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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침공전 (2)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4호(2000년 겨울호) 50~65쪽의 기사인《히데요시의 습격秀吉襲來》를 번역한 것입니다. 일본 전국시대 당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일본통일 마지막을 장식한 간토 호죠 씨關東北条氏 토벌전(=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을 중심으로 하여 쓰여진 기사로, 원저자는 카와이 히데오河合秀郞 씨입니다. 1차 저작권자와 마찰이 생길 시 삭제할 예정입니다. 그래도 퍼가실 때는 출처표기 부탁드립니다.

 
《개전준비》- 전략 / 전술로 보는 호죠 가문의 전통과, 히데요시의 숙련

  병용된 거점방어와 종심방어

  종래의 호죠 가문은,【 영지의 두터움(깊숙함) 그 자체를 이용하여 적의 소모를 유도한다 】는 센고쿠 시대로서는 상당히 특이한 방도를 방어전략의 핵심으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북방의 적, 즉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에 대해 특히 유효하게 기능하였다. 

  그러나 카미카타(上方, 쿄토 / 오사카 등을 비롯한 일본 중부 일대)에서 침공해 올 히데요시가 상대라면, 그 방어전략은 중대한 결함을 드러낼 위험이 있었다. 토요토미 군의 주요 공세축은 토카이도東海道와 나카센도中山道에 집중될 것이 확실했는데 특히 토카이도는 병량조달과 수송이 편리하다는 점에서 주력 부대가 진격하기에 최적으로, 토요토미 군의 태반이 토카이도를 진군하리라는 건 호죠 측에서도 용이하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호죠 가문의 영지가 서쪽으로부터의 공격에 노출된다는 걸 의미한다.

  호죠 가문의 심장부인 영지 서부가 정면으로 침공당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한다면, 종심방어에 필요할 만한 영지의 깊이를 확보하는 건, 지리적으로 사실상 불가능하다. 오다와라小田原에서 코 앞의 거리에 있는 스루가駿河 / 사가미上模 접경의 산악지대는 어떤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반드시 사수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이즈伊豆 지방과 사가미 지방을 잇는 결절점에 위치한 하코네 고개箱根峠는, 이즈 북부에서부터 사가미 서부에 걸쳐【 서방 방벽 】이라고 부를 만한 접경 지대 성새군의 목이 되는 긴요한 지점으로, 이 곳이 토요토미 군에게 돌파당하면 오다와라에 이르기까지 거치적거리는 지형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사가미와 이즈가 분단당하게 된다. 하코네 고개와 서방 방벽을 지켜낼 수 있는가 하는 여부가 호죠 가문의 명운을 좌우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이러한 상정에 기반하여 드디어 호죠 가문 수뇌부가 작전방침을 굳힌 건, 텐쇼 18년(1590) 1월 20일 연두의 회의(評定, 효테이)에서였다. 

  그 날, 카와고에 농성전의 영웅【 키하치만자에몬黃八幡左衛門 】호죠 츠나시게北条綱成가 죽은 후, 호죠 일가 최고의 전술가로 간주되던 호죠 우지쿠니北条氏邦는, 총력을 기울인 출격책을 주장했다고 한다.

  이 떄 호죠 쪽에서 동원한 병력은, 토쿠가와 가문德川家과 우에스기 가문이 동시에 쳐들어와도 능히 격퇴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여유병력을 성에 묶어두지 말고, 기동병력으로서 공격에 돌려야한다는 발상은, 당연히 생겨날 만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지쿠니의 책략은 그 점을 지적한 공세방어작전이었다.

  호죠 군이 대거 출격한다면, 생각할 수 있는 작전은 이하의 3가지이다.

