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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토리 시소] 오페르트 도굴원정대 (1) 아오조라문고


  이 포스트는 쇼와 시대 초중기 일본에서 마르크스주의 계열 (강좌파) 역사학자로 활약하신 故 핫토리 시소(服部之総, 1901~1956) 교수님이 1933년 9월에 집필하셨던,〈발릉원정대撥陵遠征隊〉라는 기고문을 번역한 것입니다. 원문이 쓰여진 지 85년, 저자분이 돌아가신지 62년이 지난 지금의 눈으로 보기엔 이러저러한 면에서 낡았다는 느낌은 부정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점을 감안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출처 : 아오조라 문고   


  양이攘夷는 막부 말기幕末 일본의 전매품은 아니었다. 중국(원문에는 "지나") 쪽이 더욱 규모가 컸고, 또 심각했다. 그리고 이 점에서 조선朝鮮을 중국 / 일본과 구별한다면, 메이지 8년(1875)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만이 단연 양이 전승국으로서 기분 좋게 뽐내고 있었다는 점이리라. 원래 근대 조선의 배외排外 슬로건이【 이왜(夷倭, 서양과 일본) 】을 나란히 거론하고 있었다고 항변해도, 양이를 유럽 / 미국인에게 한정시켜 본다면, 메이지 8년 일본에 굴복(역주 : 운요호 사건 -> 강화도 조약) 한 건 당연히 문제시되지 않으며, 조선은 양이에게 패배한 역사를 전혀 갖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 그야말로 대일본제국에 있어서는,【 병합 】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국가였던 것이다!

  조선 양이운동의 거두 대원군大院君은 섭정으로서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막부 말기의 부쇼군 가문副將軍家인 미토 나리아키水戶斉昭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그는 섭정이 된지 2년 차(1866), 당시 잠입해 있었던 프랑스인 천주교 선교사 12명 중 9명을 참수하여, 강퍅한 배외주의의 시작을 알렸다.

  비슷한 사건은 17년 전에도 일어났기에, 그야말로 18세기 말엽 이후의 조선 서교(=크리스트 교) 역사는 그 보호자인 프랑스의 체면을 구기는 형국이 되었으나, 1866년(게이오 2년)은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대외문제가 잠잠해진 한가한 때였으므로, 조선 국왕을 프랑스 황제의 보호하에 두고 크리스트 교도로 만들겠다는 뜻을 미리 중국에 선언하여 놓은 후, 7척의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 】로 쳐들어갔다. 간신히 조선에서 탈출한 3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이【 성전 】의 안내역을 맡아 선두에 선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시모노세키 전쟁下關戰爭 】에서 그 무사도武士道의 국민들을 쪽도 쓰지 못하게 했던 (프랑스의) 근대적인 군대도, 안심하고 있던 탓이 크지만, 결국 호랑이 잡는 조선 포수들 8백 명의 구식 화승총 앞에 때려눕혀졌다. 호랑이 사냥은 한 발 승부로, 그러한 8백 발의 저격을 받은 것이다. 정규병 대신에 조선 전체의 호랑이 잡는 포수들을 동원한 걸 보면, 쿠스노키 마사시게(楠正成, 일본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의 전설적인 명장) 저리 가라 할 전술가였다.

  각을 잡고 다시 원정에 나선다면, 이번에는 호랑이 잡는 포수 8천 명을 동원해도 결과는 뻔한 것이었겠으나, (프랑스는) 그 다음 해에 베트남安南으로 출병해야 할 일이 생겼으며, 일본에서 일어난 내란도 영국과 대치하며 감시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윽고【 보불전쟁 】. 그리고【 파리 코뮌 】의 역사를 겪으며,【 예수회 】를 앞잡이로 이용한【 루이 14세 】이래의 프랑스 식민정책은 우둔한【 나폴레옹 3세 】에 의해 답습되어 조선에서 마지막 결실을 얻으려는 순간에, 호랑이 잡는 포수 8백 명에 의해 발이 걸려 영원한 실패로 끝이 났다. 이 싸움은 우연한 승리라고는 하나 결정적인 승리였다.

  (이로 인해) 지옥에 떨어진 것처럼 비탄에 잠긴 자들 중에는, 이제 또 다시 상하이 조계에서 따분한 나날을 보내게 된 프랑스 선교사 3명과, 그들을 둘러싼 여러 명의 조선인 신자들이 있었다. 프랑스인 선교사들 중 한 사람의 이름은【 아베 페론 신부 】라고 했다.

