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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투 오다 군단》숙로宿老 니와 나가히데 (下) ┣ 激鬪 織田軍團 (完)


  이 글은 (舊)《歷史群像シリ-ズ 20 激鬪 織田軍團》의 P. 178 ~ 181페이지에 수록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주요 가신 10명을 중점적으로 다룬《노부나가 가신단의 수수께끼와 실상》제 7화로, 오다 노부나가의 주축 가신들 중에서 강렬한 개성을 지니거나 그 자신을 드러나게 할 특출난 공적을 세우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또 없어서는 안 되었을 "쌀" 과 같은 역할을 맡아온 '고참'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를 다루고 있습니다. 1991년에 집필된 글이라 시대에 따른 한계가 있습니다. 필자는 와타라이 케이스케渡会惠介 씨.(1991년 당시 역사가)


  나가히데의 기략으로 사루하미 성猿啄城을 함락시키다

  키소 강 강변에는, 타츠오키龍興의 본거지 이노구치 성井の口城에서 동쪽 24km 거리에 위치한, 오자와 모토야스大沢基康가 지키는 우루마 성(宇留摩城, 우누마鵜沼라고도 하며 현 기후 현岐阜縣 카가미하라 시各務原市에 있다)이 존재하여, 이누야마 성犬山城과는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요새要害였다. 그 북쪽으로는 타지미 슈리多治見修理의 본거지 사루하미 성이 오다 군단의 앞길을 막아서고 있었다.

  이 성은 사루오 산성猿尾山城이라고도 하는데, 키소 강은 여기서 급류가 되고, 산은 강에 바짝 붙어 있는, 오와리 접경지대에 위치한 요새였다. 훗날 노부나가가 성을 입수하여 카츠야마勝山城으로 개명한 곳으로, 지금의 기후 현 카모 군 사카이와이쵸坂祝町에 있다. 사루하미 성의 북쪽, 나가라 강 좌측 강변에 있는 세키 성關城에는 나가이 하야토노쇼 미치토시長井隼人正道利가 직접 포진해 있었는데, 이노구치에서 15km 떨어진 지근거리였다. 사루하미 / 세키는 카지다加治田와 연결되어 삼각형 모양을 만들어서, 침입해 온 적을 독 안에 든 쥐처럼 만들 수가 있었다. 그런 카지다 성의 사토 부자가 귀순한 것은 오다 군단의 사기를 높였다.

  뒷산의 해발 270m 산 정상에 축조된 캬쿠테키 성却敵城은 좌우의 봉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며, 배면背面의 나시와리 산(梨割山, 해발 278m)에는 물이 없는 해자空堀를 파, 성의 이름대로 "적을 물리치는" 데 적합한 구조였기에, 미노 동부 공략의 커다란 포인트를 수중에 넣게 된 것이다.

  이들 성에 오다 군단이 공격을 시작한 것은 에이로쿠 7년(1564) 7월 ~ 8월에 걸친 시기였다. 우선 노부나가는 우루미 / 사루하미 두 성에서 1천 미터 정도 떨어진 이키 산伊木山에 포진했다. 키소 강 북쪽 강가에 위치한 해발 140m의 산에서, 두 성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사루하미가 격류와 절벽에 의해 지켜지고 있던 견고한 성이라는 건 앞에서 서술했으나, "사루오 산성" 이라고 불리던 대로 지지地誌에 따르면 "바위들을 헤치고 헤치며 수 천 장을 올라가야 겨우 산 정상에 도착한다" 고 설명이 되어 있는, "원숭이밖에 오를 수 없는" 절벽 지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다 "만 장万仞의 산을 둘러싸 성루로 삼다" 고 한다. 높은 산이 솟아오른 걸 "천 장千仞" 으로 형용하는데, 이에 '만万' 자를 붙였다는 걸 보면 얼마나 높은 봉우리로 이어진 깊은 골짜기가 늘어서 있는가를 시사한다. 