  하나는, 다테 가문伊達家와의 연대를 전제로 한 에치고越後 침공이다. 이는 다테 가문과 밀약하기에 따라서는 그 병력을 이용할 수 있으므로, 그렇게 많은 병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에스기 가문을 츄에츠中越 ~ 카에츠下越에 분단시키게 되므로, 다테 군과 협동하여 토요토미 군을 시나노 강信濃川 강가에서 요격할 수 있게 된다. 인심장악에 기민한 히데요시라면, 다른 영주 가문들에 대한 체면상, 우에스기 가문의 궁지를 못 본척 할 수 없어 반드시 대병력을 호쿠리쿠에 파견할 것이므로, 이는 호죠의 영지에 대한 위협을 대폭 줄여줄 수 있을 것이었다.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건, 시나노信濃 / 카이甲斐 / 스루가, 측 토쿠가와 영지로 침공하는 것이다. 호죠 가문은 텐쇼 10년(1582) 당시, 병력적으로 (토쿠가와 군의 그것을) 우세하면서도 토쿠가와 군의 우월한 화력 앞에 패퇴한 바 있다. 그러나 그 후의 화력증강은 볼 만하여, 텐쇼 17년(1589) 시점에서는 충분히 대항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병력적으로 우세하기만 하면 혹 이에야스가 직접 지휘하는 군대에는 이길 수 없다고 해도, 세 방면에서 동시에 침공한다면 그 중에서 두 방면에서 이길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리고 우에스기 군을 다테 군에게 견제시킨다면. 영지를 비워놓고 출격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며, 그 경우는 압도적인 우세를 확보하는 것도 꿈은 아니었던 것이다.

  마지막은, 총력을 다해 스루가 지방으로 쳐들어가 스루가 동부와 서방 방벽의 이중 방어선에서 토요토미 군과 대치하는 것이다. 이것은《칸핫슈코센로쿠關八州古戰錄》에서 우지쿠니가 주장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책략으로, 회의 참석자들의 과반이 한 번은 찬성했다고 한다.

  이것까지는《코센로쿠》에 적혀있지 않지만, 이 경우도 호쿠리쿠 방면을 다테 군이 견제함으로써 조건이 상당히 달라진다. 예를 들어 전력을 다해 치고 나갔다면, 간토 북부北關東는 무방비 상태가 되어, 우에스기나 사나다가 마음껏 날뛰는 데 눈을 감아야만 한다. 말하자면 토요토미 쪽의 대규모 별동대가 파견된다면, 얼마 안 되는 수비병력만으로는 지탱할 수 없다. 영지를 비워두고 스루가로 출병한다는 건, 북쪽으로 돌아서 침입해 올 적군에게 오다와라를 위협받을 위험이 있었다. 이 세 가지 방책 모두,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의 동향에 좌우되는 부분이 결코 적지 않았다. 마사무네가 호죠 편에 서서 행동해 주리라 쳐도 끝까지 토요토미 측의 대군을 상대로 버텨내주리라 보는 건 힘들었고, 혹시나 마사무네가 방관하거나 토요토미 측에 가담한다면 일순간에 모든 것이 파탄나는 부류의 책략이었다.

  따라서 호죠 측은, 출격한다고 해도 최종적으로는 화해로 끝맺을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일전을 벌여 승리한다고 해도, 그 승리를 외교적인 성공 - 즉 화해로 결부지어야 할 필요가 있었고, 거기에다 그 기회는 극히 한정적이었다. 그리고 그 얼마 안 되는 화해의 기회조차, 승리로 인해 항전파들이 힘을 얻으면 간단히 놓쳐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호죠 가문이 실제로 선택한 길은 이 세 가지 출격책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모든 적을 오다와라로 끌어들여 친다. 】그것이 호죠 가문 수뇌부의 최종적인 작전방침이었던 것이다.

  이 방침을 주장한 것이 마츠다 노리히데松田憲秀로, 그가 염두에 두었던 건 말할 필요도 없이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과 타케다 신겐武田信玄을 격퇴한 과거의 실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전력이 있었기에, 회의의 양상은 일변하여 농성작전이 결정된 것이다.

