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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침공전 (3)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4호(2000년 겨울호) 50~65쪽의 기사인《히데요시의 습격秀吉襲來》를 번역한 것입니다. 일본 전국시대 당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일본통일 마지막을 장식한 간토 호죠 씨關東北条氏 토벌전(=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을 중심으로 하여 쓰여진 기사로, 원저자는 카와이 히데오河合秀郞 씨입니다. 1차 저작권자와 마찰이 생길 시 삭제할 예정입니다. 그래도 퍼가실 때는 출처표기 부탁드립니다.

 

《호죠 종가 멸망》- 힘없이 붕괴된 호죠 측 지성망


  하코네 전선 붕괴하다

  3월 29일 새벽, 하시바 히데츠구羽柴秀次를 대장으로 삼은 토요토미 군 3만 5천 명은, 하코네 고개의 서쪽 입구를 봉쇄하는 위치에 있던 야마나카 성山中城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야마나카 성은 3배 ~ 5배의 공격군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받았으나, 수비병력 5천 명에 비해 공격 측은 그 7배에 달했다. 그러나 안개 속에서의 행동이 토요토미 군의 보조를 흐트러트렸기에, (공격군이) 히데요시가 키워낸 제장들로 구성되어 있었음에도 히데츠구는 긴밀한 연대를 결여한 채로 공격을 개시해야만 했다. 그 결과, 야마나카 성의 장병들은 예상 외의 대군에 맞서서 크게 건투하게 되었다.

  최초의 목표가 되었던 건, 서쪽으로 넓게 돌출되어 가도를 내려다볼 수 있는 외성인 타이사키 성채垈崎砦였다. 이 곳에는 원군으로 파견된 타마나와 성주玉繩城主 호죠 우지카츠北条氏勝가, 요리키인 마미야 야스토시間宮康俊 들을 비롯한 타마나와 부대의 정예들과 함께 입성해있었다. 우지카츠는 공격군을 충분히 끌어들여, 적이 성채 주변의 개방된 지형으로 몰려왔을 때 저격을 가했다. 전망이 좋지 않은 산림 속을 진격하던 토요토미 군의 산발적인 공격은, 이 저지사격 앞에 계속해서 격퇴당했다. 공격 측의 피해는 심대하여, 히데요시가 키워낸 무장 중에서도 비교적 거물이던 히토츠야나기 나오스에一柳直末가, 이 때 적탄을 그대로 맞고 전사하였다.

  그러나 압도적인 병력으로 밀어 붙이는 토요토미 군 앞에, 농성 측에서도 마미야 야스토시가 전사. 오후가 되어 타이사키 성채는 함락되었다. 우지카츠가 이끌고 있던 타마나와 부대의 잔여 병력은 이미 산노마루三の丸와의 연락이 끊겨 버렸기에, 그대로 오다와라小田原를 향하여 패주했다.  

  적의 접근경로를 가로막고 있던 타이사키 성채의 함락에 의해, 야마나카 성 자체에 대한 공격은 급속히 격렬해져 갔다. 고립된 야마나카 성은 일몰을 앞두고 함락되어, 혼마루本丸에 농성하여 마지막까지 저항한 성장城將 마츠다 야스나가松田康長는 전사했다. 호죠 류 축성술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는 야마나카 성은, 분투도 헛되이 고작 반 나절만의 전투로 함락당한 것이다. 그 원인은 말할 필요도 없이, 압도적인 병력차에 있었다.

  같은 날, 타카노스 성鷹之巢城도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인솔하는 3만 명의 토쿠가와 군에 의해 함락되어, 하코네 고개의 서쪽은 토요토미 군에 의해 완전히 제압당했다. 호죠 측 방어전략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서방 방벽은, 그 중앙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정말로 간단히 분쇄되고 만 것이다. 이 순간, 호죠 측이 성공을 확신하고 있던【 종심방어에 의한 기동반격 】이라는 계획은, 완전히 파탄났다.