  "무턱대로 산기슭에서 치고 올라갔다간 함락될지가 의심스럽다." 고 생각한 나가히데는, 스스로 몇 기를 대동하고 지형을 정찰하여, 성보다 더욱 높은 지대에 오오보테 산이라는 고지가 잇으며, 이 골짜기의 물을 음용수로서 성내에 끌어오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가히데는 이 급수원을 차단하고, 산 위와 산 아래에서 함께 공격해 들어갔다. 급수원이 끊긴 타지미 일당은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사루하미를 수중에 넣은 노부나가는, 이어서 더 깊숙한 곳에 있는 도호라 성堂洞城을 나가히데에게 공격하게 했다. 이 곳은 세 방향이 절벽으로 이루어진 600평방 미터의 대지에 축조된 성채로, 남쪽만이 개방되어 이 곳에 정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공방전은 정오부터 시작하여 저녁 6시까지 계속되었으나, 승패는 확실히 판가름하기 어려웠다. 밤이 되자 바람이 거세져 왔다. 아마도 공성전의 대장이었던 나가히데의 발상이었을까, 횃불을 준비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성채의 벽 쪽으로 다가가 안쪽으로 던져 넣어라!" 불은 바람을 타고 성 안을 습격했다. 나가히데는 기회를 틈타 성으로 돌입했다. "성병은 혼란에 빠져, 적은 분별조차 하지 못한 채 대장급에 속한 자들이 모두 전사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그날 밤, 노부나가는 나가히데와 함께 카지다의 사토 저택에서 숙박하며, 적장의 수급 검사를 했다. 만족스런 웃음을 짓는 주군을 보며 나가히데도 역시 회심의 미소를 떠올리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으리라. 얼마 안 가 우루마 / 세키 성도 성문을 열었다. 


  할복으로 처절한 최후를 맞다

  미노를 평정한 노부나가는, 에이로쿠 11년(1568) 아시카가 쇼군 요시아키義昭를 옹립하여 입경하기로 결의하고, 도중에 그 길을 가로막은 롯카쿠 죠테이(六角承禎, 간레이管領 지위, 이름은 요시카타義賢)를 토벌하기 위해 9월 7일, 스스로 오와리 / 미노의 대군을 이끌고 새로이 본거지로 삼은 기후 성을 출발, 고슈(江州, 오미近江 지방) 사와 산(佐和山, 현재의 히코네 시彦根市)에 도착했다. 물론 나가히데도 그 밑에 참진하고 있었다.

  죠테이는 칸논지 성觀音寺城을 본거지로 삼고 잇었다. 지금의 고카노장五箇莊 / 노토 강能登川 / 아즈치安土 각 마을의 접경에 있는 산 위에 축조되어 비단을 감은 듯 둥근 산 모양을 하고 있었기에, "키누가사 산" 이라고도 불렸다. 그 지성支城이 해발 324m 산 정상에 축성된 미즈쿠리 성(箕作城, 현 요카이치 시八日町市)이었다. 노부나가는 "와다 산으로 향한다" 고 하면서, 이 미즈쿠리 성을 급습했다. 와다 산은 고카노장에 위치했는데, 입경을 서둘러 죠테이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가장했던 것이다. 

  (성 공략에) 참가한 것은 나가히데를 비롯한 측근 무장들 뿐이었다. 모두가 미노 부대美濃衆들이 선봉을 맡으리라 생각하고 있던 데서 의표를 찌른 것은, 작전이 극비에 진행되었기에 심복인 나가히데들이 그 뜻을 받들어 출진한 것이라 생각된다. 싸움은 오후 4시 무렵에 시작되어 밤이 되어 함락되었다고 하니 비교적 단시간에 결착이 났다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나가히데가 이끄는 일단의 과감한 행동에 의한 것이리라.

  노부나가의 군단은 그날 밤 미즈쿠리 산에 포진하고, 다음 날 칸논지 산으로 공격해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지성이 어이없이 함락되었다는 걸 알게 된 죠테이는 아들 요시스케義弼와 함께 성을 버리고 도주, 남겨진 성 병사들은 인질을 바치고 귀순을 맹세했다.

  이후 나가히데는, 에이로쿠 12년(1569) 8월의 이세 공략에서 시바타 / 타키가와들과 함게 코쿠시國司 키타바타케 토모노리가 농성한 오카와치 성大河內城 공략에 가담하여, 이 성문을 열게 하였다. 이 때 이세에 재지하던 코즈쿠리 토모마사木造具政가 은밀히 노부나가와 내통하였던 건, 음지에서 나가히데의 책모가 빛을 발하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신쵸코우키》를 채색한 아네가와 전투姉川合戰는, 호쿠리쿠 지방에 세를 과시하는 센고쿠 영주인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와, 노부나가의 여동생을 아내로 삼았음에도 배반한 북 오미北近江의 아자이 나가마사淺井長政 연합군이 노부나가와 싸워 패배한 일전인데, 나가히데는 오다니 성小谷城의 아사이 씨 포위부터 시작하여 이 대회전에 참가, 노부나가의 승리를 견인했다.

