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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파라과이 전쟁 (3)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2호(2000년 여름호) 170~177쪽의 기사인, 마에다 마사히로前田正裕 씨가 집필한《파라과이 전쟁》을 번역한 것으로. 1864년 우루과이 문제를 둘러싸고 파라과이 vs 브라질 / 아르헨티나 / 우루과이 3국 연합군이 격돌하여 1870년에 결말이 난, 남미독립 이래 최대최악의 전쟁이었던【 파라과이 전쟁 】을 다루고 있습니다.


  3개국 연합국의 대반격

  1865년 5월 1일, 아르헨티나 / 브라질 / 우루과이 3개국 간에 비밀동맹조약이 체결되었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 단독으로 강화하지 않는다.
  ▶ 전쟁목적은 로페스 타도이다.
  ▶ 파라과이의 독립은 보증한다.
  ▶ 전후 배상금을 받는다.
  ▶ 파라과이 방어의 요충지인 우마이타 요새를 파괴한다.

  그러나 조약은 외부로 새어나가, 그 내용을 알게 된 파라과이는 이 전쟁을 자국 존망이 걸린 싸움으로 받아들였기에, 그 항전의지를 더욱더 굳히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1866년, 남부전선에서 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브라질 함대는 파라과이 강을 북상하고, 연합군 지상부대는 이와 병항하여 육상으로 북진, 함께 파라과이 수도 아순시온 공략을 목표로 했다.

  우선 연합군의 5만 병력이 파라나 강의 남쪽 강변에 있는【 콜라레스 】에 집결하여 도하북상을 도모했다. 파라과이군은 파라과이 강과 파라나 강이 합류하는 삼각지대에 병력 3만을 집중시켜 파라과이 강에 면한 요충지【 파소데파트리아 】에서 저지하려는 작전에 나섰다. 파라과이 측 방위선의 배후에는 견고한 우마이타 요새 외에도 여러 곳의 포대가 파라과이 강을 노려보며, 강을 거슬러 오르려는 브라질 함대를 저지했다.

  파라과이군은 끊임없이 야음을 틈타 수백 명의 특별기습대를 카누에 태워 파라나 강을 건너게 해, 맞은 편 강변의 콜라레스에 상륙시켜 연합군에 참격전을 가했다.

  1866년 4월, 브라질 함대의 원호포격 하에 연합군은 함선 56척을 이끌고 파라나 강을 건너, 북쪽 강변의【 이타필 】요새를 탈취하고 그 일부는 파라과이 강을 건너 파소데파트리아 부근에 상륙했다. 이로 인해 파라과이군은 파소데파트리아를 지켜내지 못한 채, 막대한 자재와 식량을 버리고 도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파라과이군이 패퇴한 원인으로 "강변에서의 격퇴라는 전술에 지나치게 집착했기 때문" 이라고 말하는 역사가도 있다. 종종 특별기습대를 보내 그들을 브라질 함대의 화포에 노출시킨 것도 잘못으로, 파라과이군은 오히려 처음부터 파소데파트리아의 참호에 농성하였다면 연합군은 이를 공략하기 힘들었으리라는 것이다.

  파소데파트리아를 포기한 파라과이군은 북쪽으로 물러나,【 투유티 】주변으로 펼쳐진【 베라코 강 】습지대의 북쪽에 포진했다. 그 총병력은 2만 5천 명. 진격한 연합군은 파소데파트리아에서 북쪽으로 1.5km를 나아가 동서로 뻗은 고지에 참호를 파고 포진했다. 그 총병력은 미트레 총사령관 휘하 4만 5천 명. 이렇게 양군은 베라코 강 습지대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파라과이군 당초의 작전은, 연합군의 공세를 기다렸다가 그 공세가 시작되면 예비대 1만으로 그 배후를 들이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로페스는 5월 20일, 돌연히 방침을 변경하고 연합군에 대해 일제히 선제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신속히 낌새를 챈 연합군은 태세를 정비하였었고, 포병대도 절호의 사격위치를 잡고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습지대를 우왕좌왕하며 진격하던 파라과이 부대는 저격을 받고 섬멸되었고, 기병대의 돌격도 엄청난 피해를 입고 격퇴당했다. 줄을 잇는 파라과이 병사들의 "반자이 돌격" 은 이미 기다리고 있던 연합군의 강력한 화력에 의해 줄지어 쓰러졌다.

