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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오오타니 요시츠구의 세키가하라 (完)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7호(2001년 6월호) 50~65쪽의 기사인,《오오타니 요시츠구의 세키가하라 - 세키가하라를 연출한 또 다른 남자를 번역한 것으로, 하시바 아키라(橋場明, 근래는 橋場日月이란 필명을 사용) 씨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1600년 9월에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에 이르기까지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삶과 그 행보를 그리고 있습니다. 

 
  ◆ 전투 - 불굴의 야전지휘관으로서 죽다

  양군, 세키가하라로

  (음력) 9월 14일(공교롭게도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가 마츠오 산松尾山에 강행입성한 그 날이다), 미노 지방美濃國 아카사카赤坂에 도착한 이에야스는, 오미近江 / 탄고丹後에 있는 3만 명, 오사카 성에 있는 4만 4천 명의 서군 병력을 시야에 넣고서 작전을 검토했을 것이다.

  물론, 내통공작을 통해 어느 정도 성과를 올렸고, 적군의 비통일성과 전의 부족도 마음 든든한 재료이긴 했지만, 정작 전장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는 것이 천군만마千軍万馬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신념이다. 이전부터 고려하고 있던 수공水攻에 대해서도, 미리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오가키 성大垣城에 농성한 서군 수뇌(미츠나리三成 / 우키타宇喜多 / 코니시小西 등)를 수공으로 봉쇄하고, 두뇌를 잃어버린 여러 방면의 서군을 각개격파한다, 는 전법은 대단히 매력적이었으며, 이 시기 시나노 / 미노 지방에 대량의 비가 내리고 있었다는 점도 한 몫하여, 수공 안건은 현실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 날 내로 이에야스는 보다이 산성菩提山城으로 본영을 옮기고, 배하의 군대에도 그 준비를 명령했다.(《세키가하라군키타이세이關ケ原軍記大成》,《오오미카와시大三川志》등)

  키리노桐野 씨는 그의 저서《진설 세키가하라 전투真說ㆍ關ケ原合戰》(學硏M文庫)에서 이것을, 오가키 성에서 적을 유인하여 아오노가하라에서의 야전으로 끌고 가기 위한 움직임이라고 적고 있다.

  이에야스의 진의가 그 쪽에 있었더라도, 이 진지 이동 때【 100석당 괭이 1개, 1인당 대나무 세 자루 / 나무 한 그루 / 포승줄 3히로(1.5m x 3) 】의 자재반송을 지시했기에, 미츠나리를 위시한 오가키 성의 서군 입장에서도 보기에 따라선 이것도 수공의 준비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마침 그날 밤, 오가키 주변에 홍수가 찾아왔다.(《케이죠군키慶長軍記》)

  그야말로 절묘한 타이밍에 밀어닥친 범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츠나리로서는 진흙탕 속에서 고립되리라는 환영에 겁을 먹고, 황망히 성에서 나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위 사람들의 오가키 성 농성책을 물리치고,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은밀히 성을 나왔다. 이 경우 이동지로서 최적인 장소는, 요시츠구가 돌관공사를 하여 진지정비를 행한 세키가하라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하여, 미츠나리 이하의 군대는 요시츠구가 대기하는 세키가하라로 향했다.

  이 이동을, 이에야스의 신변을 돌보던 이타사카 보쿠사이板坂卜齋는 이하와 같이 증언하였다.

【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모반의 소문이 퍼지면서, 이를 처치하기 위해 (미츠나리들은) 오가키 성을 나왔다. 】(《케이죠넨츄보쿠사이키慶長年中卜齋記》)

  어느 쪽이든지, 일반에서 이야기되는 것과 같이 "이에야스는 서군을 세키가하라로 유인하기 위해 사와 산성佐和山城 / 오사카 성大坂城을 직접 공격한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와 같은 상황이 있었다는 건 대단히 의심스럽다.

  요시츠구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미츠나리와 함께 고심하여 준비한 전략은 완전히 무너졌다. 모리 테루모토의 본군은 오지 않고, 신용할 수 없는 코바야카와 군이 마츠오 산성에 입성해 있다.

  당초 구상했던 마츠오 산성을 본영으로 하자는 안건과는 크게 괴리되어, 내통이 의심되는 코바야카와 군이 진을 친 마츠오 산은 전장의 중심적 위치에서 밀려나고, 텐만 산天滿山이 중심이 되어 오른쪽으로 야마나카山中 / 왼쪽은 사사오 산笹尾山에 이르는, 극단적으로 축소된 구성의 진지군이 되어버렸다.