  무엇보다 이 농성작전은 과거의 사례와 달리, 거점방어와 전통적인 종심방어를 절충한 것이었다. 천험의 요새인 서방 방벽에서 토요토미 군 주력을 저지하고, 나카센도에서 남하해 오는 토요토미 군 별동대를 서 코즈케 - 무사시 지방에 걸친 영지의 깊숙함을 이용하여 고립시켜, 각개격파한다는 작전이다.

  코즈케 / 무사시의 지성들支城衆은 각자 성에 틀어박혀 엄중히 수비하며, 적의 대군을 점감적으로 구속하고, 가능하다면 단계적으로 소모시켜, 영지 깊숙히 유인당한 적이 군량을 모두 소모했을 때 오다와라에 집중된 강력한 기동예비병력이 반격하여 격파한다. 그리고 그만한 시간을 서방 방벽에서의 방어전투를 벌이며 번다. 이것이 작전방침의 골자였다.

  이러한 방침에 준하여, 호죠 가문 수뇌부는 총동원 계획으로 대대적으로 증원된 병력 중에 거의 2만 명 정도의 대병력을 서방 방벽을 수비하는 데 투입했다. 특히 그 중핵이 될 니라야마 성韮山城 / 야마나카 성山中城 / 아시가라 성足柄城에 각각 수천 명의 원군이 파견되어, 엄중히 방비하게 하였다.

  그리고, 시모츠케下野 / 무사시 / 시모우사下總 / 카즈사上總 지방 등에 존재하는 여러 지성들에 대해서는, 증원에 의해 남는 병력을 편성하여 오다와라에 농성시켰다. 태반은 성주 자신이 주력을 이끌고 참진하여, 그 병력은 수만 명에 달했다. 오다와라에 있던 부대 등 본래 오다와라 성에 농성하기로 정해져 있던 병력과 합치면, 오다와라 성을 방비하는 데 필요최저한의 병력을 묶어둘 수 있으며, 거기에다 5만 명 전후의 기동예비병력을 확보하게 된다.

  화기火器 면에서도 호죠 가문의 준비는 나태하지 않았다. 텐쇼 년간(1573 ~ 1591) 후기에 들어선 후의 호죠 가문은, 조총鐵砲 장비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장창보다도 투사병기 - 특히 조총 - 를 중시한 무장 전환을 시도했다. 히데요시와의 전쟁이 걱정되기 시작한 텐쇼 15년(1587) 무렵부터는, 여기에다 오오텟포大鐵砲의 주조에 착수하며 공성전이나 농성전에서의 화력증대를 추진시켰다. 총동원으로 인해 2배 이상으로 병력이 불어났다고는 해도 화기 장비율은 그 때와 거의 비슷하여, 이는 통상의 동원체제였다면 화기 장비율이 거의 2배로 증가했다는 걸 의미한다. 오다와라 성에서는, 간토에선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조총들이 배비되었던 것이다.


  위신을 건 히데요시의 병력 집중 전략 

  호죠 측의 대동원에 맞선 히데요시의 동원명령은 실로 기묘한 것이었다. 히데요시의 직할령이 많은 고키나이(五機內, 야마시로山城 / 야마토大和 / 카와치河內 / 이즈미和泉 / 셋츠攝津 5개 지방)에는 100석당 반인(0.5명) 역. 1만 석을 가진 자는 고작 50명만 동원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 츄코쿠中國 / 시코쿠四國 지방에 대한 군역은 100석당 4인 / 키나이에서 동쪽으로는 100석당 6인, 이에야스의 영지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스루가 / 토오토우미遠江 / 미카와三河 / 카이 / 시나노 5개 지방에는 100석당 7명이었다. 요약하자면, 큐슈 이외의 도자마 영주들, 특히 일본 동부의 영주들을 집중적으로 동원시켜, 철저히 혹사하려는 방침이었다.

