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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前 북 쿠릴열도 위령회장 인터뷰 (下) ┣ 雜誌 歷史群像




  나가시마 아츠시長島厚(1921 ~ )

  전 일본육군 대위. 타이쇼 10년(1921) 야마구치 현 출생. 쇼와 16년(1941) 육사 제 55기 졸업. 만주 소재 전차 제 4연대를 거쳐 전차 11연대에 소속. 쇼와 19년(1944) 10월, 제 91사단 참모정보계에 소속. 쇼와 20년(1945) 8월에 벌어진 슘슈 섬占守島 공방전에서는, 군 사절軍使이 되어 소련군과 접촉, 교섭의 시작을 열었다. 전후 닛테츠 하치만 제작소 -> 해상자위대 -> 일본항공에 근무하였으며, 현재(2001년 당시)는 북 치시마(北千島, 역주 : 현재 러시아령 북 쿠릴 열도) 열도 위령회장.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5호(2001년 2월호) 146~151쪽의 기사인, 카야 토오루賀谷徹 씨가 집필하고 스기모토 야스오杉本保夫 씨가 사진을 찍은《인터뷰 나가시마 아츠시》를 번역한 것으로, 만주를 거쳐 북 치시마 열도에 장교로서 배치되어, 일본이 항복한지 3일 후인 1945년 8월 18일에도 소련 침공군과 일본 수비대가 공방전을 벌인 태평양전쟁 최후의 격전, 슘슈 섬 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 사절로 파견된 나가시마 대위의 인터뷰를 번역한 글입니다.    


《애투 옥쇄 / 키스카 철퇴의 보도를 듣고, 이제는 미군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다고 투지를 불태웠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토쿄東京에 체류하며 전차 부품을 조달한 나가시마 중위는, 명령대로 (홋카이도) 오타루小樽에서 연대에 합류했다. 미군 잠수함들이 물 만난 고기처럼 발호하고 있었기에, 승선하는 데 3개월이나 걸렸다. 이미 애투 섬은 옥쇄했고, 키스카 섬도 포기한 시기였다. 오타루 항에는 키스카에서 철퇴한 장병들이 도착하여, 알류샨 열도를 따라 홋카이도를 노리게 될 미군의 기세가 살결로도 느껴지고 있었다.

  "그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가시마 중위의 거짓없는 심경이다. 연대 장병들에게는 본토에 와서도 한 숨 돌릴 짬이 없었다. 홋카이도를 지키는 제 5 방면군 예하 제 91사단에 가담하기 위하여 전차 제 11연대는 그 해 5월, 치시마 열도 북쪽 끝에 위치하여 캄차카 반도 남쪽 끝과 고작 5km 떨어진 슘슈 섬占守島으로 이동했다. 

  미군 내습에 대비하여 민간인을 소개시키고, 진지를 구축하여 섬은 이미 임전체제가 갖추어졌다. 만주와는 달리 자재부족이 심각하였고, 식량조차 해산물에 기대어 자급자족을 도모하는 상태였다. 11연대가 훈련과 진지 구축으로 바쁘던 시기, 나가시마 씨는 그 해(1944) 10월, 대위로 승진한 후 사단 사령부의 참모부 배속(정보과)으로 전속되었다.

  "사단 사령부에는 전차를 상세하게 아는 인간이 없었기에, 제가 차출된 것입니다. 적은 미군으로, 상륙작전에는 대부분 전차를 투입하지요.

  그렇기에 최초의 업무는 상륙에 적절한 땅을 조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차가 양륙 / 운용가능한 곳은 어디인가. 경험에 의지하여 슘슈에서부터 샤시코탄 섬捨子古丹島에 이르기까지, 치시마 북부의 섬들을 빠짐없이 조사하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작은 섬들밖에 없었기에 전차의 운용에 적합한 곳은 슘슈와, 사단 사령부가 위치한 파라무시르 섬幌筵島 정도밖에 없었죠. 다수의 인원을 일거에 양륙시킬 수 있는 곳은 슘슈의 타케다하마竹田浜 해안 등을 비롯한 몇 군데 장소로 좁혀졌습니다.

  이에 따라 포병도 전차도, 슘슈 섬에 집중배치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전훈 속보를 읽고, 오타루에서 이야기를 청취하기도 하면서, 미군은 소련군보다 더 강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진지 구축과 훈련에 여념이 없었기에, 올 테면 와 봐라는 식으로, 사기는 드높았었죠."

  나가시마 씨의 예상이 맞았다는 건, 실제로 슘슈 섬의 타케다하마에 적이 상륙해 온 것으로 증명되었다. 그러나, 상륙해 온 적도 그 시기도, 나가시마 씨를 비롯한 91사단 사령부의 예상과는 전혀 판이했다. 쇼와 20년(1945) 8월 18일 새벽, 총 병력 약 8천 8백 멍의 소련군이 슘슈 섬에 상륙한 것이다.

