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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투 오다 군단》수군지휘관 쿠키 요시타카 (上) ┣ 激鬪 織田軍團 (完)


  이 글은 (舊)《歷史群像シリ-ズ 20 激鬪 織田軍團》의 P. 174 ~ 177페이지에 수록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주요 가신 10명을 중점적으로 다룬《노부나가 가신단의 수수께끼와 실상》제 6화로, 오다 수군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져 있으며, 제 2차 키즈 강 하구 전투에서 모리 수군을 격파한 것으로 이름을 날린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안골포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참패한) 쿠키 요시타카九鬼嘉隆를 다루고 있습니다. 1991년에 출간된 책이니만큼 어느 정도 필터링해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필자는 요시다 켄메이吉田兼明 씨.(1991년 당시 미에 현三重縣 향토사학자)


  요시타카, 시마 지방에서 쫓겨나다

  해적집단인 쿠키 씨의 출신은 명백하지가 않다.《칸세이쵸슈쇼가후寬政重修諸家譜》에도,【 선조의 출자가 상세하지 않다 】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쿠키 씨의 자손들이나 역사가들의 통설에 따르면

  - 쿠마노 벳토熊野別当의 후손
  - 사쿠라 츄쇼佐倉中將 후지와라 타카노부의 후손
  - 키이 지방 쿠마노 여덟 쇼지(庄司, 대관)의 하나, 라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쿠키" 란 이름이 처음으로 사서에 보이게 된 건, 남북조 동란기인 에이겐 2년(1337) 5월로,《난시이분南狩遺文》에【 와키야 요시스케(脇屋義助,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의 동생)가, 쿠키 / 오야마小山 일족이 남조 편을 들어 전투에 참전한 것에 상을 내리다 】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최초이다.

  그 이후, 30년이 지난 죠지 5년(1366), 토마리우라(泊浦, 현재의 토바鳥羽)의 급주로서 쿠키 씨의 성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토바를 중심으로 삼은 쿠키 일족이 활약한 건 이 무렵부터일 것이다.

  각지에 세력을 가지고 있던 일족들은, 토마리우라 대관직이나 이세 만 / 쿠마노나다熊野灘의 해상지배 이권 등을 둘러싸고 남조 측에 붙는 자, 막부의 슈고쇼쿠守護職 편을 드는 자로 나뉘어, 동족상잔의 쟁투를 반복하여 서로의 세력을 갉아먹고서 결국은 역사 속으로 매몰되어 갔으나, 천하가 난마와 같이 어지러워진 센고쿠 시대戰國時代가 도래하자, 방계인 나기리 쿠키 씨波切九鬼氏에서 우마노죠 요시타카右馬允嘉隆가 나와, 다시 쿠키의 이름이 역사상에 등장하여 "쿠키 씨" 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타고난 해적 쿠키 요시타카는, 텐분 11년(1542) 1월, 시마 지방志摩國 아고 군英虞郡에 있는 나기리 성채(지금의 시마 군 다이오우쵸大王町)에서 쿠키 씨 5대인 사다타카定隆의 차남으로서 태어났다.

  이 무렵의 쿠키 씨는 3대인 타카쓰구隆次가 정복한 토우시 군答志郡 카모 향加茂鄕의 타죠田城에 본거지를 두고서, 당주인 사다타카와 장남 키요타카淨隆가 이 곳에 머물렀고, 나기리 성채는 사다타카의 아버지인 야스타카(泰隆, 쿠키 씨 4대)의 은거지가 되어 있었다.

  요시타카는 이 타고난 해적통령인 할아버지로부터 기상이나 해류를 읽는 법, 수영과 조선操船 등, 해적들의 기법이나 전법 등을 사리분별 할 때부터 주입받으며 성장했다. 이 점이 요시타카가 대성한 요인이었다.

  시마는 작은 지방이다. 경작지는 적고 빈곤한 곳이었으나, 따뜻한 기후는 산의 은덕을 입게 했고, 리아스식 해안은 바다의 은덕으로 풍요했다. 그렇기에 시마 사람들이 "악착같이 살아서 출세를 생각하기보다는, 평온무사한 인생을 살겠다" 는 온후한 인품을 갖게 하는 땅이었다. 그러나 전란의 폭풍은 어쩔 수 없이 시마 지방으로 밀려왔다.

  이 지방은 쿠키 씨를 위시하여 13지토十三地頭라 자칭하는 유력자들과 소규모 해적들이 할거하여, 그들 서로가 혈연으로 맺어진 인척관계를 이루고 있었으나, 쿠키 씨만은 이단이었다. 그것은, 3대 타카쓰구가 시마 제일의 명문으로 이소베 7향磯部七鄕 영주였던 마토야 미마사카노카미的矢美作守를 멸망시키고, 4대 야스타카는 13지토의 맹주인 타치바나 무네타다橘宗忠의 일족인 타죠 씨田城氏의 카모 5향을 빼앗아, 시마 지방의 2대 곡창지대를 독점했기 때문이다.

