에 요청하여 이루어진 대 조선교섭의 실행을, (베이징) 공사 로우가 신중을 기하며 쉽게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기에, 슈어드로서는 초조함이 생길 시기이기도 했다.

  원래부터 젠킨스가 사기를 쳐서 슈어드에게서 도굴원정대 자금을 타냈다는 가설은, 이와 비슷한 사건이 거의 대부분 그랬듯이 영원히 증명되지 않을 가설로, 그저 하나의 여벌열쇠에 지나지 않으나, 미국의 외교사에서 본다면 아마 비교적 명예로운 여벌쇠가 될 것이다. 왜냐면, 어떤 가설도 필요로 하지 않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서 오페르트 원정대 사건이 벌어진 지 3년 후인 1871년에는 본 실력을 투입한 합중국의 원정대가 세 척의 증기선을 대신하여 프리깃 1척 / 코르벳 2척 / 포함 2척으로 구성된 대함대를 거느리고 목사와 사기꾼 대신에 전권대사 로우와 존 로저스 제독의 인솔을 받아 마찬가지로 강화도를 습격, 5개의 포대를 파괴하고 포 481문 / 군기 50개 / 조선 병사 250명의 생명을 빼앗았으나, 이를 위한 이유는 앞에서 기록한, 대동강을 거슬러 온 미국 괴선박 【 제네럴 셔먼 호 】의 피해(?!)에 있었기에, 아무리 변명해봐도【 명예로운 】원정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지만 말이다.(이 불명예스런 강도적이고 강경한 원정도 역시 실패로 끝났다.) 

  미국의 전략이란 1858년의 타이코太沽 포대 공격에서 얻은 지혜를 따른 것이었다고 하나, 대원군은 청나라 황제와는 달리 수도 코 앞의 포대가 파괴되어도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기에, 허무히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페르트의 이야기 중에서 유일하게 정직한 고백이 있다면, "하느님의 가르침을 위해서는 왕릉을 헤집는 것도 가하다" 고 말한 페론 신부 그 사람의 심사 뿐이리라. 한 몫 챙기지 못한 사기꾼 오페르트 자신은, 저서인《금단의 나라 조선 기행》한 권을 페론 신부가 아닌 (브라질의) 돈 페드로 2세에게 헌정했다.

【 삼가 이 책을 브라질 황제 돈 페드로 2세 폐하께 바칩니다.
    폐하의 보호에 의해 지리학과 인종학 연구는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기에. 】

  (오페르트의《금단의 나라》는 영어판 / 독일어판 모두 우에노 도서관에 있으나, 분명(저자가 읽은 책은) 영어판이었다고 기억한다.【 메이지 14년 12월 7일 구매. 교육박물관 도장 】이 크게 찍혀져 있었다. 그 외에도 W.E.그리피스의《선일국민(仙逸國民, 1889)》, 모르스의《지나제국 국제관계사》, 쿠보타 후미조 씨의《지나외교통사》등을 참조하였음을 덧붙여 적어둔다.)       

               


덧글

  • 레이오트 2015/07/05 16:20 # 답글

    명당이 괜히 명당이 아니죠.
  • 3인칭관찰자 2015/07/05 19:03 #

    그렇습니다.
  • 히알포스 2015/07/12 23:38 # 답글

    이번 글도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금요일에 읽었지만 게임하느라고 귀찮아서 아무 글도 쓰지 않았었다는 것은 비밀. 도타2 재밌어요 도타2.)

    핫토리 시소라는 분이 일본사학계에서 유명한 분인가보죠? 정확히 어떤 활동을 했고 전공 분야가 어디인지 알기 위해 영어 위키를 간단히 검색했는데 그에 대한 자료는 없는 것 같더군요.

    다만 이번 글의 맥락을 따져보니 아마 이 분은 이 쪽 전공(근대사, 동양사, 19세기)는 아닌것같네요. 이런 분도 자기 전공 이외에 이런 글을 써서 대중적인 잡지에 올리다니. 이래서 역사군상 잡지가 좋아지나봅니다.

    그리고 한반도의 사건을 다루었다는 점, 그리고 참고서적 목록과 잘 보니 당시의 공판기록도 다 보고 이런 글을 작성하신 것 같은데, 이런 일이 가능할 정도로 텍스트가 쌓여 있고 지식도 있다는 것이겠죠?
  • 3인칭관찰자 2015/07/13 18:30 #

    일본 마르크스주의 계열 중에서 강좌파에 속했으며,(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라고 하긴 그렇고 최소한 일본 내에서는) 저명한 좌파 역사학자이자 호세이대학 교수였습니다. 전공은 19세기 일본 근대사이기에, 동시대의 조선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었다 추측됩니다. (덧붙이자면 이분 글, 그리고 이 글이 역사군상에 올라간 적은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하에 있던 1932년인가 1933년에 쓰여진 글이라.. 역사군상 시리즈가 처음 나온 건 1987년, 잡지 역사군상이 처음 나온 게 1992년이니)

    학자로선 이른 50대 나이(1956)에 사망하신 분이라 이른 시기부터 아오조라 문고에 이 분 글들이 올라왔었고, 정치성향은 다르긴 해도 얼마 안 되는 역사관련 글들이라 반가웠었죠.(아오조라 문고는 주로 사망한지 50년이 넘어가 저작권이 사라진 사람의 글만 공개하고 있습니다. 간혹 저작권 협조받아 올라오는 글도 있지만..)

    핫토리 씨.. 참고서적 외에 공판기록들도 참고한 것 같고,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조선 사람들 입장에서의 기록을 인용하는 걸 보면 고종실록은 읽어본 것 같습니다.(물론 다른 사람이 집필한 단행본을 참고했을 수도 있지만)
  • 히알포스 2015/07/13 21:15 # 답글

    아.....아이고, 부끄럽습니다. 아오조라 문고인데 제 생각만 하면서 댓글 지르다가 가장 기본적인 글 제목도 안 보고 쓰는게 되어버렸네요....

    고종실록이라......일본 역사학계에서 한국사의 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1차 사료에 관심갖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일반인의 상식으로 생각하자면 웬지 그런 이들은 무척 드물 것 같다는 느낌이.....
  • 3인칭관찰자 2015/07/13 21:38 #

    그러고보니 이 글에서《선일국민 》이란 제목으로 몇 번 거론되었던 윌리엄 그리피스의 책이 바로 조선을 주제로 삼은 통사 역사책(국내 정발명《은자의 나라 한국》)이라더군요.

    근현대사 부분 이야기가 세밀하다던데 어쩌면 구하기도 힘들었을 고종실록보다는 이 쪽에서 떡밥이 나왔을 확률을 무시할수 없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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