  장병들은 이미 패전을 알고 있었고, 츠츠미 후사키堤不夾貴 사단장으로부터는 "일절 전투행동을 중단하라" 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망연해하면서도 병기를 처분하고, 사령부는【 미군 】의 군 사절을 맞아 대응할 것을 예하부대에 연락하는 등, 종전에 따른 준비를 진척시키고 있던 도중이었다.

  준비포격 이후, 농무를 헤치고 해안으로 밀려오는 상륙용 주정(舟艇, 소형 선박) 집단에, 타케다하마 주변에 배비되어 있던 야포 / 속사포가 불을 뿜었다. 보고를 받은 츠츠미 사단장은 자위를 위해 전군에게 전투배비를 명령했다. 해안의 토치카에서 발사되는 중기관포와 박격포의 반격도 시작되어, 소련군은 주정 13척을 잃는 큰 손해를 입었다. 그러나, 해안에 기어오른 잔여병력은 교두보를 간신히 확보하여, 내륙 4km 지점의 시레이 산四嶺山에 육박했다.

  소련군은 이 섬을 하루만에 점령하고, 파라무시르 해협을 제압, 이 곳을 책원지로 삼아 치시마 열도 전체를 조기에 확보해 둘 계획이었다. 그러기 위해, 슘슈 가도를 내려다볼 수 있는 요지인 시레이 산 수비대에 손해를 아랑곳하지 않고 맹공을 가했다.

  급박한 정세를 구원한 건 이케다 스에오池田末男 연대장 이하 전차 제 11연대의 돌격이었다. 약 40대의 전차는 시레이 산의 소련군을 유린하고, 해안으로 밀어내버렸다. 그 대신 연대는 전차의 절반 이상을 상실하고, 이케다 연대장을 비롯하여 총 인원의 1할 이상의 사상자를 내었다. 파라무시르의 사단 사령부에 속속들이 도착하는 전과와 손해... 안달복달하던 나가시마 씨에게, 츠츠미 사단장은 슘슈에 있는 보병 제 73여단에 가담하여, 사단과의 연락역을 맡으라고 명령했다. 소련군을 바다로 밀어내기 위해 착착 태세를 정비하던 각 부대. 나가시마 씨도 여단 본부에서 지휘를 보좌하며, 총공격의 개시를 기다렸다.

  "소련군 상륙은 그야말로 아닌 밤중의 홍두깨. 통신방수 등을 통해 어떤 징후가 포착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사령부에선 그런 이야기가 전혀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전차부대가 없었다는 보고가 있었기에, 상대 쪽도 계획없이 급작스럽게 상륙한 거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그렇다고 해도, 과거의 자대古巢였던 전차 제 11연대의 대전과에는 흐뭇해졌고, (그들이 입은) 손해는 정말로 원통했습니다. 73여단은 본부를 시레이 산 남쪽의 타이칸다이大觀台로 전진시켜, 11연대 등과 함께 해안 교두보를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남은 건 츠츠미 사단장의 공격명령뿐. 저도 동료들의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하에 공격이 개시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나가시마 씨에게 닿은 것은 생각지 못한 명령이었다.『군 사절로서 적 상륙부대 사령부로 가, 정전문서를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다.


《어째서 내가...(이런 일을 맡아야 하나) 하는 마음이 정직한 심정. 그래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혈기 넘치던 전우들을 설득해나가며 전선으로 향했습니다.》 

  18일 정오 무렵, 제 5방면군으로부터 91사단에『전투를 정지하고 자위전투로 이행하라』는 명령이 도착했다. 총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츠츠미 사단장도 상급부대의 명령이라면 따르지 않을 수 없어,『오후 4시를 기점으로 공격에서 방위로 전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나가시마 씨를 군 사절로서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딱히 러시아어를 잘 할 수 있던 것도 아니고, 그런 큰 임무는 보다 계급의 격이 높은 자가 하는 편이 옳다, 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참모장 같은 사람을 파견한다면, 그 후의 통제에 지장이 생길지도 모르죠. 뭐 적당한 인간이 따로 없었던 것이겠죠.