  특히 이 군역의 극단적인 격차는, 흔히 말하는【 타이코 토지조사太閤檢地 】의 실시상황에 크게 좌우된 것이었다.

  이에야스의 영지는 훗날의 토지별 데이터로 추량하면 120만 석 정도로, 이를 통해 계산해 보면 할당된 병력은 8만 4천 명이나 된다. 그러나 이 시기는 아직 토지조사 사업이 과도기일 때로, 예를 들면 모리 가문이 텐쇼 19년(1591)에 종료된 토지조사에 의해 거의 76만 여 석의 타출(토지조사에 의한 영지증가분)이 있었으면서도 (고작) 112만 석의 슈인센 정도의 숫자로밖에 파악되지 않았다고 생각되기에, 일견하면 터무니없이 높아 보이는 이 군역은 결코 과중한 군역이었다곤 할 수 없게 된다. 사실, 이에야스는 4만 명에 미치지 못하는 병력밖에 동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히데요시 세력권에서의 동원이 너무 가벼웠던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고키나이에서 동원한 병력은 극단적으로 적어서, 히데요시의 신변을 경호하는 호위 기마무사들 정도의 규모밖에 없었다. 히데요시의 새로운 기준에 의한 토지조사가 일찍부터 진척되고 있던 키나이에서는 타이코 토지조사의 데이터를 그대로 원용할 수 있었으나, 그 경우의 실제 군역량은 영지의 6할 정도로 동원병력은 7천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히데요시가 키워준 영주들은 이 단계에서는 대부분이 주코쿠 지방 동부 / 시코쿠 / 큐슈 등에 분포하였기에, 이러한 지역에도 군역은 대단히 낮게 설정되었다. 시코쿠의 진四國の陳 / 큐슈의 진九州の陳에서의 동원에 비해, 도자마 영주와의 비율은 명백히 역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쪽도 토지조사 사업의 데이터를 베이스로 하여 행해진 조선朝鮮에서의 군역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국내에서의 전투라는 점도 감안한다면, 대단히 가벼운 동원이었다. 즉 토요토미 측의 동원은, 숫자가 가진 이미지보다 상당히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훗날에 있을 한반도 침략을 미리 의식하고 있었기에 그런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으나, 어찌됐든 아직 상당한 여력을 남긴 병력동원이었다는 것만은 틀림이 없어, 필사적으로 긁어모은 호죠 측의 20만과 토요토미 측의 20만은, 그 질質, 즉 전투력과 기동력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났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다 히데요시는, 큐슈의 진에서 완성의 영역에 도달한 병참 시스템을 보다 대규모적으로 재편성하고, 후방수송과 병참계획을 나츠카 마사이에長束正家에게 일임했다. 이에 의해 전투부대가 현지조달과 물자집적의 수고로부터 해방되어, 토요토미 군의 기동력은 더욱 향상, 공세한계점도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이 질적 우위를 살리기 위한 전격적 침공을 계획하고 있었다.

  호죠 측의 서방 방벽과 지성망의 종심을 이용한 중후한 방어진에 맞서, 히데요시는 호죠 측의 예상대로 토카이도를 주력부대의 진격로로 삼고, 홋코쿠 가도와 나카센도의 합류지점에 홋코쿠(호쿠리쿠北陸 / 시나노信濃 / 코즈케上野) 군을 주력으로 삼은 대규모 별동대를 파견, 서쪽에서 호죠 군 주력의 주의를 끌면서 북방에서부터 후방을 교란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거기에다 해상으로부터는 수군 부대를 진출시켜, 이즈의 (호죠 측) 수군 근거지와 사가미 만을 제압하여 호죠 측의 해상교통망을 차단할 예정이었다.

