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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침공전 (1)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4호(2000년 겨울호) 50~65쪽의 기사인《히데요시의 습격秀吉襲來》를 번역한 것입니다. 일본 전국시대 당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일본통일 마지막을 장식한 간토 호죠 씨關東北条氏 토벌전(=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을 중심으로 하여 쓰여진 기사로, 원저자는 카와이 히데오河合秀郞 씨입니다. 1차 저작권자와 마찰이 생길 시 삭제할 예정입니다. 그래도 퍼가실 때는 출처표기 부탁드립니다.


《외교전》- 히데요시의 소부지레이(역주 : 일본 국내 영주들 간의 전쟁을 금지한 명령)와 호죠 가문의 오산


  이에야스의 성공 뒤에 남겨진 호죠 가문

  텐쇼 12년(1584) 봄에 시작된 코마키 전역小牧の陣은, 나가쿠테 전투長久手の戰い에서의 패배라는 전술적인 실패와, 오다織田 / 토쿠가와德川 편 여러 영주들을 외교적으로 분단시키는 데 실패한 전략적 한계에 의해 벽에 부딪혀, 반 년 이상을 소요한 장기전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가 벽에 부딪혀 있던 것 이상으로 오다 노부카츠織田信雄도 궁지에 몰려 있었고,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도 결정적인 역전타를 고안하지 못하고 있었다. 노부카츠와 이에야스는 지지 않는 상황을 만들어내긴 했으나, 승리를 거둘 만한 힘을 가지고 있던 건 아니었다. 가장 기대를 모으고 있던 호죠 가문의 움직임은 무딘 데다 지극히 이기적으로, 눈 앞의 이익만을 추구했을 뿐이었다. 호죠 군의 북부 간토 침공은 노부카츠 / 이에야스에게 득이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히데요시를 초조하게 만들 정도의 급격한 활동도 아니었다.

  이러한 정세 하에서 노부카츠는 히데요시에게 하시바 군의 피점령하에 있던 자신의 영지를 모두 보장받고, 히데요시가 구축하고 있던 정권에서의 별격적 지위를 인정받는 양보를 이끌어내어, 최저한의 전쟁목표를 달성하는 선에서 타협했다. 이 해 11월 중순에, 히데요시와의 단독강화를 단행한 것이다.

  노부카츠의 탈락으로, 이에야스도 마찬가지로 히데요시와 휴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나, 노부카츠 이상으로 끈질기고 만만치 않은 교섭을 계속하며, 2년 후인 텐쇼 14년(1586) 10월에 드디어 교토로 올라갔을上洛 때에는 히데요시 산하에서 가장 유력한 영주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이에야스는 최저한의 전쟁목적인 자기 영지를 보장받는 것에 더하여, 간토와 오우(奧羽, 오슈와 우슈, 일본 도호쿠東北 지방을 가리킴)에 대한 소부지레이의 추진자라는 역할까지 획득한 것이다.

  노부카츠와 이에야스는 불안정했던 전쟁 전의 지위를 히데요시의 승인 하에서 반석 위에 올려놓고, 히데요시는 노부카츠와 이에야스를 굴복시킴으로서 정권의 군사적 권위를 높이고, 천하의 태반을 수중에 넣었다는 걸 내외에 알리는 데 성공했다. "코마키 전역" 으로 총칭되는 이 전쟁은, (당사자) 모두가 커다란 외교적 성공을 거둔 기적적인 결과와 함께 종지부를 찍게 된다.

  그 동안, 키슈(紀州, 키이紀伊 지방)의 사이가雜賀나 시코쿠四國의 쵸소카베, 엣츄의 삿사佐佐 등을 계속해서 굴복시킨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와의 교섭과 평행하여 진척시키고 있던 큐슈九州 평정을 본격화시키고, 다음 해에는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시마즈 가문島津家을 굴복시켰다. 토사土佐 1개 지방에 갇혀 버린 쵸소카베와, 사츠마薩摩 / 오오스미大偶, 그리고 휴가日向 지방 절반, 이렇게 2개 지방 반으로 삭감당한 시마즈의 운명에 비하면, 노부카츠와 이에야스의 강화조건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리한 것이었다는 말이 된다. 노부카츠의 단독강화는 그 사리분간 못하는 어리석음이 낳은 폭거라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으나, 상황적으로 본다면 오히려 혜안이었고, 그 절묘한 타이밍은 동맹자인 이에야스에게도 다대한 과실을 가져다 주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되어 혼슈의 태반과 시코쿠 / 큐슈를 지배하에 둔 히데요시는, 간토 / 도호쿠의 신질서 확립을 위해 움직였다. 몇 해 전先年에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에게 중개를 맡겨 간토에 포고한 소부지레이가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기에, 새로이 이에야스를 중개인으로 삼아 소부지레이를 포고한 것이다.

