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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투 오다 군단》숙로宿老 니와 나가히데 (上) ┣ 激鬪 織田軍團 (完)



  이 글은 (舊)《歷史群像シリ-ズ 20 激鬪 織田軍團》의 P. 178 ~ 181페이지에 수록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주요 가신 10명을 중점적으로 다룬《노부나가 가신단의 수수께끼와 실상》제 7화로, 오다 노부나가의 주축 가신들 중에서 강렬한 개성을 지니거나 그 자신을 드러나게 할 특출난 공적을 세우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또 없어서는 안 되었을 "쌀" 과 같은 역할을 맡아온 '고참'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를 다루고 있습니다.

  1991년에 쓰여졌다는 것과 이야기가 용두사미로 끝난다는 점(그리고 드문드문 보이는 아케치 미쓰히데에 대한 온당치 않은 평가와, 오와리 이누야마 성犬山城을 사이토 측에 속한 성으로 본다는 점 정도)을 어느 정도 필터링하고 읽으시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필자는 와타라이 케이스케渡会惠介 씨.(1991년 당시 역사가)


  노부나가와 함께 센고쿠 (시대) 를 살아나가다

  "멍청이" 라고 불리던 오다 노부나가가 오와리尾張 후루와타리 성古渡城에서 성인식을 치른 건 텐분 15년(1546)이었는데, 그로부터 4년이 지난 텐분 19년(1550), 킨슈(近習, 측근)로서 출사出仕한 것이 니와 고로자에몬 나가히데丹羽五郞左衛門長秀였다. 어린 시절의 이름은 만치요万千代, 텐분 4년(1535)에 태어나 16세였다고 하니 주군보단 1살 연하였다.

  이후, 노부나가가 혼노사本能寺에서 목숨을 잃기까지 문자 그대로 "그림자같이 따르며" 함께 센고쿠 시대를 헤쳐나갔으니, 성격이 격하고 짜증을 잘 내는 노부나가의 마음을 간파하고 임기응변으로 대처했을 것이다. "지장智將" 으로 불리면서도 재삼에 걸쳐 노부나가의 비위를 거스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와는 크게 차이나는 부분이다. 

  노부나가의 일대기《신쵸코우키信長公記》에 나가히데의 이름이 등장하는 횟수가, 노부나가 막하의 유력한 제장들로 불리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 /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 / 아케치 미쓰히데 /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를 제치고 단독 1위였던 건, 얼마나 나가히데가 오다 군단의 정점에 있었는가를 이야기할 수 있는 증거 중 하나이기도 하다.

  훗날, 이전까지 키노시타 토키치로木下藤吉郞란 이름을 쓰던 히데요시가 "하시바羽柴" 로 성을 고친 것도, 나가히데의 羽자와 카츠이에의 柴자를 취하여 "두 사람의 무용을 본받고 싶다" 는 바램에서였다. 특히 나가히데의 지략과, 많은 전투에서 보인 용맹한 싸움 실력을 사표師表로 삼으려 했던 것이리라. 에도 시대 여러 영주들의 연혁을 모아 기록한《한간후藩翰譜》는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의 작품인데, 니와 씨에 대해 언급하면서 나가히데에 대해

  "젊은 시절부터 오다 님을 섬기며 언제나 한 쪽 편의 대장을 맡아, 향하는 곳에 격파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고 절찬한 후, "오다 님의 가신으로 니와 / 시바타라고 하면,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고까지 말하고 있다.

  니와 씨는 나라 조奈良朝 시기의 명족名族 니와노오미丹羽臣를 발상으로 두었다고 하며, 후세에 오와리 니와 군丹羽郡으로 이주하여 (군의 이름을 따) 성씨를 칭했다고 한다. 오와리 지방은 여덟 군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교토에 가까운 북쪽 4군 중에 니와 군이 위치하여, 그 외에는 하구리葉栗 / 나카지마中島 / 카스가이春日井 군으로 이루어졌으니 중요한 에리어를 점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남부 4군은 카이도海東 / 카이세이海西 / 아이치愛知 / 치타知多로 이루어졌다. 오와리 슈고守護 시바 씨斯波氏를 대대로 섬기며 슈리노스케 나가마사修理亮長政의 대에 이르렀는데, 그 아들이 나가히데였다.

