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칭관찰자

beholderer.egloos.com

포토로그



《역사군상》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침공전 (完)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4호(2000년 겨울호) 50~65쪽의 기사인《히데요시의 습격秀吉襲來》를 번역한 것입니다. 일본 전국시대 당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일본통일 마지막을 장식한 간토 호죠 씨關東北条氏 토벌전(=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을 중심으로 하여 쓰여진 기사로, 원저자는 카와이 히데오河合秀郞 씨입니다. 1차 저작권자와 마찰이 생길 시 삭제할 예정입니다. 그래도 퍼가실 때는 출처표기 부탁드립니다.


  오다와라 성문이 열리다

  이렇게 하여 6월 하순에 이르러서는,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의 지성支城 중에선 오시 성忍城 만이 함락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의지하려던 동아줄인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는, 6월 5일날 얼마 안 되는 호위무사들을 이끌고 히데요시 밑에 참진하여, 늦게 참전한 것을 사죄하고 완전히 굴복해버렸다.

  외교 / 전략 / 전술 모두에서 히데요시에게 뒤쳐짐으로 인해, 항전파들도 드디어 전쟁을 계속하려는 의욕이 꺾여져, 니라야마가 함락된 후 사신으로 갈 것을 명 받은 호죠 우지노리北条氏規가 항복을 권고. 하치오지八王子가 함락된지 11일이 지난 7월 5일, 드디어 항복할 수밖에 없다, 고 성 내에서의 의견이 일치했다. 같은 날, 호죠 우지나오北条氏直와 그 동생 우지후사氏房는 공격 측 타키가와 카츠토시滝川雄利의 진채에 들어가, 성 병사들의 목숨을 살려주는 것을 조건으로 항복을 수락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성 병사들의 목숨과는 별개로, 일전의 선전포고장에서 강조한 바 있는 항전파의 처벌을 요구하여, 호죠 우지마사北条氏政 / 호죠 우지테루北条氏照 / 마츠다 노리히데松田憲秀 / 다이도우지 마사시게大道寺政繁에게 할복을 명령했다. 코마키의 진小牧の陳에 발단을 두고, 나구루미 성 사건名胡桃城事件을 계기로 발발한 오다와라의 진小田原の陳은, 호죠 가문의 해체라는 결말로 커다란 전쟁의 막을 내렸다.

  히데요시는 당초부터 호죠 가문의 신종臣從을 요구했을 뿐으로, 결코 멸망시키는 것을 바란 건 아니다. 이 점은 전후처리를 봐도 명확하게 드러나듯이, 코야 산高野山에서 칩거, 근신을 명 받은 우지나오는 다음 해(1591) 2월에 시모츠케下野 지방 아시카가足利 등에 1만 석의 영지를 받은 바 있다. 그로부터 반 년만에 우지나오가 병으로 죽으면서 호죠 종가는 단절되었으나, 영주 가문으로서 존속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우지나오뿐 아니라, 우지노리도 약 9천 석의 영지를 하사받아 사야마 번狹山藩의 시조가 되었고, 타마나와 호죠 가문의 우지카츠氏勝도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부하가 되어 훗날 1만 석을 받았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대 호죠 가문이 붕괴하고, 해체되어 버렸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큐슈의 진九州の陳에 의해 시마즈 가문島津家도 해체되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별적으로 (주요 인물들이) 영지를 보장받은 데 불과하며, 개전 이전 외교 레벨의 조건에서 후퇴한 건 히고肥後 지방 절반과 휴우가日向 지방 절반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개별적으로 분배된 영지는) 일체화되어 상속되었다. (시코쿠의) 쵸소카베 가문長宗我部家도 토사土佐 지방을 보장받은 바 있다.

  그러나 호죠 가문의 경우, 문자 그대로 완전히 해체당해, 반 년동안 땅 한 뼘 주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결정적인 차이가 된다. 

  그렇다면, 호죠 가문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건 그렇고, 호죠 가문이 승리할 가능성은 있었을까?

