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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투 오다 군단》타키가와 / 카와지리의 불운 (上) ┣ 激鬪 織田軍團 (完)


  이 글은 (舊)《歷史群像シリ-ズ 20 激鬪 織田軍團》의 P. 186 ~ 189페이지에 수록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주요 가신 10명을 중점적으로 다룬《노부나가 가신단의 수수께끼와 실상》제 9화로, 1582년 3월에 오다 군이 다케다 카쓰요리武田勝賴를 멸망시킨 후 다케다의 옛 영지에 막 입봉한 대표적인 인물인 카와지리 히데타카(河尻秀隆, 카이 지방甲斐國과 시나노信濃 스와 군諏訪郡의 영주가 됨)와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 코즈케 지방上野國과 시나노 치이사카타小縣 / 사쿠佐久 군의 영주가 됨)가, 몇 개월 후 혼노사의 변이 터지면서 겪게 되는 비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필자는 마스다 미키增田美貴 씨.(1991년 당시 역사연구자)


  카이 다케다 토벌 당시의 두 군감

  혼노사 정변은, 노부나가뿐만 아니라 그 부하들의 운명도 크게 바꾸어놓았다. 텐카비토天下人에서부터, 일거에 언덕에서 굴러 떨어진 자까지 - 타키가와 카즈마스와 카와지리 히데타카는, 불행하게도 후자의 대표가 되어버린 무장들이다.

  카즈마스는 이세伊勢 키타바타케 씨 공략전 / 나가시마 잇코잇키長島一向一揆 토벌 등에서 세운 공적이 많아, 이세 나가시마 성주가 되었다. 히데타카는 노부나가의 아버지 노부히데信秀 시대부터 오다 가문을 섬기면서 쿠로호로슈(黑母衣衆, 검은 화살막이를 걸친 정예 연락장교)에 이름을 올리는 한편, 미노 이와무라 성岩村城을 다스리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노부나가보다 연상으로, 후다이슈譜代衆로서 오다 가문의 중진에 속하는 자들이었다.

  텐쇼 10년(1582) 2월, 노부나가가 충분한 준비를 하여 카이 다케다 씨甲斐武田氏 토벌에 나섰을 때, 카즈마스와 히데타카는 총대장인 노부타다(信忠, 노부나가의 적자嫡子)의 군감으로 종군했다. 두 사람은 2월 14일, 이와무라에서 노부타다와 함류하여 이나지伊那路를 행군했는데, 지나가는 길에 있는 다케다 편의 무장들은 모두 항복하거나 도망쳤다.

  다케다 카쓰요리의 동생으로, 타카토오 성주高遠城主인 니시나 모리노부仁科盛信만이 그들의 앞길을 막아섰으나, 3월 2일 성 병사들 전원이 처절하게 전사하면서 성은 함락되었다. 이 전투에서 히데타카가 분전했다는 건《신쵸코우키信長公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후 카미스와上諏訪를 거쳐 노부타다 군이 고후에 입성한 건 3월 7일, 이미 다케다 카쓰요리 일행은 신부 성新府城을 퇴거한 후였다. 11일, 카쓰요리 부자父子는 타노田野에서 멸망했는데, 마지막에 그들을 포위하고 목을 벤 것도, 타키가와 / 카와지리 군이 중심이 된 것이었다.《소켄키総見記》에서는【 앞에서는 카와지리 군, 뒤에서는 타키가와 군이 양면에서 협공하여...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노부나가가 두 사람에게 기대한 것은, 오히려 전투에서의 군공은 아니었다.

  그것은 출진한 이후부터 고슈(甲州, 카이)로 들어가기까지 노부나가가 히데타카 / 카즈마스에게 빈번히 보낸 편지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 종래 이 편지들에 대해서는,【 노부나가의 다케다 공포증 】【 노부타다에 대한 마음씀 】등의 사유가 이야기되고 있었으나, 다른 사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케다 가문은 이미 내부에서 붕괴한 상태로, 고슈 제압전이 성공하리라는 건 이미 99%로 간주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부나가는 노부타다에게 군감을 붙이는 한편으로, 세밀한 지시를 내렸다. 특히 방심하여 가벼이 행동한다든가, 젊은이들이 혈기에 치우치는 일이 없도록, 카즈마스와 히데타카에게 염밀히 주의를 주었다. 명실공히 오다 씨가 천하의 패자라는 것을 선언하고 싶었던 노부나가는, "퍼펙트 게임"을 지향한 것이다.