  나고야 성(那古野城, 지금의 名古屋城)에 거주하던 노부나가는, 아침저녁으로 말을 몰고 돌아다니며 초봄부터 여름이 끝날 때까지는 강에서 수영하고, 그 사이에는 활쏘기 연습 / 조총술 수련 / 병법 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나가히데도 행동을 같이 했음이 틀림없다. 유카타 소매를 풀어헤쳐 맨 살을 드러내고, 한바카마半袴를 두른 허리에는 부싯쌈지와 붉은 색 큰 칼을 차고, 챠센마게 식으로 머리를 묶은 요상한 복장을 한 주군의 "멍청이" 스런 행동의 진의도 나가히데는, 일찍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텐분 20년(1551) 아버지 노부히데信秀를 잃은 노부나가는, 내우외환의 한가운데에 놓여졌다. 이에 앞서 텐분 18년(1549)에는 미노美濃 지방의 사이토 도산齋藤道三의 딸 노히메濃姬와 결혼했으나, 원래 오다 가문은 오와리의 슈고다이守護代로 북부 4군을 영지로 삼은 오다 이세노카미 노부야스織田伊勢守信安 계통과, 키요스 성淸須城에 거주하며 남부 4군을 거느리는 야마토노카미 타츠카쓰大和守達勝의 두 계통으로 나뉘어져, 종래부터 싸움을 반복하고 있었다.

  타츠카쓰에게는 "키요스의 세 행정관淸須三奉行" 으로 불리던 세 명의 노신老臣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인 오다 탄죠노츄織田彈正忠가 노부나가의 가문으로, 노부히데 시대부터 두각을 드러냈다고는 하나 오와리 슈고 시바 씨의 남부 4군을 관장하는 슈고다이 오다 가문의 일개 가신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일찍이 텐분 21년(1552)에 영지 내에서 동요의 움직임이 보였고, 동족인 가신들 속에서도 적대자가 나왔다. 노부나가는 조속히 영내의 이질분자들을 일소하고 오와리 통일에 나섰으나, 옆 지방에 위치한 사방의 긴장도 고조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으뜸가는 것이 스루가駿河 / 토오토우미遠江 지방을 다스리는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였다.


  이심전심으로 (노부나가를) 섬기다

  역사상 유명한 오케하자마 전투桶狹間の戰い에서 그 요시모토를 격파한 노부나가가, 미노 평정에 나선 것은 에이로쿠 4년(1561) 무렵부터였다. 노부나가가 (그 때 나이로) 28세였으니 나가히데도 거의 동년배, 이미 계속해서 승진을 하여 부대장隊長이 되었고 여러 번 공적도 세운 바 있었다. 전장에서는 용맹함을 과시했으나 평소에는 온순하며, 노부나가를 위해서라면 분투하며 활약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총애받고 중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노부나가에게는 영매과단英邁果斷함과 냉혹비정한 양면이 있었다는 게 역사가들이 지적하는 바로,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도 "키가 크고 말랐으며, 목소리는 대단히 크고 카랑카랑하다... (중략) 오만하며 명예를 중시한다" 고 평가하고 있으나, 아마 신경질적인 면이 있었으며 자존심도 강했을 것이다. 이런 주군을 거스르지 않고, 고집도 부리지 않으며, 인격이 원만했다는 점이 나가히데의 특색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소중한 대우를 받았다고 보면 된다.

  당시의 미노 지방 슈고는, 노부나가의 장인인 사이토 도산이 죽은 후 그 아들 요시타츠義龍의 시대가 되어, 노부나가와 서로 싸우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에이로쿠 4년(1561) 5월 11일, 요시타츠가 급사하고 외동아들 타츠오키龍興가 그 뒤를 잇자 노부나가는 출병하여, 스노마타(墨俣,, 현 기후 현岐阜縣 안파치 군安八郡 스노마타쵸) 성채를 탈취하고 북상하는 한편으론, 미카와 지방三河國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동맹을 맺고, 드디어 본격적인 미노 평정작전을 개시했다.