  쿠키 씨의 횡포가 용인되었던 사유는, 코로쿠 2년(1529)으로 거슬러 올러간다. 당시 키타바타케 코쿠시 가문北畠國司家에 반기를 든 아고 군 와구 장和具庄의 아오야마 부젠靑山豊前을 토벌하였을 때, 쿠키 타카쓰구가 가장 먼저 코쿠시군國司軍에 가담하여, 선봉을 맡았던 데서 기인한다. 이 때 이후로, 쿠키 씨는 코쿠시 가문의 뒷배를 무기삼아 세력확대를 도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

  에이로쿠 2년(1559)에 아버지 사다타카가, 에이로쿠 3년(1560)에는 형 키요타카(향년 28세)가 병으로 죽고, 형의 아들인 스미타카(澄隆, 당시 8세)의 후견인으로서 쿠키 가문의 운명은 18세의 요시타카의 양 어깨에 맡겨지게 된다.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는 듯이, 코쿠시 일족으로부터 아내를 맞이한 코우가 우타甲賀雅樂가 쿠키 2대에 걸친 죄상을 정리한 편지를 코쿠시에게 보내어, 쿠키 토벌을 요청했다. 물론, 다른 11명의 지토들도 서명한 것이다. 이래서는 코쿠시 가문도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시마 지방 2군에서 연합군과 쿠키 당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양군은 각지에서 격전을 벌인 끝에, 타죠를 양도하는 조건으로 일시 화의가 성립했으나, 쿠키 토벌만을 염원으로 삼고 있던 마토야 씨의 옛 신하들이나 강경파인 코우가 우타 등의 주장에 의해, 유일하게 남겨진 나기리 성채도 공격하기로 결정되었다.

  아무리 요시타카라도, 도망치는 자가 속출하고, 병사 한 명도 구원오지 않는 상황을 앞에 두고서는, 아버지와 조상들의 땅을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일이 나락에 떨어진 우마노죠 요시타카를 크게 비약시키는 계기가 될 거라는 건, 신만이 알고 있었다.


  노부나가信長의 이세 공략전에 참전  

  돛줄을 던지고서 초조해하는 요시타카 주종 십수 명을 태운, 50개 노로 이루어진 세키부네關船 류진마루龍神丸는, 오와리尾張 아츠다熱田를 목표로 나기리를 출범했다. 그 앞날을 비추는 듯이 쿠마노나다에는 일출이 일어나고 있었다.

  요시타카와 노부나가의 만남은, 당시로서는 희귀한 조총의 명수라는 점에서 노부나가의 신임을 얻은,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시마 지방 전체를 상대로 자력으로 싸운 젊은이에게,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카즈사노스케上總介 노부나가는 "이 녀석은 쓸 만하다" 고 보았다. 거기에다 오다 가문이 갖지 못한 군선軍船을 가지고 임관하는 것이다.

  당초에 요시타카는 카즈마스의 빈객으로서 대우받았고, 후에 이 점은 요시타카에게 커다란 플러스가 되었다. 특히, 조총을 소화한 해전 전법의 연구에 배울 점이 많았고, 요시타카가 옛날부터의 수군법인【 이세류伊勢流 】를 개량하여【 쿠키류九鬼流 】를 만들어 내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에이로쿠 10년(1567) 2월, 타키가와 사콘쇼겐左近將監 카즈마스를 대장으로 한 오다 군의 3천 병력이 북 이세로 침공했다. 그 가운데에는 요시타카보다 늦게 노부나가를 섬기게 된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도 참진하고 있었다.

  호걸 카즈마스에다, 지혜의 미쓰히데에 의한 강온작전이 효과를 보아, 미에 군三重郡 이북의 여러 호족들은 싸우지도 않고 오다의 군문에 항복했다. 단지 핫타 성주八田城主 쿠스노키 시치로자에몬 마사토모楠木七郞左衛門正具만은 항전의 태세를 갖추고서, 굳게 성문을 닫고 있었다. 과연 다이난코大楠公 쿠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의 후예. 쿠스노키류 게릴라 전법에는 그 카즈마스도 공략하는 데 애를 먹어 노부나가에게 출진을 요청했다.

  노부나가는 전광석화와 같이 3만 군대를 이끌고 진군하여, 득의로 삼는 강공으로 치고 들어갔다. 고립무원에 빠진 마사토모는 20분의 1이라는 열세에도 분전했으나, 칼은 부러지고 화살은 떨어져 노부나가에게 항복했다.