  확실히 말하자면, 호죠 가문이 전쟁을 벌여 더 좋은 조건을 손에 넣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기본적으로 전쟁을 시작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개전 이전의 조건, 그것도 나구루미 성 사건 이전의 그것이, 가장 좋은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히데요시가 일본 서부西國를 완전히 평정한 이후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큐슈 평정 이전에 신하로 복속한 오다 노부카츠織田信雄 /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왜 혜안을 가지고 있었냐고 하면, 한 마디로 전략적인 파워 밸런스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 안에서 무리 없는 조건으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시마즈 가문도 쵸소카베 가문도, 일본 동부의 정세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히데요시의 마음 속 불안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본래 영지는 보장받은 것이다. 딱히 히데요시가 정에 약했던 것도, 평화주의자였던 것도 아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信長와 달리 철저한 현실적 합리주의자였다.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하고, 불필요한 건 폐기한다. 그 판단기준이 히데요시 자신의 주관에 의한 것이라고는 해도, 완전한 합리주의에 기반했다는 점에서 히데요시에겐 타협도 서슴지 않는 유연성이 있었다. 호죠 가문은 그 점을 충분히 이용하지 못하고, 노부카츠나 이에야스와 같이 실력에 상응한 타협점을 찾아내지도 못하였으며, 시마즈 가문 / 쵸소카베 가문과 같이 항복 시점에서 정상을 참작받을 여지를 만들지 못했던 것이다.

  이미 큐슈의 진에서 해외파병을 의식하고 있던 히데요시는, 국내에서의 싸움을 최소한의 비용으로 매듭짓고, 전국 규모의 군사개혁을 행할 계획으로 통일을 지향하고 있었다. 여러 영주들의 영지 확정과 켄지檢地를 통해 군역을 규격화시키고, 보다 대규모의, 그리고 장기에 걸친 침략전쟁을 감당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한다. 그것이야말로 히데요시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히데요시의 확고한 의향에서 보자면, 호죠 가문이 외교단계에서 신종해 오면 본래 영지를 보장받는 건 결코 꿈이 아니었다. 얌전히 소부지레이(惣無事令, 역주: 일본 국내 영주들 간의 전쟁을 금지한 명령)를 따랐다면, 멸망시킬 만한 껀은 전혀 없다. 일본 서부를 평정하고, 이에야스를 신하로 복속시킨 히데요시 앞에는, 호죠 가문이란 결국 그런 정도의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야스에게도 이기지 못한 호죠 가문이, 이에야스보다 더욱 가혹한 정세하에서 히데요시에게 대들려 한 시점에 승패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교적 차질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호죠 가문은, 혼인에 의한 인척관계의 입장에서 정성껏 도와준 이에야스를 비난하기까지 했다.

  그 고식적인 정책결정은, 호죠 소운(北条早雲, 역주 : 후 호죠 가문의 시조)의 임기응변적인 기회주의가 야성미를 잃은 자손들에게 그대로 지켜져 온 결과라고는 하지만, 너무나도 어리석고 덜떨어진 것이었다.

  당대에 이즈伊豆 / 사가미相模 지방을 가로채어, 센고쿠 시대의 효시가 된 소운. 그의 후손이, 당대에 텐카비토(天下人, 역주 : 천하의 주인)로까지 출세한 히데요시에게 멸망당함으로서,【 하극상 】이라는 단어로 상징되는 벼락 출세의 시대였던 센고쿠 시대는 얄궂은 결말을 맞게 된 것이다. 
 
     

덧글

  • Hyth 2015/03/29 18:08 # 답글

    역시 생존하려면 판세를 잘 읽어야(......)된단 교훈이군요
  • 3인칭관찰자 2015/03/29 18:56 #

    판세를 읽고서 비쌀 때 제 값 받고 팔아라... 는 말일까요. 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조훈 2015/04/06 22:52 # 답글

    잘봤습니다... 이거 재밌네요.
  • 3인칭관찰자 2015/04/07 08:54 #

    조훈님 오랜만에 뵙습니다(__) 재밌게 읽어주셨다니 기쁘네요.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통계 위젯 (블랙)

3958
460
346291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블랙)

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