  오후 4시 경, 남미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나는 전투가 끝났다. 파라과이군은 유기한 시체만 6천 명을 넘어가는 참패를 당했다. 한편 연합군도 사상자 8천 명을 내고 피로해져 있었기에 파라과이군을 추격할 여력은 없었다. 여기에서도 파라과이 군은 열세를 무릎쓰고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군에게 과감히 도전했으나, 패배하는 결과를 맞았다.  

   
  수도 아순시온 함락

  투유티의 패배로부터 1개월이 지난 6월 말, 로페스는 신속히 병사 2만 명을 긁어 모았으나, 새로이 편성된 부대에는 노인과 아동들이 많았고, 과거의 정예부대의 잔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후 파라과이군은 신중해져, 참호진지 속에서 적을 요격하는 경우가 많았다.

  로페스의 제안으로 9월 12일,【 아타이티 】 /【 코라 】에서 연합군 총사령관 미트레와의 사이에 화평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3국동맹 사이에 결정된 선은 양보할 수 없다는 연합국측의 입장과, 그 조건은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로페스의 주장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회담은 결렬로 끝났다.

  9월 3일, 연합군 1만 4천 명은 파라과이군 2천 500명이 지키던【 크루스 포대 】를 점령했다. 이 작전에서 브라질의 신형전함【 리오데자네이로 】가 기뢰에 맞닥뜨려 침몰했으나, 연합군은 더욱더 상류에 위치한【 쿠루파이티 포대 】로 쳐들어가 9월 21일 2만의 병력으로 여기를 공격했다.

  그러나 화평회담 도중 쿠루파이티의 방어진지가 강화되었기에 그 수비는 견고하여, 섣불리 달려든 연합군은 9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했다. 파라과이 측의 전사자는 54명, 믿기 힘들 정도로 적었다.

  이 대패 후 미트레 장군은 연합군 총사령관을 사임하고, 그 뒤를 이어 브라질의【 카시아스 공작 】이 총사령관이 되었다. 쿠루파이티에서의 패배 후, 원래 이 전쟁에 대한 비판적 의견이 많았던 아르헨티나에서는 크고 작은 반란이 빈발하여, 정부는 이에 대한 대응에 쫓기게 되었다. 

  한편 물자궁핍이 심각해진 파라과이에서는 국내에서 금속 공출운동이 일어나, 그걸로 각종 대포들을 주조해 전선에 보냈다. 날아온 적의 포탄은 재생시켜 포탄이나 산탄으로 사용하고, 약초를 채집하여 의약품을 만들었다. 부인들에게는 보석들을 공출하여 이것들을 훈장으로 사용하였다.

  1868년 2월경, 연합군 5만 명에 맞선 파라과이 군은 1만 5천 명으로 줄어들었다. 이 무렵 우루과이에서도 콜로라도당과 블랑코당 사이에 내전이 격화되어, 콜로라도당 당수 플로레스와 블랑코당 당수【 베로 】가 2월 19일이라는 같은 날짜에 암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브라질 함대는 2월 19일, 함선 43척과 병사 4천 명으로 우마이타 요새를 공격했다. 그 사이에 3척은 그 지점을 강행돌파하여 강을 거슬러올라가, 파라과이 수도【 아순시온 】에 도착하여 그곳을 포격한 후 철퇴했다. 이 브라질 함대에 맞서 카누에 나눠 탄 파라과이 특공대 수백 명이 2차례에 걸쳐서 공격을 가했으나, 손실만 많았을 뿐 전과는 없었다.

  이 사건은 로페스에게 큰 충격을 주어, 그는 전선에서 정부와 주민들을 아순시온에서 동쪽으로 10km 떨어진【 루케 】로 소개시키도록 지시하였다. 24시간 내로 이동할 것을 명령받은 주민들은 가재도구를 옮길 시간이 없이 입은 옷 그대로 이동하였고, 그들 중 다수가 이동지의 야외에서 생활했다.