  실은 이에 앞서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의 교섭과정에서 이미 책동을 개시한 바 있었다. 히데요시가 간토의 정세에 간섭하여 오기 이전에, 접경 지역을 정리하고 확정하려고 한 것이다.

  텐쇼 13년(1585) 8월, 지난 달에 슨푸駿府로 내려가 있던 이에야스는 토리이鳥居 / 오쿠보大久保 / 히라이와平岩 들을 대장으로 삼은 사나다真田 공략을 위한 군대를 출발시켰다. 그러나 이 공세는 실패로 끝났다. 이이 나오마사가 이끄는 원군을 합하여 1만 명을 넘는 대군을 투입하였으면서도, 이에야스는 최종적으로 우에다 성上田城 공략을 단념한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거기에다 그와 같이 누마타 성沼田城을 공격해야 했을 호죠 군은 1개월이나 늦게 공세를 개시하는 형편으로, 이 쪽도 히데요시의 의향을 배경으로 삼은 우에스기 - 사나다의 동맹 앞에 어이없이 격퇴당해 버렸다. 거기에다 이에야스의 양 날개라고 할 만한 고굉지신(股肱之臣, 주군이 가장 믿는 신하) 중 하나였던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數正가 (히데요시 밑으로) 도망치는 막간극까지 벌어졌다.

  이 줄이은 실패의 결과, 이에야스는 지금까지의 방침을 완전히 바꾸었다. 이미 착수하고 있던 하마마츠浜松 -> 슨푸로의 본거지 이전은 그대로 두고, 앞에서 서술하였듯이 히데요시에게 신종臣從하는 것으로 방침을 급변시킨 것이다. 이 슨푸로의 본거지 이전은 히데요시와 다시 전쟁을 벌이는 걸 경계한 방어적 처치로 보기엔 이상하고 무의미하며, 사나다 씨 정벌만을 위해서라기엔 대단히 빈약한 이유이다. 이에야스는 이 때 이미 다가올 히데요시와 호죠 가문의 대립을 예견하며, 중개인取次이나 선봉의 역할을 독점하기 위한 포석으로서 미리 본거지를 동쪽으로 이동시켰다는 게 자연스러우리라. 이에야스는 이 단계에서 호죠 가문을 버리는 것도 시야에 넣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호죠 가문은 급변하는 정세로부터 완전히 남겨져 버렸다. 이에야스의 집요한 대 히데요시 외교는 거기에다 기름을 부어 버렸다. 이에야스의 군사적 . 외교적 성공이 어디까지나 그 시점에서의 일시적 정세에 의한 산물임을 경시한 호죠 가문 수뇌부는, 히데요시의 태도를 잘못 읽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전 당주인 호죠 우지마사北条氏政 / 현 당주 우지나오氏直 이하의 호죠 가문은, 히데요시에게 스스로를 도쿠가와 가문 이상으로 높은 가격에 팔 수 있으리라고 믿은 채로, 간토에서 땅따먹기를 계속한 것이다.


  뒤죽박죽이었던 호죠 가문의 방침

  이러한 호죠 가문의 움직임에 대해, 직접적인 군사개입이 불가능했던 텐쇼 15년(1587)까지 히데요시는 대단히 저자세였다. 호죠 가문과 교전 중이던 사타케佐竹 / 우츠노미야宇都宮에 대한 지원은 그저 말 뿐으로 끝나서, 양 가문은 상호의 방위협력에 의해 스스로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우에스기 가문을 통하여 지원을 약속하고 있던 사나다 가문에 대해서는, 이에야스가 정식으로 신종하자 손바닥을 뒤집듯 도쿠가와 / 호죠에 의한 사나다 정벌을 용인했을 뿐 아니라, 우에스기 가문이 사나다 편에 서서 가세하는 것까지 금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 사나다 가문의 위기는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분주와, 당주 마사유키昌幸가 스스로 입경하여 큐슈 출진 직전에 히데요시와 대면한 결과, 사나다 가문이 직접 히데요시를 섬기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그러나 이 점이 누마타 문제의 결착을 애매하게 만들어, 나구루미 성 사건名胡桃城事件을 유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누마타 영지 분할이 당사자인 이에야스와 호죠 가문의 손을 떠나 히데요시에게 결단이 맡겨진 결과, 구체적인 사무처리 단계에서 착오가 생긴 것이다.

  텐쇼 16년(1588) 8월 22일, 이에야스의 설득에 응하여 전 당주 우지마사의 셋째 동생 우지노리氏規를 교토로 올려보낸 이래, 호죠 씨는 히데요시에 대한 신종의 준비를 조용히 진척시키고 있었다. 그 호죠 가문에 있어서 누마타 문제의 해결은 말하자면 신종의 전제조건이라고 해야 할 최중요안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텐쇼 17년(1589)에 이루어진 히데요시의 결단은 호죠 가문을 충분히 만족시키지는 못하였다.