  그리고, 아자이 / 아사쿠라 군이 히에이 산比叡山으로 도망쳤을 때, 사와 산성의 츠케지로(付城, 성을 포위하기 위한 목적으로 쌓은 전초기지형 성)에 있던 나가히데는 직접 500기를 이끌고 사카모토로 들어왔다. 그 신속함에 노부나가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도중에 잇코잇키一向一揆가 봉기하여 나가히데의 군대를 저지하려고 했으나 격파하고, 수급 600여 개를 베었다고 한다. 이 모두가 겐키 원년(1570)에 벌어진 일이나, 다음 해인 겐키 2년(1571)에는 사와 산성의 성장城將 이소노 탄바노카미 히데타카(磯野丹波守秀高, 카즈마사員昌)를 설득하여 항복시켰으니 그야말로 팔면육비의 활약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가히데가 사와 산성 5만 석을 하사받은 건, 이와 같은 공적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노부나가가 형 노부히로의 딸을 나가히데의 아내로 삼게 하여 오다 가문의 친척으로 만들어 준 것도, 나가히데에 대해 신뢰도가 높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노부나가는 (나가히데를) 자기의 한 팔 내지는 양 팔로 생각했다고도 할 수 있다.

  노부나가가 옹립한 쇼군 요시아키가, 우지 마키시마 성眞木島에서 농성하며 반기를 든 것은 텐쇼 원년(1573) 7월 5일의 일이나, 노부나가는 신속히 7일날에 입경, 아시카가 막부足利幕府를 멸망시켰다. 노부나가는 이른 시기부터 요시아키가 반기를 들 것이라는 걸 내다보고 "대군을 조속히 입경시키기 위해서는 육로보다 비와 호 (의 수운을) 를 이용하는 편이 빠르다" 고 하여, 나가히데에게 병선兵船의 준비를 명한 바 있다.

  나가히데는 오미 동부 산 속의 목재들을 세리카와 강芹川으로 보내, 사와 산 골짜기에 위치한 호숫가에 모은 후, 지역의 장인들과 대장장이들을 모아 백정루(百挺樓, 100명이 노를 젓는 시스템)로 움직이는 대선박을 만들어냈다. 노부나가는 이를 이용하여 맹렬한 속도로 입경, 요시아키의 전의를 상실케했는데, 나가히데의 임기응변 뛰어난 조선솜씨는, (지금까지) 선전되어 온 히데요시의【 하룻 밤만에 지은 성 】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아즈치安土 축성의 총감독을 명령받은 것도, 나가히데의 재능을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한 포상으로 나가히데는, 와카사若狹 지방 10만 석의 영주가 되었다. 

  그야말로 노부나가와 밀착하여 살아온 것 같은 나가히데는, 혼노사 정변 이후, 히데요시가 오다 씨織田氏를 대신하여 패권을 수중에 넣어가는 것이 분하여, 텐쇼 13년(1585) 4월 6일, 병에 걸리자 "(내) 목숨을 빼앗으려는 것의 정체를 보여주겠다." 고 하며, 스스로 배를 갈라 장을 끄집어내어 죽었다고 한다. 향년 51세의 처절한 최후였다.



덧글

  • 진보만세 2015/01/11 15:46 # 답글

    슬프지만 '니와'다운 최후이기도 하군요..이번 편도 잘 읽었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5/01/11 18:26 #

    니와의 최후에 대해선 위종양(위암)으로 죽은 게 유력하지만 이 글에서 말한 것처럼 스스로 배를 갈라 죽었다는 건 100% 사실로 확정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절반 정도만 믿으시면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꾸준히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후속번역도 꾸준히 올려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재팔 2015/01/12 00:58 # 답글

    할복해서 히데요시에게 암 덩어리를 보냈다는 하드코어한 얘기도 들은 듯... ㅋㅋㅋ
    신장의 야망 천상기에선 B급으로 죄다 표시된 주제에 한도는 A급으로 기억하네요 ㅋㅋㅋ(다키카와 가즈마스도 포함 ㅋㅋ)
  • 3인칭관찰자 2015/01/12 08:25 #

    그 괘씸죄(?) 때문에 아들인 니와 나가시게가 히데요시에게 불이익을 받았다는 말도 있더군요. ㅎㅎ
    타키가와도 니와도 게임에서 제법 쓸만했지만 능력치가 조금 과소평가되었다는 느낌은 들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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