  다음 날인 4월 1일, (하코네) 고개로 진출한 토요토미 군은 주변의 성채에 공격을 개시, 4월 2일까지 아시가라 성足柄城을 함락시키고 하코네 전선을 거의 완전히 제압했다. 토요토미 군이 돌파구를 열어 젖히지 않고 하코네 고개로 침입하였다면, 그 동쪽에서의 복격(伏擊, 매복해 있다 공격함)에 의해 격퇴당했을 가능성이 결코 적지 않다. 그러나 서방 방벽이 완전히 붕괴되고 복수의 루트가 확보된 상황 아래에서는, 오히려 (호죠 군이) 측면에서의 공격을 받고 궤멸당할 위험이 있었다. 호죠 가문 수뇌부가 오다와라의 기동 예비병력을 출격시키는 데 미적거림으로서, 복격이 성공할 가능성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오다와라에 배치되어 있던 예비병력을 투입할 마지막 기회는 날아간 것이다.

  히데요시는 전군에 진격을 명령하여, 자신은 (4월) 6일 날 소운사早雲寺에 들어가 그 곳을 오다와라 성 포위의 본진으로 삼았다. 주위가 거대한 외곽성루로 둘러싸여 있던 오다와라 성은, 5만 여 명의 예비병력과 수만 명의 징모병을 보유하면서 13만 명의 토요토미 군에게 포위당했다. 히데요시는 거기에다 이시가키 산성石垣山城의 축조 공사에 착수하여, 마치 하룻밤만에 지어진 것처럼 연출, 성 측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이는 성내에 대한 심리전임과 동시에, 아군의 여러 영주들에게 자신의 재력과 기술을 과시하는 시위적인 의미도 겸했다. 히데요시는 그 후도 다양한 이벤트를 반복하며, 이에 의해 공격군의 전의고양과 성 측의 사기저하를 촉진시키고, 더 나아가 토요토미 가문의 실력을 천하에 떨치려고 한 것이다.

  한편으로 호죠 우지노리北条氏規 이하 5천 명의 장병이 농성해 있던 니라야마 성韮山城에도, 오다 노부카츠織田信雄 이하 3만 5천 명의 병력이 할당되어 야마나카 성 공격과 동시에 공성전을 개시하였다. 니라야마 성은 이에야스와의 친분으로 알려진 우지노리의 제 2 본거지였다.

  마찬가지로 이에야스와 친한 노부카츠는, 우지노리가 호죠 가문 중에서도 친 이에야스파의 필두이자 토요토미 정권에 대한 공순恭順을 가장 강하게 주장한 자 중 하나라는 것에 대한 배려여서인지, 노골적인 공격을 자제하였다. 히데요시도 '이즈 반도는 봉쇄하는 걸로 충분하다' 고 생각한 듯, 야마나카 성을 반나절만의 맹공으로 강경히 함락시킨 데 비해 장기화하는 나리야마 성 공성전에서는 눈에 띄는 독전을 하지 않았다. 결국, 니라야마 성은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6월 24일까지 버텨내다가, 이에야스의 권고를 받아들여 성문을 열고 항복하게 된다.

  그 동안, 누마즈沼津를 출격한 수군 부대는 이즈 반도 서쪽 해안가를 제압하고, 그 남쪽 끝에 있는 호죠 측 수군의 근거지, 시모다 성下田城을 공격하고 있었다. 토요토미 측 수군 부대 1만 5천 명에 비해 시모다 성의 수비병력은 고작 6백 명이었다. 병력비는 25대 1. 승패는 싸우지 않아도 뻔한 듯 보였다.