  기세를 탄 노부나가는 지체하지 않고 이세 지방 코쿠시의 유력한 아군이었던 칸베 씨神戶氏 공략에 착수하는 동시에, 카즈마스에게 명령하여 코쿠시國司 키타바타케 토모노리北畠具敎의 일족 필두인 코즈쿠리 토모마사木造具政를 아군으로 포섭하도록 했다. 카즈마스는 이미 친분이 있었던, 코즈쿠리 씨 선대의 서자로 승려가 되어 있었던 겐죠인源淨院에게 환속을 권유하여 타키가와 사부로베에 카츠토시滝川三郞兵衛雄利라고 이름짓게 하고, (코즈쿠리에게) 오다에게 붙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코쿠시 토모노리는 격앙하여 코즈쿠리를 토벌하라는 격문을 날렸다. 드디어 쿠키 요시타카의 차례가 찾아온 것이다. 타키가와 카츠토시는 요시타카와 상담한 끝에, 시마 지방의 지토들에게 오다 가문에 붙으라는 사신을 보냈다. 의리 있는 시마의 해적들은 곤혹해 했다. 코쿠시 가문에는 오랜 은고恩顧가 있다. 그러나, 노부나가를 거슬렀다간 죽음 뿐이다. 코쿠시로부터는 "당장 코즈쿠리를 토벌하러 출진하라" 는 재촉이 들어왔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결단은 화급을 요했다.

  해적들은 고육지책을 썼다. 이러한 내용이다.

【 코쿠시 가문에서 이반離反한다. 단지 오다 씨에게도 붙지 않는다. 】즉 방관함으로써 키타바타케와 오다에게 의리를 지키겠다고 하는 취의인 것이다.

  코쿠시 토모노리는 이번에도 열화와 같이 화를 냈다. 에이로쿠 12년(1569) 6월, 중신 노로 에치젠노카미野呂越前守에게, "치카후사(親房, 일본 남북조 시대의 인물,《신황정통기新皇正統記》의 저자로, 그의 3남이 이세 코쿠시 가문의 시조가 된다) 이래의 은혜를 잊은 시마의 해적 패거리를 죽여버려라" 고 명령하였다. 키타바타케 씨로서는 배후에 적을 만드는 결과가 되었다.   

  호기가 도래했다고 기뻐한 노부나가는 타키가와 카즈마스와, 자기 동생 오다 노부카네織田信包를 코즈쿠리 성에 원군으로 보내고, 쿠키 요시타카를 시마 해적들의 대장으로서 파견하였다. 요시타카는 조속히, 이세 외궁外宮 토네시키(刀袮職, 신사의 신관직 중 하나로, 토네 밑에 향민들이 모여 자치적인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의 협력을 얻어, 후타미二見 시오아이 강汐合川을 마주보고 노로 군野呂軍과 대치했다.

  6월 18일 아침, 전투가 개시되어, 오전 중에는 육상전에 익숙한 노로 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으나, 오후가 되어 (이세) 외궁의 토네 세력이 배후에서 노로 군을 급습하면서, 형세는 역전되어 노로 군은 완전히 붕괴, 대장인 노로 에치젠노카미 이하, 일족인 하타세 사네타다波多瀨實忠 / 그 동생인 타츠미노스케巽之助등이 모두 전사하면서 싸움은 해적들의 대승리로 끝났다.

  천하제일ㆍ노부나가의 수군대장 쿠키 요시타카는, 이 때부터 쿠나이쇼유宮內小輔를 칭하게 되었다. 시마 해적들 중에서 유일하게 요시타카에게 저항한 우라 분고浦豊後는 일축당하여 멸망하고, 요시타카의 밑에 있기를 거부한 오바마 카게타카小浜景隆 / 센가 시마千賀志摩 / 마우라 신스케三浦新助 등은 타지로 쫓겨났다.

  쿠키 요시타카는 이제 당당한 시마 지방의 태수가 된 것이다. 이 때 그의 나이는 28세.

  오사츠 당相差黨의 이토 효부伊藤兵部는 일족의 대우를 받고 쿠키 효부라고 칭하게 되었고, 토우시 당答志黨의 와타나베 카즈마 / 하마시마 당浜島黨의 하마시마 분고浜島豊後도 쿠키 성을 하사받았으며, 코시가 당越賀黨의 코시가 하야토越賀隼人 / 아라시마 당安樂島黨의 아라시마 엣츄安樂島越中 / 와구 당의 아오야마 부젠도 각자 중신으로 등용되어 가로家老가 되었다.

  이로써 각각의 해적들의 비전인 수군법이 집대성되어, 천하에 이름 높은【 쿠키류 】가 태어나게 된 것이다.    



덧글

  • 도연초 2015/01/07 11:09 # 답글

    기타바타케 토모노리의 비참한 말로는 이세지마 해적당을 적으로 돌린 순간 예고된 것이었던.....?
  • 3인칭관찰자 2015/01/07 22:43 #

    보통 시마 해적들보다는 코즈쿠리 토모마사의 배반이 강조되는 경우가 많더군요. 시마 해적들을 적으로 돌리지 않았으면 좀 더 병력집중이 가능했겠지만, 노부나가 포위망도 가동되지 않았던 1569년 당시의 노부나가 동원병력을 생각하면..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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