  같은 해인 1866년에는, (조선은) 미국 선박과의 사이에서도 사건이 터졌다. 미국의 스쿠너【 서프라이즈 호 】는 조선 근해에서 난파당했으나, 바람을 따라 나아가 친절한 구조를 받고서(일본에서는 난파한 미국 선원은 모두 감옥에 쳐넣은 뒤 네덜란드에 넘겨 버렸는데) 그대로【 의주義州 】를 거쳐 중국에 반환되어, 무사히 돌아갔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달, 대동강大同江을 힘차게 거슬러올라 평양에 다다른 미국 선박【 제네럴 셔먼 호 】는, 물론 조선인의 눈으로 보면 그 배가 미국 것인지 영국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겠지만, 분명 괴이한 선박이었다. 선적船籍은 미국의 선박이지만, 영국 상선에서 세를 내어 즈푸(芝罘, 중국 산둥 반도에 있는 항구도시)에서 상품을 적재하였다고도 기록되어 있으며, 수많은 무기 / 탄약을 장비하고 있었기에 "평양의 고분 발굴을 목적으로 한 약탈선이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았다. 어찌됐든 평화로운 배가 아닌 건 확실했다.

  그들은 자신들 쪽에서 먼저 손찌검을 하여, 평양의 관리를 인질로 잡았다. 그리고 상륙해서 약탈을 감행했다. 그러나, 호랑이 잡는 포수 8백 명 대신에, 이번에는 대동강의 수량이 줄어, 배가 주저앉아버렸다. 대동강에 홍수가 내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우쭐해져서 강을 거슬러온 것이 실수였던 것이다. 얼씨구나, 하면서 조선측은 동양적인 전술을 구사, 불을 붙인 뗏목들을 강 상류에서 떠내려보내어 셔먼 호를 불태우고, 승무원들을 학살하거나 투옥시켰다.

  이어서 1867 ~ 68년에 걸쳐 두 차례, 미국에서는 셔먼 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조사대가 파견되었으나 완전 요령부득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조선국은 앞에서 거론한 두 사건(병인양요 / 제네럴 셔먼 호 사건)에 대해 사죄와 배상을 하기 위하여 미국 / 프랑스 두 나라에 사절을 파견할 의지를 갖고 있다, 양국 정부는 과연 이를 수리할 것인가. 하는 의중을 확인하기 위해 두 사람의 특사가 상하이에 와 있다. 】는 보고를 상하이 미국 총영사 슈어드에게 한 자가【 F.B. 젠킨스 】라는 자였다. 문헌에 따르면 단순한 미국 출신 모험자라고도, 미국 시민이라고도 하지만,【 전 미국영사관 통역관. 어릴 적에 중국어를 습득하였으며, 한자를 쓸 줄도 알았다 】는 게 진실인 듯하다.   

  총영사 슈어드는 젠킨스의 보고에 기반하여 본국정부에, 자신을 조선 개국 교섭특사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즉각 본국정부로부터 훈령이 날아와, 전권대사로서【 베이징 미국공사 】로우를 임명하고, 국위를 과시하기에 충분한 함대를 딸려보내기로 결정되었다. "프랑스는 조선에서 실패하였다. 영국은 불평을 제기했으나 구실은 없다. 북 독일연방은 2년 전에 막 수립된지라 아직 극동정책이 확립되지 않았다. 지금이야말로 미국이 對 조선과의 조약에서 주도권을 쥘 때다. 미국으로서는 한편으로【 서프라이즈 호 】를 구조해준 데 대한 감사, 반면【 제네럴 셔먼 호 】사건에 대한 규명이라는, 은혜와 위압 모두를 행하기 위한 구실이 갖추어져 있으므로" - 내훈은 이러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었다. 이럭저럭하는 사이에, 조선에 있어서는 세 번째로 겪는, 그야말로 괘씸하기 짝이 없는 서양 오랑캐洋夷의 사건이 일어났다.

  1868년 - 이태왕(李太王, 고종) 5년 4월 17일, 한 척의【 쿠로후네(黑船, 서양 선박) 】가 충청도 아산만에 있는 행담도行担島에 닻을 내렸다. 그 곳에서 작은 배에 환승하여 삽교천插橋川을 거슬러올라, 구만포九万浦 부근에 상륙한 서양 오랑캐들은 스스로를 아라사(러시아)의 병사들이라고 떠들어대면서, 충청도 덕천군德川郡 가동伽洞에 있는 대원군의 부왕, 남연군 이구南延君李球의 묘로 향했다.

  수위들과 가동의 민중들은 사방으로 도망쳐버렸다. 서양 오랑캐들은 왕릉 발굴을 시작하였으나, 어찌된 일인지 중도에 그만두고 행담도로 물러간 것이 (구력) 4월 24일. 그들과 엇갈려서 충청감사 민치양閔致痒이 군대를 이끌고 덕천으로 달려왔다. 서양 오랑캐들은 선박을 행담도에서 다시 강화도 남방에 있는 동검도東検島로 옮겨서 그 곳에 상륙. 여기서 조선 군대와 충돌하여 패주하였다.