  로페스는 3월에 사령부를 후퇴시켜【 파소프쿠 】에서【 산 페르난도 】로 옮겨가, 그곳을 거점으로【 테바크와리 강 】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 무렵 파라과이 내부에서는 반전음모사건이 발각되어, 산 페르난도에 음모자들을 재판하는 특별 군사법정이 설치되었다. 여기에 얽혀 처형된 자는 368명을 넘었다. 그 중에는 로페스의 동생인【 앙헬 베니크노 로페스 】와, 【 베난시오 로페스 】를 비롯한 처제 2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미 1년 동안 포위당해 있던 우마이타 요새는 식량과 탄약이 부족해져 절망한 나머지, 방위사령관【 알렌 대령 】이 자살했는데, 결국 7월에 쿠루파이티 포대와 함께 함락되었다.

  그 후 연합군은 급속히 북상을 개시했다. 이로 인해 파라과이군은 8월, 방위선을 테바크와리 강에서 북쪽으로 옮겨, 수도 아순시온에서 남쪽으로 35km 떨어진【 피키시리 강 】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로페스는 그 곳을 수도의 최종방어선을 삼아【 이타 】【 이바테 】에 소재한 구릉지대에 사령부를 두었다.

  그 병력은 노인과 아이들을 합쳐 1만 3천 명. 연합군은 피키시리 강의 파라과이군 방어선을 남쪽 정면에서 공격하기를 피하고, 파라과이 강 서쪽 강변의【 챠코 】를 북상하여 진격한 후, 동쪽으로 도하하여【 산 안토니오 】에 나타났다. 그 병력은 3만 8천 명으로, 그들 중 일부인 1만 8천 명은 남하하여 북쪽에서부터 피키시리 강에 있는 파라과이군의 배후에 도달했다.

  파라과이군 3천 500명이 이를 북쪽【 이토롤로 】강에서 저지하려 했으나 패배하고【 아바이 】로 물러났다. 여기서도 파라과이군은【 비레타 】로부터의 응원군을 합친 4천 병력으로 연합군을 막으려다 거의 전멸했다. 12월 21일부터 7일간 계속된 이타 / 이바테 공방전에선 600명의 여성들까지 참가해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여기에서도 그 대부분이 전멸하고, 로페스는 부하 60명과 함께 도주했다.

  연합군은 로페스를 쫓지 않고, 1869년 1월 1일 아순시온에 입성하여 이곳에 임시 민주정부를 수립하였다.



덧글

  • 금린어 2014/12/22 14:12 # 답글

    잘 보았습니다 ㅎㅎ

    중간에 '기병댕' 이라는 오타가 있네요.
  • 3인칭관찰자 2014/12/22 16:45 #

    기병댕... ㅠㅠ 수정했습니다.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 healpos 2014/12/23 14:28 # 삭제 답글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저는 파라과이 전쟁이라고 하면 먼저 선전포고했다가 남성인구의 90%가 손실된 막장전쟁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본격적인 글로 보니까 또한 흥미롭네요. 이런 재미에 역사군상 잡지를 구독하려는 것일까요.

    하지만 저는 일본어를 못해서......(이제 가타카나 읽는 수준)이렇게 번역되는 글만 읽을 수 밖에 없죠. 그래서 이런 거 번역하시는 분들의 수고에는 언제나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꾸벅.

    그리고 이런 글 마지막에 (거기다가 무대도 남미겠다) 일본인 이민자를 칭찬하는 부분이 들어가 있는데, 이런 부분은 아무리 생각해도 영 찝찝하군요.
  • 3인칭관찰자 2014/12/23 16:43 #

    오랫만에 뵙습니다(__)

    파라과이 전쟁이 막장전쟁은 맞지요. 단지 번역하면서 느낀 이미지라면 독재자 2세가 상황파악 잘못하고 대국들에 꼬장부리다가 한 나라가 박살난 전쟁이랄까..

    일본책 번역하다 보면 가끔씩 저런 일본식 국뽕(요즘 일본에서 유행하는 일뽕류 책들에선 저런 내용이 일상입니다만)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꼭 파라과이 전쟁에다 일본인 이민자를 엮을 필요가 있겠나 싶죠.

    하지만 이 책이 당초에 누구에게 읽히려고 만들어졌나 생각해보면(자국 타겟으로 팔리는 물건이니까) 가끔 저 정도의 국뽕이 등장하는 건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 일본인 독자들에게 파라과이란 나라를 알기 쉽게 만들어야 하는 게 목적이라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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