  호죠 가문 수뇌부는 실망과 불만을 품으면서도, 당주 우지나오의 입경 시기를 놓고 교섭을 계속했다. 그 도중에 입경의 주체가 전 당주인 우지마사로 변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신종하는 방침으로 움직여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방침은, 누마타 성 양도가 완료된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11월 3일, 현지의 지배를 위임받았던 이노마타 쿠니노리猪俣邦憲가 나구루미 성을 공략해 버리는 흉보에 의해 일순간에 파탄났다. 우지마사와 그 맏동생 우지테루氏照, 둘째 동생 우지쿠니氏邦가 계획한 독단전행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우지나오를 중심으로 한 공순파恭順派가 우지마사를 중심으로 결속한 항전파를 힘겹게 억누르고 있었기에, 이 폭거가 그 이상의 군사적 행동으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나구루미 성 사건 후에도, 호죠 가문은 전체적으로는 적극적인 교전의지를 가지고 있진 않았고, 도요토미 정권에 대해서는 해명을, 이에야스에 대해서는 중재 의뢰를 계속해서 부탁했다.

  우지나오는 장인인 이에야스에게 보통이 아닌 존숭의 마음을 품고 있었던 듯 하며, 그 이에야스가 호각으로 싸웠으면서도 히데요시에게 무릎을 꿇는 걸 보고, 히데요시와의 개전을 극력 회피하려고 했다. 개전을 피할 수만 있다면, 그 뒷일은 이에야스가 어떻게든 중재해줄 것이다. 그렇게 우지나오는 기대하고 있었던 듯하다.

  사실, 이에야스는 그렇게 할 용의가 있었고, 그리고 그런 뜻을 호죠 가문에게 알리기 위해 우지나오에게 입경을 권유하는 기청문에서도 "입경하지 못할 거라면 딸(우지나오의 아내)을 돌려주게." 라는 조항을 첨부하였다. 그 말은 얼핏 보기엔 공갈 같지만, 역으로 '딸을 돌려보내지 않는 한, 입경의 의지가 있는 것으로 보고 중재해 주겠다.' 는 말도 된다. 이에야스는 그만한 호의를 우지마사 / 우지나오 부자에 대해서 보여준 것이다.

  우지나오는 이 장인의 진력에 커다란 기대를 걸고, 이에야스와 친한 삼촌 우지노리를 통하여 어떻게든 나구루미 사건을 해명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우지마사와 그 맏동생 우지테루, 그리고 현지를 총감하고 있던 우지쿠니의 눈은, 서쪽보다는 동쪽과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우지마사 / 우지테루 / 우지쿠니 세 사람은, 호죠 가문의 전통적인 외교방침인【 중앙정권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입장 】에 고집하여, 히타치常陸 / 시모츠케下野 / 코즈케上野 지방으로의 지배권 확대를 제 1의 목표로 생각한 것이다.

  당주의 아버지와 두 명의 삼촌이 일치하여 히데요시에 대항하는 자세를 고수하였기에, 호죠 가문의 회의 참석자評定衆들은 우지나오 / 우지노리에게 가담한 공순파와 우지마사 / 우지테루 / 우지쿠니에게 가담한 항전파로 분열. 양 파벌의 줄당기기는 호죠 가문의 외교전략에서 일관성을 빼앗게 되었다. 우지나오가 우지노리를 통하여 이에야스와 히데요시 측근에게 공작을 하고 있던 동안에도, 우지테루는 호죠 가문과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와의 우호관계 강화를 추진하여, 간토와 오우를 겨낭한 히데요시의 소부지레이에 대항하기 위해 군사동맹 체결을 획책하고 있었다.

  다테 가문과의 제휴가 성립하면, 히데요시에게 신종하고 있던 히타치 지방의 사타케 가문 / 시모츠케 지방의 우츠노미야 가문을 궁지에 몰고, 양 가문을 협공할 체제가 갖추어지게 된다. 단순히 소부지레이 명령에 위반하는 정도가 아닌, 도요토미 정권의 비호하에 있는 영주들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간토에서 오우에 이르는 호죠 가문과 다테 가문의 광대한 세력권이 연결된다면, 안쪽으로는 거대한 포위망에 사타케 / 우츠노미야 양 가문을 가두고, 바깥으로는 도요토미 군의 침공으로부터 내선의 이利를 발휘할 수 있으리라 기대되었다.