  적 주력을 아군 주력으로 구속시키고, 우세한 별동대를 이용해 적 별동대를 압도, 적 주력을 패주시키거나 항복으로 몰아넣는 건, 츄코쿠 일대에서의 대 모리전쟁對毛利戰爭, 즉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배하에 무장으로 있을 시기부터 히데요시가 가장 득의로 삼은 전술이자 전략이었다. 타카마츠 성高松城 포위에 이르기까지의 빗츄備中 침공작전 / 코레토 (아케치明智) 미츠히데惟任光秀와의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戰い /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와의 시즈가타케 전투踐ケ岳の戰い / 코마키의 진 / 큐슈의 진 모두가 같은 전술, 전략의 재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유일하게 이에야스에게만 고배를 마시는 경험을 했다.

  그 군사적 재간만을 높이 평가받아 입신한 히데요시에게 있어 자신의 능력을 부정당한 것과 같은 코마키 진의 결과는, 굴욕 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에야스의 면전에서 같은 전략 / 전술을 보다 화려한 방법으로 성공시키는 건, 국내 최후의 전투가 될 이 대 호죠 전쟁에서 히데요시가 무엇보다도 중시한 현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히데요시가 이를 달성하기 위해 집결시킨 병력은 호죠 측을 경악하게 만들 정도의 규모에 달해 있었다. 누마즈沼津 일대에 숙영한 토카이도를 거쳐 온 토요토미 군 주력부대는 거의 17만 명을 헤아렸고, (시나노) 코모로小諸 부근에서 합류를 마친 나카센도 별동대도 3만 5천 명, 스루가 만에 들어온 쿠키九鬼 / 이요(伊予, 옛 코우노河野 수군) / 아와지(淡路, 옛 아타케安宅 수군) / 쵸소카베의 수군 부대는 1만 5천 명에 달했다. 거점방어와 종심방어를 조합시켰기에, 병력적으로는 길항하고 있던 호죠 측이 결과적으로 분산배치를 한 데 비해, 토요토미 쪽은 극단적인 집중배치가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토카이도 방면에서는 총 병력에서 거의 2대 1의 우세를 확보했다. 서방 방벽에 대해서는 8대 1 이상의 우위였다.

  누마즈로 본영을 진출시킨 히데요시는, 이 압도적인 병력차를 현지에서 확인하자 즉각 작전계획을 수정했다. 오다와라 서쪽의 산악 성새군을 압도적인 병력으로 일거에 공략, 그대로 오다와라로 진격하여 오다와라 성을 포위함으로써, 호죠 군 주력을 완전히 구속해 버리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전술적으로는, 일점에 집중된 병력으로 송곳과 같이 돌파구를 열어 호죠 측의 니라야마 / 야마나카 / 아시가라 이상 세 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방어 네트워크를 분단시키고 밀어 젖혀, 이곳으로부터 대군을 밀고 나간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히데요시다운 실용일변도로, 그다지 특별한 기술/계략은 쓰지 않았으나 견고하기 짝이 없는 확실한 전술이었다.

  오다와라 성과 함께 호죠 군 주력을 구속할 수 있다면, 그 후방에 펄쳐진 호죠 가문의 세력권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된다. 나카센도를 남하하는 별동대에 더하여 만 단위의 별동대를 여러 개 침투시킬 수 있다면, 오다와라의 가지와 나뭇잎을 말려 죽이는 건 손쉬운 일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열세를 맛보아 오던 사타케佐竹 / 우츠노미야宇都宮 등 간토 영주들의 활동에도 기대를 걸 수 있다. 나가쿠테長久手에서 이에야스에게 패배함으로써 마가 낀 득의의 기술을 이 구상에서 부활시킴으로서,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에 의해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고, 정신적으로 우위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손에 넣은 것이다.     

