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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오오타니 요시츠구의 세키가하라 (3)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7호(2001년 6월호) 50~65쪽의 기사인,《오오타니 요시츠구의 세키가하라 - 세키가하라를 연출한 또 다른 남자를 번역한 것으로, 하시바 아키라(橋場明, 근래는 橋場日月이란 필명을 사용) 씨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1600년 9월에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에 이르기까지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삶과 그 행보를 그리고 있습니다. 


  인질 확보

  서군 가담을 결정한 요시츠구는, 자신이 가진 사무처리능력과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인질을 확보해야 한다. 7월 30일, 요시츠구는 시나노信濃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 / 노부시게(信繁, 유키무라幸村) 부자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 나이후(內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작년 이래의 처치는, 타이코 님(太閤樣,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 정하신 바를 거스르는 것으로, 히데요리秀賴님의 통치에 어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

【 (두 분의) 처첩은, 저희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

【 이 쪽은, 오사카의 인질들을 매우 엄중히 지키고 있습니다.(이상《사나다 가문 문서真田家文書》

  이에야스의 죄를 규탄하고, 제장들의 처자를 인질로 억류함과 동시에, 사나다 부자의 처자(노부시게의 아내는 요시츠구의 딸이다)의 신병도 보호하고 있다고 보고하는 이 문면에는, 이미 과거에 이에야스에게 친근하게 굴던 시기의 요시츠구의 옛 모습은,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 남은 것은, 토요토미 가문의 유능한 관료로서 활약한 탁월한 사무처리능력과, 과단성 뿐이었다.(요시츠구가 이 작업의 중심적 역할을 맡은 것은, 같은 날 미츠나리가 마사유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러분(마사유키 / 노부시게)의 부인들은 오오교쇼大刑小 - 오오타니 교부쇼유 요시츠구의 약자 - 가 보호하고 있습니다.(《사나다 가문 문서真田家文書》)】라고 기록한 데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요시츠구는 7월 14일까지는 츠루가敦賀로 돌아가 있었으나, 이 글을 본다면 적어도 7월 말에는 츠루가와 오사카를 왕복하며 오사카에서의 인질 확보작업 지휘와, 츠루가에서의 전투준비 쌍방을 함께 실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사카에서는 그 뿐만 아니라 부교들奉行衆에 의해 쓰여진【 나이후의 그릇된 점들 】이라는 이에야스 탄핵문서의 작성 등, 다수파 공작의 음지에서도 크게 관여하고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그것은, 7월 23일 날 이에야스가 모가미 요시아키最上義光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부쇼유(治部小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 교부쇼유(刑部小輔, 요시츠구), 약삭빠르게 곳곳에다 회람장을 돌리고 있다.(《후쵸요로쿠譜牒餘錄》)】고 전하여, 적인 이에야스가 미츠나리 / 요시츠구 두 사람이 거병의 중핵이라고 첩보하고 있는 것을 봐도 이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때 요시츠구가 확보한 인질 가운데는, 마에다 토시나가前田利長의 동생으로 노토能登 지방을 통치하던 마에다 토시마사前田利政의 아내도 있었다. 실은 이에 앞선 6월 16일, 토시마사는 이 편지를 카미카타에 있는 지인에게 보낸 바 있다.【 아내가 홋코쿠(北國, 호쿠리쿠 지방)로 돌아올 수 있도록, 아무쪼록 힘써 주셨으면 합니다. 】

  이 편지의 수신명은 "덴 세이로쿠田淸六" 라고 되어 있는데, 이 자는 매 상인으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절친한 관계였던 쿄토의 타나카 세이로쿠田中淸六라는 인물일 것이다. 토시마사는, 군사적 긴장이 계속되는 가운데, 카미카타에 인질로 붙잡혀 있던 아내 세키(籍,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鄕의 딸)를 어떻게든 노토로 돌아오도록 하고 싶어 공작을 의뢰한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편지의 수신인인 타나카 세이로쿠가, 이 시기에 도호쿠東北 지방의 영주들에 대한 사신으로서 토쿠가와 측의 다수파 공작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당연히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뜻을 받든 것으로,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그 공헌을 인정받아 막부의 고관인 사도 지방 행정관佐渡奉行 등을 역임하게 된다. 당연히 여러 영주들은 타나카 세이로쿠가 토쿠가와 편이라는 것을 숙지하고 있었고, 토시마사의 경우에도, 타나카 세이로쿠의 배후에 이에야스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청탁을 넣은 것이라 생각된다. 

  즉, 아내가 타나카 세이로쿠의 활약으로 귀환하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토시마사는 토쿠가와의 편에서 싸우게 될 터였다. 일반적으로 거론되는 것처럼 "토시마사는 형인 토시나가와는 달리 혈기에 치우친 反 토쿠가와 파로, 세키가하라에서 토쿠가와 편에 서서 참전하기를 거부했다." 라는 인상과는 사정이 크게 다른 것으로, 토시마사가 어느 쪽에 붙느냐 하는 데는 미묘한 정세가 흐르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토시마사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오오타니 교부쇼유의 착상에 의해, 마고시로(孫四郞, 토시마사) 님의 아내분은 은신해 있던 곳에서 끌려나왔다.(《쇼켄키랴쿠象賢紀略》)】고 되어 있듯이, 그의 부인은 요시츠구의 수배에 의해 서군 측의 인질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 토시마사의 입장은 곤란해진다. 그의 부인은 가모 우지사토의 딸로, 그녀와 남매관계인 가모 히데유키蒲生秀行가 현재 가모 가문의 당주가 되어 있었다. 히데유키는 이에야스의 3녀, 후리히메振姬의 약혼자였기에, 명백한 이에야스 파였다. 토시마사가 서군에 붙는다면 부인의 친정에 폐를 끼치게 되고, 동군에 붙으면 부인의 신변 자체에 위협이 미친다. 결국 토시마사는, 어느 쪽에 붙어서 출병하는 일 없이 영지에 틀어박혀, 전후에 그 영지를 몰수당하고 은거하게 된다.