  그 때문에 히데타카는 도중에 모리 히데요리毛利秀賴와 함께 오시마 성大島城에 입성하여, 도로 정비와 경비, 성 수축 등의 절차를 담당했다. 그리고 타카토오 성에서는 성하城下를 불태우고 성 공격의 지반을 굳혔다.《코요군칸甲陽軍鑑》에서는【 오다 측이 다케다 측에 대해 은상을 미끼로 내통을 재촉하고 있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모두가 노부나가의 지시에 따른 것들이나, 이렇게 전쟁을 벌임에 있어서 포석을 깔거나 처리를 하는 데는, 역시 카즈마스 / 히데타카와 같이 경험 많은 무장들의 지휘가 필요한 것이다.  

  거기에다 노부나가는, 노부타다가 군감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두었다. 히데타카에게는【 타키가와와 상담하여 (노부타다에게) 확실히 할 말을 하라 】【 이 뜻은 죠노스케(城介, 노부타다)에도 편지로 전해 두었으며, 마찬가지로 타키가와에게도 알려놓았다 】고 하였고, 노부타다에게는【 이미 카와지리 요베에(河尻與兵衛, 히데타카)에게도 이 뜻을 구체적으로 말해두었다. 】고 편지에 썼다. 이렇게 되면 노부타다는 독단전행을 할 수 없게 되고, 역으로 카즈마스 / 히데타카는 "노부나가님의 지시" 로서 당당히 총대장인 노부타다에게 간언할 수 있으며, 젊은이들의 고삐도 확실히 쥘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또 하나 감안해두어야 할 것은, 카즈마스 / 히데타카에게도 그만한 배려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을 배속시킨 것도, 만전을 기하기 위한 것이리라. 그들이 군감의 역할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노부나가의 지시가 불가결했던 것이다.


  만들어진 "폭군 히데타카" 설

  그런데, 뒤를 따라 카미스와上諏訪까지 진군한 노부나가는 3월 29일, 멸망한 다케다의 옛 영지 배분과 카이 / 시나노 지방에서 통용될 법도명령서掟書를 공개했다. 카즈마스에게는 간토 간레이關東管領 지위와 함께 코즈케 지방 전역과 시나노 지방 치이사카타 / 사쿠 2군을, 히데타카에게는 카이 지방과 시나노 스와 군이 주어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통해 내통하였던 다케다의 가신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梅雪의 영지(카이 내에선 카와우치河內 지방)가 그대로 인정되었기에, 그 대신 히데타카에게 스와 군을 준 것이다.

  그러나 이 영광은, 그들의 비운悲運의 시작이기도 했다. 6월 2일 일어난 혼노사 정변 후 얼마 안 되어, 히데타카는 무참한 말로를 맞게 된다. 이 때의 경위는《미카와모노가타리三河物語》등 여러 책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 줄거리를 서술해보겠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혼노사 정변 후, 히데타카의 신변을 걱정하여, 상담 상대로 혼다 노부토시本多信俊를 보냈다. 그러나 히데타카는 '사신을 파견한 건 잇키一揆를 선동하기 위해서다' 라는 뜬소문을 믿고, (비겁한 방법으로) 노부토시를 살해해버렸다. 그러자 이전부터 히데타카의 포악함을 미워하던 카이의 토착 사무라이들과 민중들은, 이를 계기로 잇키를 일으켜 히데타카의 저택을 습격, 옛 다케다 가문 야마가타 부대山縣衆에 속했던 미츠이 쥬에몬(三井十右衛門, 이름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음)이 히데타카의 목을 베어버렸다. 】

  히데타카의 치세는, 약 2개월 가량으로 너무나도 짧으나, 우선 폭정의 진위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 단서가 되는 건, 노부나가의 법도명령서掟書이다. 흔히 카이 사람들은 다케다의 옛 제도를 그리워했다고 이야기되나, 법도명령서에는【 통행소에서의 세금 폐지 】【 본 연공 이외의 부당한 부담을 폐지한다 】는 바람직한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제도의 변화에 당혹해할지언정, 즉시 원한을 사게 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노부나가는【 부농 이하의 자들은, 풀이 흔들리는 것과 같이 시세를 가늠하는 자들이다. 】고 했기에, 히데타카가 농민들에게 가혹한 처치를 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거기에다 히데타카가 카이 지방에서 발급한 문서도 약간이나마 남아있는데, 토지나 저택의 권리를 인정해주는 것들로, 폭정을 했다는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면 사이넨사西念寺에는 "조영비용을 시주받는 건 인심이 안정된 후로 미루라." 는 등, 극히 상식적인 말을 했을 뿐이다.

  과거에 적지였던 곳을 지배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특히 적의 본거지였던 카이 지방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엄격함과 함께 민심을 얻을 수 있는 시정도 필요하다. 말하자면 노부나가는, 히데타카에게 완급을 겸비한 통치를 바랬던 것이다. 경험도 있으며, 분별도 있을 나이(당시 56세)인 히데타카는 그야말로 적임자였다. 그런 히데타카가, 왜 "폭군" 으로 불리게 된 것일까, 이제부턴 그 원인을 찾아보자.