  커다랗게 펼쳐진 서군의 연계된 날개가 되어야 했었음에도, 마츠오 산에 의해 분단되어 버렸기에, 동방의 난구 산南宮山 진지는 그 의미가 크게 상실되었다. 만약 마츠오 산에 모리 본군이 입성해 있었다면, 그 동방에 위치한 모리 별동대는 유기적으로 연동하게 되어 본군의 의향을 따를 수밖에 없었고, 아무리 킷카와 히로이에가 동군과 내통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결전의 상황에 따라서는 동군에 돌입했을지도 모른다. 

  요시츠구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차질에 이를 가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스스로의 손으로 돌관작업을 가해 완성시킨 진지군을 결전장으로 삼겠다는 결의는, 이 때 굳혀졌다.

 
  결전決戰

  빗 속을 철야하여 세키가하라로 이동해 온 맹우盟友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이하의 군대를 맞이하여, 요시츠구는 정확히 각 부대를 정비가 완료된 진지로 유도했다.

  요시츠구 자신은 미야노우에宮ノ上에 진지를 치고, 아들인 오오타니 다이가쿠 요시카츠大谷大學吉勝 / 조카인 키노시타 요리츠구木下賴繼, 거기에다 히라츠카 타메히로平塚爲広 / 토다 시게마사戶田重政를 그 전면에 배치, 오가와小川 / 아카자赤座 / 와키자카脇坂 / 쿠츠키朽木 부대도 마츠오 산 북쪽 산기슭에 진을 치게 했다. 이로써 나카센도中山道를 막아서서 동군을 저지함과 동시에, 마츠오 산의 코바야카와 군에 대한 방비도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역으로 보면 임무를 이중으로 설정해버린, 전술상 가장 기피해야 하는 행위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9월 15일 새벽, 어젯밤부터 내린 비는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도 계속되고 있었기에, 시계는 좋지 않았다. 오가키 성에서 이탈해 온 서군을 쫓아 아카사카에서 이동해 온 동군의 여러 부대들도, 이미 포진을 완료했다.

  오전 8시 경, 동군의 마츠다이라 타다요시松平忠吉 /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의 돌출抜け駆け에 의해 전투가 시작되자, 서군 우익에 위치한 요시츠구는 선봉에 선 여러 부대에 전진을 명령했다.

  이 방면의 동군 부대는 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 / 쿄고쿠 타카토모京極高知 / 우익 제 2선에서 선회해 온 오다 우라쿠織田有樂의 약 6천 병력으로, 여기에 비해 요시츠구 이하의 부대는 약 3천 명. 절반의 병력으로 적에게 대항했다는 말이 된다. 요시츠구의 높은 전의를 이야기하는 수치이리라.

  전체적으로는 우키타 / 코니시 / 이시다 / 오오타니 부대의 분전으로 서군이 동군에 비해 약간 우세한 상태로 전투를 벌이고 있었으나, 정오 무렵이 되자 상황은 일변했다.

  이전부터 의혹의 시선을 받던 마츠오 산성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동군으로 배반한 것이다. 조총 부대를 선두에 세워 공격해 내려온 코바야카와 군에 맞선 요시츠구의 본대는 고작 6백 명이었으나, 어느 정도 예측된 사태였기에 혼란에 빠지는 일 없이, 우측에 있는 코바야카와 군을 향하여 대형을 90도 회전시켜, 이를 맞아 요격했다.

  1만을 넘는 코바야카와 군은, 이와 동시에 토다 시게마사 부대의 측면에도 쳐들어갔으나, 히라츠카 타메히로 부대에게 옆구리를 찔려 370명의 전사자를 내고, 4정(약 430m) 정도나 밀려났다. 이에야스가 파견한 군감 오쿠다이라 사다하루奧平貞治도 이 때 전사했다고 하니, 그 격전이 얼마만한 것인지를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오오타니 부대가 코바야카와 군을 추격하여 대열이 늘어진 것을 토도 / 쿄고쿠 / 오다 군이 측면에서 공격하자, 지금까지 전투를 구경만 하고 있던 와키자카 / 쿠츠키 / 아카자 / 오가와 부대가 갑자기 반기를 들어 히라츠카 / 토다 부대에 공격을 시작, 코바야카와 부대도 반전하여 포위공격을 가했다.