  이와 같이 동군의 여러 영주들의 처자를 인질로 잡아, 특히 마에다 가문의 전력을 반감시킨 후, 요시츠구는 영지인 츠루가로 돌아가 본격적인 호쿠리쿠 방면의 경략을 시작했다.


  호쿠리쿠 경략

  호쿠리쿠 방면에서 요시츠구의 작전목표가 된 것은, 역시 마에다 가문前田家이었다. 그 거대병력을 어떻게 해서 무력화시키느냐는 문제는, 전략 전체의 면으로 봐도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건 말할 필요가 없다. 이미 노토의 토시마사 군을 무력화시키는 데는 성공하였고, 남은 것은 카가加賀 지방의 토시나가가 이끄는 마에다 본군이었다. 요시츠구는, 우선 이 카가 군에 권유의 손길을 내밀었다.

【 세키가하라 당시 히데요리 님의 이름으로 오오타니 교부쇼 / 마시타 우에몬(增田右衛門, 나가모리長盛)의 도장이 찍힌 증서를 가져와, 아군이 되어준다면 홋코쿠 7개 지방을 주겠다는 뜻을.. 】(《무라이시게요리오보에가키村井重賴覺書》) 전했다. 그러나, 어머니와 중신이 에도에 인질로 붙들려 있는 토시나가로서는, 서군에 가담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7월 26일에 출병한 토시나가는, 8월 3일에 다이쇼우지 성大聖寺城을 함락시켜, 서군 편에 선 야마구치 무네나가山口宗永 부자를 습살攻め殺す했다. 바로 그 때, 토시나가에게 다음과 같은 문면의 급보를 알리는 편지가 날아들었다.

【 이번에 홋코쿠 일대를 오오타니 교부가 맡아, 4만여 명을 이끌고 그 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1만 7천 명은 키타노쇼北の庄 방면에서 밀어닥치고, 3만 명은 선편으로 우회하여 카슈(加州, 카가 지방)에 상륙, 카나자와金澤를 공격하여 취하려는 기미가 있습니다. 방심하시면 안 될 것입니다.(《부헨바나시사키가키武辺咄聞書》,《카칸쇼세츠可觀小說》)】

  이 편지를 쓴 사람은, 나카가와 소한中川宗半이라고 한다. 이름을 미츠시게光重라고 하여, 노부나가 / 토시이에利家를 섬기면서 토시이에의 사위가 되었다. 케이죠 5년(1600) 당시에는 마에다 가문의 가신이었다고도, 내지는 오사카 성의 오토기슈(お伽衆, 역주 : 히데요시 생전의 말벗 중 하나?)였다고도 하나, 토시이에가 사망할 때 유품을 많이 받았으며, 호슌인(芳春院, 마츠松)이 에도로 떠날 때에도 논의에 가담했고, 배웅도 한 바 있다. 토시나가의 친족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오오타니 요시츠구가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육지와 바다에서 카나자와를 공략한다, 는 건, 이름만 거창한 작전계획으로, 당연 요시츠구에게 그만한 병력은 없었다. "빠른 소식에는 엉터리 정보가 많다." 는 법이지만, 기실 이 편지에도 요시츠구의 계략이 숨어 있었다.

  요시츠구는, 오사카에서 카가로 향하려던 소한을 도중에 붙들어, 협박하여 이 편지를 쓰게 했던 것이다. 토시나가로서는 친족인 소한이 보낸 정보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를 신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껏 다이쇼우지에서 전승하여 에치젠 지방으로 진출하려는 기세를 드높였음에도 불구하고, 본거지인 카나자와가 공격당할지도 모른다는 데 겁을 먹은 토시나가는, 황망히 7일날 군대를 물렸다. 결국, 그 후 토시나가의 군이 중앙에서의 결전에 참가하는 일은 없어졌으니, 만약 이 편지가 "시간을 끌어 형세를 관망하기 위한 토시나가의 위작" 이 아니라면, 이는 요시츠구의 정보공작의 승리로서, 서군에 있어 그 부가효과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덧글

  • 애독자 2015/05/24 19:10 # 삭제 답글

    관찰자님의 역사군상 해독판 애독하는 애독잡니다
    매번 흥미롭네요 ㅎㅎ 소스는 직접 책을 구매하시나요?
    좋은 번역 감사합니다 전국시대에 흥미있지만 일본어를 잘 모르는 저로썬 가뭄에 단비같아요
  • 3인칭관찰자 2015/05/24 21:22 #

    역사군상 월간 잡지 쪽은 (엔화환율이 떨어지고 있던) 2012년부터 구입하여 지금까지 구독하고 있으며, 그 이전의 과월호(2000~2011)는 구매대행을 통해 구했습니다.

    꾸준히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애독자님 같이 번역글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힘이 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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