  한 가지는 제압전의 일환으로서, 오다 군이 다케다 씨의 신앙이 돈독했던 사원과 신사들 여러 군데를 방화했다는 점이다. 3월 ~ 4월에 이르러, 에린사惠林寺 / 토코사東光寺 / 지겐사慈眼寺 등이 그 희생양이 되었다. 거기에다 잔당 사냥이 극심했다는 점도 들 수 있다. 3월 중반에는 다케다의 옛 중신들이 계속해서 주살되었으며, 앞에서 거론한 법도명령서에도【 충절을 서약한 자들 외에 뛰어난 무사들은 처형하거나 추방하라. 】는 엄혹한 조항이 있다. 카이 무사들의 반감은 강했을 것이다.

  보는 바와 같이, 이와 같은 행동은 노부나가가 일류로 삼는 '철저한 처우' 이다. 이미 그 용서없는 싸움 방식은 모르는 자가 없었으나, 카이센 화상快川和尙 이하를 불태워 죽이거나 카쓰요리들의 목을 교토로 가지고 가 효수하는 등의 준열함에, 카이 사람들은 전율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수족이 된 히데타카가, 노부나가와 같은 부류로 보이는 건 무리도 아니다. 입봉 당초는 점령군의 사령관이라는 색채가 짙어서 쓸데없이 그런 경향이 부각된다. 이 점이 "폭군 히데타카" 이미지 구축에 영향을 준 듯하다.

  지금부터 그 전후의 움직임을 생각해보자.

  6월 2일    혼노사 정변
  6월 6일    이에야스, 다케다 유신들에게 아나야마령 시모야마下山의 축성을 명령하다.
  6월 10일  이에야스의 사신 혼다 노부토시, 고후甲府에 도착
  6월 12일  히데타카, 카이 무사 무토 씨武藤氏에게 13관문의 토지를 수여하다.
  6월 12일  이에야스, 카이 무사 카가미 씨에게 영지를 수여하다
  6월 14일  히데타카, 혼다 노부토시를 살해하다
  6월 17일  이에야스, 카이 무사 쿠보타 씨窪田氏에게 영지를 수여하다
  6월 18일  히데타카, 잇키군에게 살해당하다

  이 짧은 시간 사이에, 이에야스의 그림자는 가득하다. 12일, 17일에 이에야스가 할당해 준 토지는 히데타카의 영지 내가 다수로, 이에야스에 대한 의혹은 깊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정세가 급박해지던 12일, 히데타카가 토지를 수여한 무토 씨는, 히데타카의 목을 벤 미츠이 씨와 마찬가지로 야마가타 부대에 있던 자이다. 훗날 그 토지를 이에야스에게 인정받은 걸 보면,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었던 듯 하다. 당시 호죠 씨가 카이 지방 츠루 군都留郡에 책동을 걸고 있었던 것도, 히데타카의 동요에 박차를 가했다.

  히데타카 자신의 통찰력 부족도 명백하다. 그는 노부나가가 내린 명령의 수행을 신경쓴 나머지, 법도명령서 이상의 선정을 베푸는 유연함이 없었다. 그리고 노부나가라는 방패를 잃게 되자 당혹한 나머지 판단력을 상실하여, 이에야스가 보낸 사신을 살해함으로써 자기 무덤을 판 것이다.

  어찌됐든 이에야스가, 이 사건에 의해 카이 지방을 가로챌 구실과 정당성을 얻은 건 사실이다. 이에야스라는 뛰어난 연출가가 히데타카를 신속히 파멸로 몰아갔다고 할 수 있으리라. 바꿔 말하자면 무사를 중심으로 한 카이 사람들이, 노부나가의 대리인인 히데타카보다는 다케다 씨의 유산(토지 / 인재 / 기술 등)을 원하며 그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준 이에야스를 선택했다는 말도 된다.

  그리고 히데타카의 폭정과 이에야스의 친절한 마음을 강조한 이 사건의 기록이, 사실 에도 시대 이후에 쓰여진 것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히데타카가 악역으로 만들어진 이유는 자명해진다. 후세의 "히데타카 폭군설"은 상당히 값을 깎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덧글

  • 함부르거 2015/01/16 19:28 # 답글

    후일에 이에야스가 다케다 군학을 숭상한 것도 옛 다케다 령의 민심 수습을 고려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
  • 3인칭관찰자 2015/01/16 21:24 #

    옳으신 말씀입니다. 노부나가와는 달리 이에야스는 다케다 무사들에게서 정중한 자세로 배우려고 했고, 그것이 이미 한 번 멸망한 바 있던 카이 사람들의 자부심을 오래도록 세워주지 않았을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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