  원래부터 말에 탄 무사이든 걸어다니는 보졸이든, 주로 사용하는 손인 오른손으로 무기를 다루기 때문에, 우측면에서 공격을 받을 경우에는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으나, 좌측에서 받는 공격에는 대응하기 힘들다. 이는 군대 규모로 발전해도 마찬가지로, 이 경우 오오타니 군의 경우가 바로 이러했다. 우측에서 오는 코바야카와 부대에는 훌륭히 대처할 수 있었으나,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부대의 좌측 옆구리를 토도 등의 부대에 무방비로 노출시킨 것이 문제였다.

  요시츠구 본대보다 더욱 비참했던 건 히라츠카 / 토다 등의 부대로, 이쪽은 사실상 정배후에서 토도 군들에 의해 공격받게 되었다. 거기에다 와키자카 이하의 무장들이 배반했으니, 이제는 버틸 수가 없다. 이로 인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된 히라츠카 / 토다 부대는 괴멸했고, 두 사람은 전사했다.

  가마를 타고서 지휘를 계속하던 요시츠구도, 여기에 와서는 이미 가마에서 내린 상태였다.

  앞에서 서술한 이중 임무 수행이 파탄났을 때, 그 때 요시츠구의 죽음은 다가오고 있었다. 2만 5천 명에 달하는 적군의 방벽 앞에, 대부분의 병사를 잃은 요시츠구의 뇌리에는 어떤 생각이 오갔을까.

  그는 차분하게 배를 갈라, 그 작전행동의 모든 것을 끝냈다.

  자결한 장소는, 미야노우에의 "츠치" 라는 곳이었다고 한다.(《안쥬모노가타리庵主物語》) 그 수급은 근신에 의해 진흙논 속에 매장되어,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그의 죽음에 대해선, 쿠게(公家, 일본 조정의 귀족)들이나 승려들이【 오오타니 교부 전사했다(《코노에사키히사몬죠近衛前久文書》)】,【 오오타니 교부쇼유 전사(《슌큐키舜舊記》)】라는 식으로 기록을 남겼기에, 그 충격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오오타니 부대의 전멸에 의해 길항하고 있던 전장의 밸런스는 일거에 무너져, 서군의 패배가 결정되었다. 그 전사자 수는 약 8천 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 전투를 통틀어, 전장에서 자살한 건 결국 요시츠구 한 사람 뿐으로, 그의 육친인 오오타니 다이가쿠 / 키노시타 요리츠구조차도 본대가 궤멸한 후 전장을 이탈하여 도망쳤다.

  요시츠구의 자살은, 역시 병환이 진행됨에 따라 재기의 가능성이 없어졌다, 는 절망적인 감정이 우선했기 때문이었을까. 필자는, 오히려 병을 극복하고, 무인으로서 활약하다 죽을 최후의 기회를 살려, 맑은 모습으로 죽어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자신의 사후 그 수급을 감추게 한 것도, 병에 걸려 피부가 문드러진 수급을 사람들 앞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기 떄문이라는 그의 맑은 미의식에 의한 것이며, 그리고 그런 면이 요시츠구답게 죽음에 대처하는 방법이리라.

  그의 묘는 지금도 세키가하라 미야노우에에 남아 있으며, 향화하는 자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덧글

  • 콜드 2015/05/26 20:39 # 답글

    저 때 요시츠구를 묻어주고나서 이에야스측 군사가 그걸 발견한 바람에 요시츠구를 묻어준 병사가 내 목숨을 줄테니 절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며 자결했고 이에야스는 요시츠구가 어디에 묻혀있냐고 물어봤을 때 목숨을 건 의리때문에 절대 알려줄 수 없다고 했던 일화가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나 모르겠네요 =ㅂ=a
  • 3인칭관찰자 2015/05/26 21:31 #

    맞습니다. 듣고보니 저도 그 일화가 생각이 나는군요. 2천년대 초반에 국내에 정발된 시바 료타로 씨의 소설《세키가하라 전투》마지막 권에서 본 듯 합니다요. ㅎㅎ

    (단지 그 외에도 한국에 정발된 소설에 위 일화가 언급된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고, 일본 쪽의 원출처가 어떤 책이었는지까진 모르고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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