  나 자신은 전투를 중단한다는 데 대해, 당혹해하거나 반발심이 생겨난 건 아니었습니다. 공격명령이 내려지면 돌격하고, 군 사절이 되라고 하면 시키는 대로 한다. 명령대로 행동하는 게 바로 군인의 본분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사단 사령부로부터 자원하여 정전문서를 운반하던 소위와 상사曹長, 거기에다 2개 분대 규모의 호위대를 거느린 나가시마 씨는 오후 2시, 타이칸다이를 출발했다. 유탄들을 피해서 해안 교두보로 향했으나, 시간만이 계속해서 흘렀다. 지금도 전투는 계속되는 중이었기에, 여기에 휘말려드는 것을 피하여 멀리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었기 떄문이다. 거기에다 우군이, 때떄로 일행을 막아섰다.

  "시레이 산까지 2~3km 전진하는 데, 1시간 이상이 걸렸습니다. 길 곳곳마다 부상당하고 전사한 전우의 모습을 쳐다보면서요.

  어느 보병소대는 소대장 이하 거의 모두가 죽어버려, 살아남은 상병이 망자의 시신을 앞에 두고 "이제부터 적 속에 뛰어들겠다" 며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었죠. 사단장 명령이 닿지 않았던 것일까. 그런 자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설득하는데 대단히 애를 먹었습니다.    

  시레이 산에서도 전차 11연대를 지휘하던 이토 리키오伊藤力雄 대위가 "나가시마, (우리를) 가게 해주게." 라고 하며 부탁해 왔습니다. 하지만 내려진 명령은 전선을 정리하고 피해를 국한시키라는 것으로, 사단장의 "개죽음 하지 마" 라는 말이 가슴에 깊이 남아 있었죠. 그 기분은 이해했습니다만, 뜯어말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가시마 씨가 계속하여 슘슈 가도를 북상하여, 소련군과 접촉하였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문 후인 오후 7시 30분이었다.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아, 그들은 쉽사리 (나가시마 씨가) 군 사절이라는 것을 믿어주지 않았다. 총을 들이대는 등, 포로와 같이 취급받았다.

  초조함이 더해지던 나가시마 씨 앞에, 적 사령부로부터 한 소위가 파견되어 왔다.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어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웠다는 이 소위에게, 나가시마 씨는 온갖 고생을 하면서 자신이 군 사절이라는 것을 전하며, 정전교섭을 하기 위해 왔다는 것을 설명했다.

  "저는 러시아어를 전혀 몰랐고, 상대편의 일본어는 터무니없는 하수급. 구제 중학교에서 배운 (제) 영어와, 그의 일본어가 어우러진 짬뽕 의사소통이었습니다.

  지금 시대라면 서로가 잘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지만, 궁하면 통하는 것일까요. 나는 임무를 완수하고 싶은 일념 뿐이었고, 소련군도 손해를 입고 해안으로 밀려나 있었죠. 최대한 교섭을 성사시키고 싶다는 마음이, 쌍방에게 있었던 것이겠죠."

  소련군의 제 2 제단梯団 지휘관 아르튜빈 대령 밑으로 연행되어, 츠츠미 사단장의 정전문서를 넘겨주게 된 건, 다음 날 이른 아침이 된 후였다.

  그러나 소련군은 전차나 중화기를 계속해서 양륙하며, 교두보를 조금씩 조금씩 넓혀갔다. 양 군은 노려본 채, 정전교섭은 쉽사리 진전되지 않았고, 츠츠미 사단장이 항복문서에 조인한 것은 22일. 무장해제는 24일에 실시되었다. 일본군 약 8백 명 / 소련군 약 3천 3백 명의 사상자(역주 : 실제로는 일본 측 전사자 256명 / 부상자 762명. 소련 측 전사자 516명 / 부상&행방물명자 1051명입니다. 이 인터뷰에서는 일본군의 전과가 배 이상으로 심히 과장되어 있습니다) 가 나온 끝에, 전투는 드디어 끝이 났다.

  그러나, 나가시마 씨를 비롯한 91사단 장병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소련 국내의 수용소에서, 일본으로 돌아갈 그 날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았기 떄문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같이 돌아갈 수 없었던 전우들이 있었다는 점은, 정말로 유감스러웠습니다.》

  소련군이 치시마 북부를 제압하고, 수비대 장병은 쇼와 20년(1945) 12월, 블라디보스톡으로 연행되었다. 감옥에서 1개월이 채 안 되는 시간을 보낸 후, 츠츠미 사단장을 비롯한 사령부 요원 약 100명은 모스크바에서 꽤 가까운 마라드크스카야 제 58 강제수용소에 억류되었다. 나가시마 씨도 그 중 1명으로, 조잡한 숙사에서 잠들며 격렬한 중노동을 강제당했다.

  "수용소에서는 독일 병사들이 대략 100명 정도 먼저 들어와있었고, 마찬가지로 포로가 된 헝가리 병사가 소련 병사들의 지휘하에 포로 감독을 맡고 있었습니다. 독일인에게는 마을의 식료품 사무소에서 장부 기재를 한다든가 하는 비교적 편한 작업을 하게 했죠. 하지만 우리들은 한 단계 아래의 취급을 받으며, 나무 벌채 / 제재와 물을 긷는 일과 같은, 혹독한 작업을 해야 했죠.