  그러나 시모다 성의 장병들은 일격에 무너지기는 커녕, 남다른 끈기를 보이며 저항을 계속했다. 토요토미 측 수군 부대는 지형의 제약에 의해 대군이라는 우위를 살리지 못하고, 공략에 애를 먹다가 강공을 단념했다. 사가미 만相模灣에 진출한 수군 부대 주력은 오다와라 앞바다를 제압하여. 오다와라를 해상에서도 포위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으나, 주력으로부터 분리된 시모다 분견대는 4월 23일까지 발목이 묶였다가, 간신히 성문을 열게 할 수 있었다. 절망적일 정도로 열세였던 시모다 성의 저항은 전체적 귀추에서 본다면 미미한 것이긴 하지만, 토요토미 측 수군 부대의 움직임을 다소나마 지체시키고 그 전력을 일시적이나마 깎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때 이미, 사가미 지방의 태반은 토요토미 측에 의해 제압당해 있었다. 육로를 봉쇄당했기에 사가미 만에서의 해상이동에 기대던 호죠 가문은, 토요토미 측 수군 부대가 이만한 규모를 갖추고 투입되면서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제해권을 상실함에 따라, 후방의 무방비한 지성支城들에 원군을 보낼 수단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함락되어 가는 지성군支城群

  토카이도東海道 방면에서 전쟁이 시작되기 10일 전, 나카센도中山道 방면에서는 이미 토요토미 군의 별동대가 마츠이다 성松井田城을 향해 진격을 개시하고 있었다. 그 전날, 우스이 고개碓氷峠를 넘어 코즈케上野 지방으로 침공한 나카센도 별동대는 카가加賀 지방의 절반 / 노토能登 / 엣츄越中 3개 지역을 다스리는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의 군대 1만 8천 명을 주력으로 삼아,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의 8천 명과,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를 비롯한 시나노 지방의 영주들 / 토쿠가와 군의 별동대 등으로 이루어진 혼성부대였으나, 그 모두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 타케다 신겐武田信玄에 의해 조련된 기동력 높은 군대로, 호죠 측의 대응을 상회하는 기세로 (호죠 측의) 연대를 분단시켰다.

  가장 먼저 두텁게 포위당한 마츠이다 성은 성장 다이도우지 마사시게大道寺政繁 이하 전원이 견고하게 지키며 저항했으나, 4월 17일 날 쿠니미네 성國峯城이, 19일에는 우마야바시 성廐橋城이 함락되었기에, 다음 날인 20일에 항복했다. 그 결과, 미노와箕輪 / 이시쿠라石倉 등의 여러 성도 줄이어 항복하여, 작전개시로부터 1개월여만에 호죠 세력은 코즈케 지방에서 완전히 구축되었다.

  그 무렵 토카이도 방면에서는, 체면을 잃은 채 오다와라로 돌아가는 것을 꺼리던 호죠 우지카츠가 4월 21일에 본거지인 타마나와에서 항복하였다. 이에 의해 무사시武藏 방면으로의 진격이 가능해지면서, 히데요시는 즉각 새로운 별동대를 편성했다. 아사노 나가요시(淺野長吉, 역주 : 훗날의 아사노 나가마사淺野長政)를 비롯한 측근 행정관들을 중심으로 삼은 동방 공략부대로, 이 별동대에게는 히데요시의 서명이 들어 있는 금제용 푯말을 대량으로 가지고 가도록 했다.

  동방이 여러 성들을 공략하고 선무공작을 하기 위해 (4월) 26일에 오다와라를 출발한 이 별동대는, 토쿠가와 군에서 빼내온 전투부대를 선두에 세워 진격, 다음 날인 27일에는 에도 성江戶城을 공략했다. 29일 경에는 옛 토네 강利根川 하구를 현재의 사이타마 현 남동부로 향하여 우회하고 맞은 편 강가로 건너가 다시 남하, 코가네 성小金城 / 우스이 성臼井城 / 누노카와 성布川城 / 사쿠라 성佐倉城 등 치바千葉 / 하라原 등의 호죠 가문 배하에 있는 영주들과 유력 호족들의 본거지를 차례차례 투항시키고, 시모우사下總와 카즈사 북부北上總를 제압했다.

