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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투 오다 군단》모리 란마루와 그 일족들 (下) ┣ 激鬪 織田軍團 (完)

  이 글은 (舊)《歷史群像シリ-ズ 20 激鬪 織田軍團》의 P. 170 ~ 173페이지에 수록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주요 가신 10명을 중점적으로 다룬《노부나가 가신단의 수수께끼와 실상》제 5화로, 혼노사의 변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따라 순사하였으며, 현재 노부나가의 대표적인 시동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모리 란마루森乱丸와 그 가족(주로 란마루의 형제들)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필자는 타니구치 켄고谷口硏語 씨.(1991년 당시 호세이대학法政大學 비상근강사)


  시동 모리 란마루森蘭丸의 걸출한 기량

  글머리에 소개한 모리 란마루 / 보마루坊丸 / 리키마루力丸 3형제는 이 모리 나가요시森長可의 동생들로, 셋 모두가 노부나가의 시동小姓이 되어 있었다. 시동이란 귀인貴人, 이 경우에는 노부나가를 측근으로서 모시며 그 신변의 잡다한 일에 종사하는 자로, 대다수는 10대 소년이었다.

  오다 가문의 경우, 시동들의 편성이나 조직상의 위치 등에 대해선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원래 신변을 돌보는 게 그 임무였고, 그런 한편 노부나가의 권력 그 자체가 팽창을 계속하고 있었으니 조직적으로 고정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군을) 측근으로서 모셔야 하는 자들이므로, 당연히 그 소년들은 그 나름대로 기반이 있는 가문에서 뽑힌다. 거기에다 상대는 오다 노부나가이다. 어설픈 소년으로선 도저히 섬길 수 없다. 이 점에서, 모리 가문은 요시나리 이래의 유서由緖도 있고, 3형제들도 우수했던 것이리라. 특히 란마루는 노부나가 시동의 대표적인 인물로 여겨져 있고, 그에 대한 일화도 많다.

  몇 가지를 소개해보도록 하자.

  - 어느 때, 노부나가가 온갖 진기한 기화들을 가지고 와서는, "이 중에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뭐라도 주마." 라고 란마루에게 말했다. 란마루가 "이 중에 갖고 싶은 건 없습니다." 고 답하자 노부나가는, "그렇다면 갖고 싶은 걸 손바닥에 써 봐라. 나도 네 마음을 추량해서 적어볼 테니." 라고 말하고는, 두 사람이 손바닥을 서로 맞춰보자 정말로 내용이 똑같았다. 

  란마루는 전사한 아버지 요시나리의 영지였던 오미 지방 사카모토近江坂本가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에게 주어졌기에, 망부의 옛 영지인 이 땅이 갖고 싶다고 쓴 것이었으나, 그건 노부나가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 어느 때, 노부나가가 "장지문을 열어둔 채로 왔으니 닫고 오너라." 라고 말했다. 란마루가 가 보니 (장지문은) 닫혀 있었다. 란마루는 이를 일부러 열어젖힌 후, 다시 소리를 내어 닫았다. 돌아온 란마루에게 노부나가가 "열려 있었나?" 하고 물으니, "닫혀 있었습니다." 라고 답한다. 그렇다면 문을 닫은 소리가 난 건 어찌 된 일이냐, 하고 따지자, "사소할지 몰라도 우에사마上樣께서 '열어둔 채로 왔다' 고 하시는 데 문이 닫혀 있어서는, 우에사마께서 착각한 것으로 비치겠지요. 그렇게 생각하고 일부러 문을 연 후 닫아, 여러 사람들에게 그 소리를 들려준 겁니다." 라고 답했다 한다.  

  - 어느 때, 어느 스님이 노부나가에게 진상한 수많은 밀감을, 란마루가 광주리에 담아 피로披露하게 되었다. 노부나가가 "네 힘으로는 위태하다. 넘어질 건데." 하고 말하자, 아니나 다를까, 란마루는 넘어졌고, 밀감도 좌중에 쏟아졌다. 노부나가는 "그것 봐라. 내가 예상한 대로였지 않느냐." 고 말하며 웃었다. 

  후에 어느 사람이 란마루에게 "불찰을 저질렀네" 하고 말하자, 란마루는 "아니, 그것은 불찰이 아니지. 우에사마께서 위태하다고 하시는데 무사히 광주리를 옮겨서는, 우에사마의 예상이 틀리게 된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일부러) 넘어진 것이다" 라고 답했다고 한다.