  대원군 섭정시대에 접어들어 세 번째의 승리였다. 영종 첨사永宗僉使 신효철申孝哲이 이 전승을 경성(한양=서울)에 보고한 데 따르면 "부상입힌 자 대단히 많으며, 물에 빠져 죽은 자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낱낱이 고하기는 어렵고.. 그저 두 도적의 잘린 머리를 동문에 매달아, 도적들을 위압하였습니다.. " 라고 되어 있다. 두 도적의 목은 즉각 경성으로 보내져 다시 한 번 군민의 앞에서 효시되고, 크게 전승을 축하했다. 

  5월이 되자, 이 도굴원정대의 사건이 역시나 상하이 조계에서 커다란 문제가 되었다. 죽음을 당한 "두 도적의 목" 이라는 데 - 그건 그렇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수를 헤아릴 수 없다는 건 거짓말로, 원정대의 사망자는 이 두 명밖에 없었다. -  그들은 마닐라 사람들로, 용병이 되어 원정대에 가담한 자들이었다. 그들 쪽에서 사건이 흘러나가, 스페인 영사는 정식으로 상하이에 있는 미국 / 프랑스 / 독일 영사들과의 교섭을 시작했다. 원정대의 지도 / 책임자로서, 상하이에 거주하던 미국 / 프랑스 / 독일 세 나라 시민의 이름이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북독일연방 시민 / 유태인 / 상인 /【 에른스트 오페르트 】. 주모자
프랑스인 / 천주교 조선 포교사 / 【 아베 페론 】. 안내자
미국 시민 /【 F.B. 젠킨스 】. 출자자


  그 목적은, 조선 아무개의 왕릉을 발굴하여 보물과 유해를 탈취하고, 상응하는 몸값을 요구하려는 것이었다.




덧글

  • 레이오트 2015/07/01 22:55 # 답글

    1. 시대가 좀 많이 이르지만 나선 정벌에 동원된 조선군 조총수는 (특등 사수였다는 점을 고려해도)화승식 활강총으로 직접조준사격을 하는 어마무시한 능력자들이었죠. 당시 직접조준사격을 주로하는 독일의 예거, 프랑스의 퓨질리어, 미국의 샤프슈터가 강선총을 썼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죠.
    (현대병기로 치면 샷건 슬러그탄으로 200~300m 저격을 한 것이라 보시면 됩니다)

    2. 병인양요 당시의 경험으로 나온게 현대의 방탄복과 그 원리가 같은 면제배갑입니다. 이 면제배갑은 신미양요 당시 실전투입되었고 미군에게 1벌이 노획되었다가 임대 형식으로 반환받았지요.

    3. 다음화 예고!

    Oh! 조선의 grave는 튼튼데스네!!
  • 3인칭관찰자 2015/07/02 15:02 #

    1. 그렇군요.

    2. 면제배갑이 이 때 나왔었네요..

    3. 다음인 (2)에서는 직접적인 도굴 이야기는 없고, 상하이 조계에서 벌어진 도굴범 재판 이야기가 주입니다. (3)에서 무덤 이야기가 다시 나오겠지요.
  • 재팔 2015/07/01 22:13 # 답글

    아니 핫토리 시소가 조선사도 다뤘습니까?

    하긴 중세시대 및 근세 사가였던 호라 토미오가 나중에 남경을 다룰 거라곤 아무도 생각 못 했죠 ㅋㅋ
  • 3인칭관찰자 2015/07/02 15:04 #

    아마 핫토리 선생이 조선사까지 다룬 건 아닐 것 같고, 이 분이 주로 메이지 유신 전후를 주전공으로 한 역사가이다 보니 그 동시대의 조선에 대해서도 관심이 뻗어간 게 아닐까 싶습니다. ㅋㅋ

    (최소한 아오조라 문고 내에서 핫토리 선생이 조선 관해서 다룬 글은 이거 하나 뿐이었습니다)
  • 2015/07/02 09:2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5/07/02 15:1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진냥 2015/07/02 11:40 # 답글

    오호! 일본인 입장에서 쓰여진 오페르트 도굴 미수 사건이라니 이 또한 귀한 자료로군요!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 3인칭관찰자 2015/07/02 15:17 #

    저도 처음에 아오조라 문고에서 저 글 보고는 놀랐습니다. 일본인이 이 사건을 다 아나.. 싶어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2015/07/02 13:1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5/07/02 15:1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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