  그리고 5월 중순에는 히타치 지방의 에도사키 성江戶崎城을 공략한 후 서쪽으로 반전, 22일에는 무사시 이와츠키 성岩付城을 포위하여 그 날 내로 함락시켰다. 나가요시가 이끄는 동방 별동대는 1개월도 지나지 않은 사이에, 호죠 가문의 (간토) 동방 지배권을 완전히 붕괴시킨 것이다. 이 시기, 나카센도의 별동대가 무사시 북부에서 꾸물거리고 있던 걸 감안하면, 이 동방 별동대의 전격적 작전이야말로 호죠 가문의 숨통을 끊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기실 동방 별동대가 이 정도로 진격할 수 있었던 배경은, 오다와라의 후배지라는 인식에 의해 동방 지배지역의 방어가 헐거웠던 데다, 무사시 지방처럼 유력한 호죠 피붙이가 잔류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조직적 저항이 불가능했으며, 무리한 총동원에 의해 야전부대로서의 기동력이 현저히 저하해버렸다, 는 곡절이 있었다. 호죠 영지에서 상비병력적인 의미를 가진 군역자들을 최우선적으로 오다와라에 농성시킨 결과, 시모우사나 카즈사 지방에서는 제대로 된 병력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기동력 부족은 코즈케에서도 같은 결과를 낳았으며, 무사시 지방에서도 호죠 측의 반격을 불가능하게 했다.

  죠슈(上州, 코즈케 지방) 평정을 완료한 나카센도 별동대는, 항장降將 다이도우지 마사시게를 향도역으로 삼아, 쉴 새 없이 무사시로 침입했다. 카마쿠라 가도鎌倉街道를 남하한 별동대는 무사시 북부에서부터 코즈케에 걸친 군사지휘권을 장악하고 있던 호죠 우지쿠니北条氏邦의 본거지 하치가타鉢形로 향하여, 그 지성支城들을 차례차례로 공략한 후, 군대를 남쪽으로 돌려 마츠야마 성松山城으로 창끝을 돌렸다. 지성 공략 단계에서, 우지쿠니의 격렬한 저항이 예견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마츠야마 성은 카와고에 성河越城과 함께 계속해서 성문을 열었기에 이와츠키 성을 공략한 동방 별동대와 합류하여 5만 여 명의 대군으로 불어나, 5월 29일에는 하치가타 성에 대한 공격태세가 갖추어졌다.

  이 때 우지쿠니가 하치가타 성에 농성하게 된 데 대해서는, 연초의 회의석에서 낸 출격책이 각하당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으나, 실제로는 죠슈 방면의 책임자가 오다와라에 농성해 있어서는 안 되었다는 점과, 오다와라에 달라붙은 적군의 배후를 차단하고 각 지성의 부대를 통괄지휘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토요토미 군의 나카센도 별동대는 착실히 성들의 항복을 받아가면서 예상을 상회한 속도로 진격하였기에, 우지쿠니는 일부러 고립되기 위하여 농성한 것과 같은 결과가 펼쳐지고 있었다. 토요토미 군이 하치가타 성하로 밀고 들어왔을 때는 이미 오다와라 성은 포위되어 있었고, 기동 예비병력의 성외 출격은 불가능해져 있었다. 호죠 측의 종심방어구상은 완전히 파탄났고, 우지쿠니는 고립무원의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다.

  우지쿠니는 기동력이 떨어지는 징집병을 전선의 지성들에 배치하고, 하치가타 본성에는 군역자들로 이루어진 정예 3천 명을 남겨놓았다. 그러나 공격군은 5만 명의 대군으로, 성이 함락되는 건 피할 수 없었다. 결국은 며칠을 버틸 수 있으냐였다.

  실제로, 우지쿠니와 하치가타 성 장병들의 저항은, 병력 비율을 감안한다면 '선전했다' 고 말하기도 부족할 정도다. 마에다 / 우에스기 양군을 주력으로 삼아 펼쳐진 맹공을 10일 이상에 걸쳐 견뎌내었으며, 항복한 것은 6월 14일이었다.  