     

덧글

  • 도연초 2015/03/27 21:11 # 답글

    1. 그러고보면 하코네 고개가 뚫릴경우 관동의 노른자위가 털린다는 소리면... 검각(검문관)과 면죽관을 너무 믿었던 촉한과 유수구와 우저(건업 부근의 험지)를 믿었던 동오의 사연과 겹치네요;

    2. 원숭이가 즐겨쓰던 공성전술이 바로 포위후 보급이 차단된 상황을 만들어 여유롭게 기다리는 거였죠; 특히 예전에 아카마쓰 일가가 주인이었던 산요 동부를 두들기던 시절 말입니다. 대표적으로 벳쇼 나가하루, 시미즈 무네하루 등이 이 말려죽이기에 걸려들어 결국 굶주리는 족경, 주민들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할복으로 최후를 맞아야만 했으니까요.

    3. 사실상 원숭이의 원정은 오다와라 공성전이 사실상 끝(이후로는 쥬라쿠테이에 머무름)이었던데다 너구리가 오슈 반란 진압(쿠노헤 마사자네의 난) 당시 지나칠 정도로 군대를 파견했던 것도 조선정벌 안가려는 신의 한 수가 아니었던가 싶어요;(원숭이가 작정하고 너구리의 부하들에게도 동원령을 가하면 '우리는 나이후 사마에게 매인 몸이라 그분의 동의가 없으면 큰일남'이라고 뻗댈 테고...) 그래도 마지못해 천여명의 아시가루만 히젠 히라토에 보내준 게 끝이고 그나마도 이들이 무츠 다이묘들처럼(다테 마사무네 제외) 조선 땅은 밟아보지 못했던 거를 감안하면 말입니다.

    4. およそ芸는 찾아보니 허장성세나 겉으로 보기엔 그럴 듯하다는 의미인 듯한데..... 음.... 문맥상으로 '겉으로는 그럴듯한 점이 없으나, 견고하기 짝이 없는 확실한 전술이었다'라고 하면 문맥이 맞아떨어질텐데 확실하지 않아서...
  • 3인칭관찰자 2015/03/28 07:46 #

    1. 하코네 고개만 뚫리면 바로 호죠의 본거지인 오다와라였으니까요. 지형의 차이는 있지만 돌파당하면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진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삼국지의 그 곳들과 좀 닮았습니다.

    2. 주된 공성전술에서는 말씀대로 '말려 죽이기' 를 사용했지요. 그것도 우세한 물량과 츠케시로 전술로 적이 치고 나오는 걸 완전히 봉쇄하면서.

    3. 호죠 씨 토벌과 오슈 지방의 소요 당시 대군을 동원했던 이유도 있어서 임진왜란에 직접 출진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1만 5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히젠 나고야 성에서 히데요시와 함께 주둔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히데요시가 출진하면 자신도 나가야 하는 입장에 있었으나 히데요시가 한반도에 가지 않으면서 이에야스의 조선행도 유야무야..

    4. 문맥상으로 보면 도연초님의 말씀이 지당한 것 같은데... 역시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
  • 골든 리트리버 2015/03/28 11:59 # 답글

    4. およそ는 대략, 약, 무릇이라는 뜻이고

    芸는 학문과 무술 · 전통 예능 등의 수련을 통해 익힌 특별한 기능 · 기술. 기예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다지 재주/묘기를 부리지 않는, 대체로 계략을 쓰지 않는", 그래서 '단순하고 직접적인 전술' 이라는 의미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5/03/28 18:11 #

    음... 근데 "실용일변도로" XX은 없으나 "대단히 견고한 전술이었다.."고 한다면, XX는 단순하다기보단 뭔가 화려한 무언가를 가리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한데... 아리송하네요.(어쨌든 조언 감사드립니다.)
  • 골든 리트리버 2015/03/28 21:13 #

    ~는 없으나까지 합쳐서 해석한 것이죠.

    "너무나 히데요시다운 실용일변도로, 그다지 특별한 기술/계략을 쓰지 않았으나, 견고하기 짝이 없는 확실한 전술이었다."
  • 3인칭관찰자 2015/03/28 21:24 #

    아... 납득이 갑니다. 리트리버님 댓글대로 수정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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