  이러한 가능성을 가진 호죠 가문과 다테 가문의 접근이, 히데요시를 자극하지 않을 리 없었다. 호죠 가문의 면종복배로밖에 평가할 수 없는 태도는, 히데요시에게 있어서 절호의 구실이었다. 히데요시는 11월 24일자로 5개 조로 구성된 선전포고장을 내밀었다. 호죠 가문의 배신행위를 규탄하고, 다음해 봄에 출진할 것을 예고하는 이 편지는, 호죠 가문 뿐만 아니라 각지의 영주들에게까지 그 사본이 송부되었다. 동원준비 명령을 겸한 것이었다.

  히데요시의 선전포고장은, 호죠 가문 수뇌부의 공순파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던 우지나오들은, 해명을 시도함에 동시에 다시 한 번 이에야스에게 중재를 요청했으나, 모든 것은 지나간 후였다.

  우지마사와 회의 참석자들의 압력에 굴복한 우지나오는, 이미 영내의 동원체제와 군수품 생산의 강화에 착수한 바 있었다. 그리고 나구루미 성 사건으로부터 반 달이 지나지 않은 동안에, 지배권 안에 있는 각 지방으로부터 총동원을 개시하였다. 히데요시와의 교섭이 전쟁으로 직결될지도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하에서의 일이었다.

  15세 ~ 70세까지의 남성을 죄다 병사로 동원하였으리라 생각되는 이 대동원은, 텐쇼 15년(1587) 여름 단계에서 무사시武藏 / 사가미相模 / 이즈伊豆 지방을 대상으로 조사가 개시된 바 있어, 이미 동원계획은 완성되어 있었다. 이에 의해 오다와라에는 최저 5만, 그 외의 여러 성에도 최저 수만 명의 병력을 농성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 총수는 합쳐서 10만을 넘을 것이라 생각되며, 이는 당시의 영주 단독으로는, 큐슈 전토를 거의 제압한 바 있던 시마즈의 그것을 능가하는 경이적인 숫자였다.

  그리고 우지나오를 비롯한 공순파는, 이 엄청난 수의 병력을 이에야스에게 애먹은 바 있던 히데요시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외교적 공갈과, 항전파에게 외교적 노력을 한 것이 겁쟁이여서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 비판을 피하기 위해 동원령을 내린 것이다. 공순파의 타산에는, 이것이 외교적으로 얼마나 마이너스가 될지가 완전히 결락되어 있었다. 히데요시가 방위체제의 강화라는 공갈보다 더욱 고압적인 공갈, 즉 선전포고로 답한 것도 예상해보면 당연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히데요시가 나구루미 성 사건에 대한 제재(항전파와 현장 책임자의 처벌) 이외의 요구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에야스가 상당히 친절하게 분주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호죠 가문은 내부적인 모순을 해소하는 것을 우선한 결과, 대외적으로 강경한 인상을 계속 줌으로서 외길로 개전을 향해 질주하게 되었다.

  처벌을 요구받은 항전파가 전 당주와 그 동생들이었기에 그 이상 양보할 수 없었다는 점도 있으나, 호죠 가문은 누마타 영지 전체를 반환하는 것과 같은 대폭적인 양보는 결국 하지 않았다. 그러한 되는 대로 되라는 식의 분열된 외교방침은, 전쟁 목적 그 자체를 애매하게 분열시키게 되었다.

  당주의 입경, 신종이라는 외교적 과제에 대해서는 간토의 소부지레이의 집행책임자가 된 이에야스의 설득에 응하여, 호죠 가문은 우선 우지노리를 교토로 올려보내고 이어서 전 당주인 우지마사가 스스로 입경하기로 내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항전파에 있어서 전쟁목적이란 건,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우지마사는 입경하긴 하지만 신종하진 않는다든가, 신종하긴 하지만 우지마사는 입경하지 않는다든가, 코즈케 전토의 지배를 인정받는다, 든가 하는, 외교로는 달성되지 못한 목적이 담겨 있을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전쟁으로 돌입하는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통일성을 상실한 호죠 가문에선 승리했다고 해서 영토적 요구가 달성될 수 있을까, 그건 그렇고 승리란 어느 정도의 상황을 지칭하는가, 와 같은 근본적인 부분에서의 전망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 히데요시의 세력은, 이미 코마키의 진 당시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강대해져 있었다. 천하의 태반을 지배하에 두고, 오사카에 거대한 성을 쌓은 히데요시를 완전히 굴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이상 호죠 가문에 설정가능한 목표란, 기껏해야 침공군을 영외로 구축하거나 침공군에 손해를 입혀서 전쟁수행을 단념하게 하는 한정적인 것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코마키 형" 의 승리를 상정했다고 해도, 그 달성은 대단히 힘든 상황이었다.

  전쟁의 예비 결론을 도출하지 않은 채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주체적인 전쟁종결 수단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외교적 전망과 전쟁목적의 애매함에 숨겨진 안이한 판단은, 방어전략에서도 중대한 지장을 불러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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