  - 어느 때, 노부나가가 손톱을 깎은 후, 란마루에게 "이걸 버리고 와라." 고 명령했다. 란마루는 일어나지 않았는데, "왜 버리러 가지 않느냐?" 하고 묻자, "손톱이 하나 모자랍니다." 라고 답한다. 그래서 소매를 털어보자, 손톱 한 개가 소매에서 떨어졌다.

  - 어느 때, 노부나가가 날밑鐔에 국화 (문양) 를 곁들인 칼을 측근(近習, 킨쥬)들에게 보여주며, "국화 숫자를 맞추는 자에게 이 칼을 주겠다" 고 말했다. 모두가 각자 생각대로 국화 숫자를 말했으나, 란마루만은 말하지 않는다. "왜 입을 닫고 있느냐?" 하고 묻자, 노부나가가 용무를 보는 동안, 칼을 만져 보았을 때 이미 세어 보아서 알고 있었기에 답하지 않았다, 고 대답했다. 노부나가는 이 정직한 대답에 기분이 좋아져, 그 칼을 란마루에게 주었다고 한다.


  노부나가와 성쇠를 같이 한 모리 형제

  이와 같은 일화들도 가계도(=족보)와 마찬가지로 에도 시대에 쓰여진 책에 적혀 있는 것이기에, 어디까지 신용할 수 있을진 모르겠으나, 시동이라는 입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상상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첫 번째는 시동이 오다 노부나가와 극히 밀접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 이는 단지 거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가까워, 시동과 노부나가 사이에는 상당히 친밀한 관계가 있었으리라는 것.

  두 번째는, 시동이 그만큼 상당한 기지와 재간을 가지지 않으면, 도저히 노부나가의 상대를 할 수 없으리라는 점이다.

  어찌 됐든, 란마루가 노부나가의 시동들 중에서도, 출중한 재능을 가지고 있던 건 사실인 듯하다. 란마루는 에이로쿠 8년(1565)에 태어나, 텐쇼 5년(1577) 13세의 나이로 노부나가의 시동들 속에 들어갔다고 한다. 지금 일반적으로는 "란마루蘭丸" 로 통하고 있으나, 남겨진 고문서에는 "모리 란보시森乱法師" "모리 란 나리토시森乱成利" 라고 적혀 있으며,《신쵸코우키信長公記》에도 "모리 란森乱" 이라고 적혀 있다.   

  이 란마루는, 실제로도 우수한 인재로, 그만큼 이른 시기부터 노부나가의 마음에 든 듯하며, 텐쇼 7년(1579)에 시오카와 쿠니미쓰鹽河國光에게 노부나가가 하사한 은자 100매를 전달하는 사신으로 간 적이 있다. 텐쇼 9년(1581)에는 오미 지방에 500석의 영지를 받았으며, 이미 이 무렵에는 단순한 시동의 영역을 넘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텐쇼 10년(1582) 정월, 이세 대신궁伊勢大神宮의 식년천궁(式年遷宮, 역주 : 신사에서 새 신전을 지어 그곳으로 이전 신전에 있던 신체를 옮기는 의식) 비용으로, 기후 성의 곳간에서 3천 관문을 기증하게 되었는데, 란마루가 사신이 되어 기후 성주인 노부타다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그리고 그 해 3월에 다케다 가문武田家이 멸망한 직후, 시나노信濃 마쓰오松尾의 오가사와라 노부미네小笠原信嶺가 용서를 받은 답례로 출두했을 때, 본 영지를 보증하는 노부나가의 슈인센朱印狀을 야베 센시치로(矢部善七郞, 이에사다家定)와 란마루가 사신이 되어 하사하였다.

  다케다 가문이 멸망한 후, 란마루는 미노 에나 군惠那郡 이와무라岩村 5만 석과 미노 카모 군 요나다지마米田島 1만 석을 하사받았으니, 이 모두는 란마루가 유능한 관료로서 오다 정권 속에 위치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이 란마루를 위시하여 보마루 / 리키마루 3형제는 혼노사本能寺에서 노부나가를 따라 죽었다. 형 나가요시도 그로부터 2년이 지나 나가쿠테 전투長久秀合戰에서 27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했다. 그야말로 오다 노부나가와 함께 살고, 노부나가와 함께 죽은 모리 가문의 형제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가요시의 후계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막내동생 타다마사忠政가 이었다. 타다마사는 도쿠가와 밑의 영주大名가 되어 케이쵸 5년(1600), 형 나가요시와 인연이 있는 시나노 카와나카지마川中島 13만 7500석에 봉해져, 미노 카네야마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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