  그렇지만 포로들 사이의 사이는 좋아서, 독일 병사로부터 "작업은 너무 열심히 하지 마라. 언제나 8할 정도로 힘을 빼서 일해라" 는 어드바이스를 받기도 했고, "탈출하려면 터키가 가까운 흑해로 향해라" 든가 하는, 포로 생활의 마음가짐을 배웠습니다. 거기에다 작업중에 총탄이나 수류탄을 발견한 적도 있었는데, 독일 병사가 "(그건) 우리들의 탄들이야" 라고 가르쳐주는 겁니다. 수용소가 있던 그 일대는, 과거 동부전선의 일각이었던 거죠.

  식료품도 적었지만, 저는 젊었으니 버텨낼 수 있었던 거겠죠. 거기에다 츠츠미 사단장의 느긋한 태도에도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때때로 나니와부시浪花節를 부르면서, 소련 병사가 "코란 외는 것 좀 그만해라!" 고 호통을 쳐도 느긋해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91사단의 장병들 중에선, 시베리아 극지의 수용소로 보내지거나, 더욱 더 가혹한 형무소에 보내져서, 그 곳에서 죽어간 자도 있었습니다. 깊이 파고들면, 운명이 작용했다고밖에는 할 수가 없군요."

  나가시마 씨는 수용소를 2번 옮기며 벽돌 제조와 농업 등, 다양한 작업에 혹사당했다. 그러나 타고난 체력이 있는데다, 배급되는 담배와 설탕을 모아뒀다 농가에서 빵이나 고구마로 교환하여, 어떻게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쇼와 23년(1948) 5월, 나홋카에서 출발한 철수선을 타고 드디어 귀국하였다. 

  귀국한 후 나가시마 씨는, 제철회사를 거쳐 해상자위대에 입대하였다. 함대 근무를 맡은 게 대부분으로, 자위함대의 주임정보막료까지 승진하였다가 일좌(一佐, 대한민국의 대령 계급에 해당함)로 퇴역하였다. 현재는 가족들과 함께 지내며, 죽어간 전우들의 명복을 비는 매일을 보내고 있다.

  "91사단이 슘슈 섬에서 용전했기 때문에 소련으로부터 홋카이도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장병들의 희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기에, 매년 8월의 위령제에서 감사를 올립니다.

  군대에 봉직한 이래, 저 개인으로서는 (결과는 어찌됐든)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온 것 같습니다.

  물론 마음에 걸리는 건 있습니다. 슘슈 섬에서 중병에 걸려 "적이 오면 전차에 태워 주십시오. 싸우다 죽고 싶습니다." 라고 자꾸 졸라댄 1기 아래의 장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해주지 못한 채, (그는) 그대로 병으로 죽어버렸습니다. 가능하면 바램을 이루어주고 싶었지 말입니다.

  거기에다, 참모장님을 비롯하여 강제수용소에서 귀국을 오매불망하며 죽어간 사람이 많습니다. 가능하면 격전에서 싸워 남아 모두가 같이 귀국하고 싶었습니다. 이 점이 정말로 아쉽군요.."

  이국에서 죽어간 장병의 원통함을 이야기할 때, 나가시마 씨의 어조는 애수를 띄었다. 그러나 군마 / 전차 / 그리고 전쟁 이후 호위함을 타고 평원과 해원을 누빈 것과, 전차 제 11연대의 기장記章이었던【 무사혼士魂 】을 이어받은 육상자위대 제 2사단 제 11 전차대대를 견학했을 때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데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말을 타든 전차를 타든 배를 타든, 기동성을 발휘하여 과감하게 조종하면서 돌아다닌 점에서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제 11대대에서는 기술적인 진보가 느껴지지만 분위기는 마찬가지. "선배" 로서 경의를 표해주었고, 전차병의 기풍도 전후가 된 후에도 변함없는 것 같습니다. 믿음직하다고 생각했죠."

  전후의 극단적인 반군反軍 풍조 속에서, 전쟁에 대해 일절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던 전직 장교들은 적은 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가시마 씨는 요청을 받으면 이야기하는 데 주저하지 않고, 스스로의 체험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전쟁 전체의 승패나 전후의 평가가 어찌되었든지, 언제나 자기 나름대로 전력을 다해왔다는 자부심이, 나가시마 씨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리라.

     

덧글

  • 2015/04/07 09:0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5/04/07 18:2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5/04/07 18:4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5/04/07 19:2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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