  하치가타 성을 접수한 토요토미 군은, 다시 두 갈래로 나뉘어 행동을 개시했다. 동방 별동대는 동쪽에 있는 오시 성忍城으로 향하고, 나카센도 별동대는 남쪽의 하치오지 성八王子城으로 향한 것이다. 

  이 두 성을 함락시킨다면 무사시 지방 제압은 완료된다. 고립무원이 되어 사기가 침체상태일 오다와라 성에 대해, 전병력을 집중한 총공격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거기에다 오시 성은 우에스기 켄신이 공략하지 못한 난공불락의 수성水城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하치오지 성은 호죠 우지테루北条氏照가 스스로의 본거지로 삼아 강화 / 확장을 계속해 온 돌담石垣 군에 의해, 철벽의 방어를 자랑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를 항복시킨다면 성내의 장병에 미칠 심리적 영향은, 계산하기 힘들 정도이리라.

  그 하치오지 성에 대한 공격은 6월 23일 새벽에 시작되었다. 우지테루는 병사들을 이끌고 오다와라 성에 농성해야만 했기에, 하치오지 부대의 병력은 광대한 성역을 지키기에는 상당히 수가 부족했다. 성 측은 완강히 저항했으나, 마에다 / 우에스기 양군의 맹공 앞에 한 번 전열이 무너지자, 급격한 추격을 받고 패주하는 성 병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특히 징모병들의 태반은 산을 따라 도주했다. 성 측은 계속해서 구루와(曲輪, 성곽의 구역)를 빼앗긴 끝에 혼마루로 몰려, 전투는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오후에 혼마루가 함락되면서 종결되었다. 고작 하루도 버텨내지 못한 것이다. 이시가키를 공격하는 데 익숙해진 마에다 군과 / 산성에 익숙한 우에스기 군의 조합 앞에, 우지테루가 자랑하던 돌담으로 쌓은 산성은 의외의 나약함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오시 성은 그렇지 않았다. 동쪽과 남쪽 두 방면으로 유로가 갈리는 토네 강의 분기점과, 아라카와 강荒川의 상류까지 틀어쥐고 있는 곳에 위치한 오시는, 하천교통의 요충임과 동시에 타테바야시館林를 경유하여 시모츠케 지방 사노佐野로 이어지는 루트와 / 우마야바시 방면으로 직접 향하는 루트 / 거기에다 하치가타 성으로 가는 루트가 집중된 육상교통의 결절점이기도 했다. 전략적으로는 유우키 가문結城家이 히데요시에게 신종臣從하였다는 점도 한 몫하여, 이 땅을 제압한다면 호죠의 영지를 토네 강 선에서 동서로 분단시켜, 시모우사 북부의 호죠 측 거점인 코우가 성古河城 등을 고립시킬 수 있다.

  교통의 차단을 최우선으로 생각한 히데요시는 타테바야시를 막 함락시킨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가 이끄는 별동대를 전진轉進시켜, 오시 성에 수공水攻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수공을 위한 제방 건축은 6월 7일에 시작되어 완성되자마자 즉시 물이 차기 시작했으나, 그 직후인 16일에 폭우가 내리면서 제방의 일부가 무너지는 사태가 일어났다. 거기에다 성이 있는 지역보다 그 동쪽이 지대가 낮았기에 성내의 피해는 기대하던 것보다 많이 미미했다.

  결국, 미츠나리 등의 타테바야시 별동대에다 아사노 나가요시들의 동방 별동대가 합류하였음에도, 오시 성은 오다와라 성이 항복한 이후까지 버텨내다가, 7월 16일 날 성주 나리타 우지나가成田氏長의 명령에 의해 드디어 성문을 열게 되었다.【 하룻밤에 지은 이시가키 산성 】과 마찬가지로 다분히 시위적인 색채가 짙었던 이 공성전은, 결과적으론 성 측의 이름을 드높였고, 히데요시를 감싸고 책임을 뒤집어 쓴 미쓰나리가【 전쟁에 서툴다 】는 오명을 얻게 한 채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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