  그렇기에 본거지로 삼고 있던 키요스 성에서 코마키小牧로, 말하자면 대본영大本營을 옮겼다. 코마키 산은 현재의 코마키 시 동쪽에 있는 해발 86m의 원형으로 이루어진 산이나, 사이토 쪽의 최전선인 이누야마 성犬山城을 코앞에서 볼 수 있는 위치였다.

  미노는, 히다 강飛驒川의 물을 머금은 키소 강木曾川과 나가라 강長良川이 합쳐져서 이세 만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그 나가라 강의 남쪽 강변에 위치한 해발 328.9m의 이나바 산 정상에 측조된 것이 사이토 쪽의 본거지인 이나바 산성稻葉山城이다. 이노구치 성이라고도 하는 이 성은 평지에서 급격히 고도가 높아져, 산의 모습은 혐준하고 한 쪽으로는 능선과 깊은 골짜기가 늘어서 있으며, 산 정상에서는 오와리와 미노 평야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요해를 자랑했다. 훗날 노부나가가 기후岐阜라고 개칭하여 본거지로 삼게 되는 성이나, 이미 켄닌 연간(1201 ~ 1204년)에 축성된 성이니만큼, 옛날부터 요충지였다. 이 성의 서쪽 (나가라 강과) 키소 강의 합류점에 위치한 지형이 스노마타이다.   

  노부나가는 처음에는 이노구치 성을 서남부에서 공략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스노마타가 중시되어, 키노시타 토키치로가【 하룻밤에 지은 성日夜城 】으로 이름을 남긴 것도 그 때문이나, 수량이 풍부한 키소 강의 예단할 수 없는 홍수 등에 가로막혀, 방향을 틀어 북방에 있는 동 미노의 공략을 우선하게 되었는데, 그 제일선에 선 것이 나가히데였다.

  노부나가의 작전은 단순하게 과감히 싸우는 것이 아닌, 싸우기 이전부터 적군을 교란시키고 그 무장들을 회유하는 기략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수단으로 소년기에 가르침을 받은 병법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함께 성장한 나가히데가, 그런 수법을 익히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 최초로 나가히데는, 미노의 전선기지였던 이누야마의 가로家老로 쿠로다 성주(黑田城主, 현 아이치 현愛知縣 하구리 군 키소가와쵸)인 와다 신스케和田新介와 나카지마 분고노카미中嶋豊後守를 교묘하게 아군으로 끌어들였다.

  나카지마는 오구치 성주(於久地城主, 아이치 현 니와 군 오구치쵸大口町)로, 나가히데가 속한 니와 일족의 세력범위에 있었기에, 그 연줄을 이용하여 이야기를 끌어가고, 거기에다 와다를 끌어들인 것이리라. 그것도 나가히데의 온후함이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로 인해 두 성에 배치되었던 군대를 거두어들이고, 사방으로 시시가키(鹿垣, 대나무나 나무로 엮은 담)를 이중삼중으로 구축하여, 사이토 군의 침입을 저지했다.

  거기에다 더욱 더 노부나가를 기쁘게 한 건, 카지다(加治田, 현 기후 현 카모 군 토미가쵸富加町)의 성주 사토 기이노카미佐藤紀伊守 / 우코노에몬노죠右近衛門尉 부자를 내통시킨 것이다. 이 카지다는 히다 강 우측 강변에 위치하여, 가까이(카모 시 하치야蜂屋와의 중간에 있는 언덕)에는 키시 카게유사에몬岸勘解由左衛門과 타지미多治見 일당이 지키는 도호라 성堂洞城이 있었기에, 전략에서 없어서는 안 될 땅이었다. 노부나가가 환희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나가히데가 대동하여 알현한 사토 부자에게는 기청문(起請文, 서약을 할 때 신이나 부처의 이름에 대고 맹세하게 하는 문서)을 쓰게 하고, "우선 병량을 비축하라" 고 하며 황금 50매를 주었다. 사토 부자는 후대에 감격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때 보통의 주군이라면 "잘 했다" 고 나가히데의 노고를 치하했을 것이나, 노부나가는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마음 속으로는 감사할지 몰라도 그가 가진 높은 자존심이, 그런 말을 뱉지 못하게 했다. 이심전심이란, 이런 걸 말하는 것이리라. 명백한 칭찬의 말이 없는 것에 불만을 품고, 이를 얼굴로 드러냈다가 소외당한 자가 미쓰히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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