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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파라과이 전쟁 (2)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2호(2000년 여름호)
170~177쪽의 기사인, 마에다 마사히로前田正裕 씨가 집필한《파라과이 전쟁》을 번역한 것으로. 1864년 우루과이 문제를 둘러싸고 파라과이 vs 브라질 / 아르헨티나 / 우루과이 3국 연합군이 격돌하여 1870년에 결말이 난, 남미독립 이래 최대최악의 전쟁이었던【 파라과이 전쟁 】을 다루고 있습니다.


  전쟁의 원인

  전쟁의 원인은 우루과이에 있었다. 원래 남미의 여러 나라들은 독립하기 이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는데, 이 두 나라는 우루과이 땅을 둘러싸고 몇 번이나 싸운 전력이 있었다. 그러한 경위는 스페인에서 독립한 아르헨티나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 브라질의, 우루과이를 둘러싼 패권 다툼으로 이어졌다.

  이윽고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우루과이 문제에서는 화해하게 되었으나, 이번에는 파라과이가 우루과이를 놓고 아르헨티나 / 브라질과 대립하여, 이것이 전쟁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까지는 관계 각국의 속사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아르헨티나는 국내에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와 이에 반발하는 다른 13주의 대립, 그리고 중앙집권을 주장하는 파벌과 지방분권제를 주장하는 연방파 간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해외무역의 출입구인 라플라타 강의 하구를 틀어쥔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는 그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여 다른 여러 주에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그 압력은 파라과이에게도 마찬가지로 작용했기에, 지방의 여러 주는 파라과이와의 사이에 기맥을 통하고 있었다.

  브라질에서도 지역적 분열주의는 존재하고 있었으나, 그 중에서 브라질 남부의【 마토그로소 주 】는 해외와의 무역루트인 파라과이 강과 파라나 강에 기대고 있었다. 이 2개의 강은 모두 파라과이의 영내 내지는 국경을 통해서 흘렀기에, 그 자유항행권을 둘러싸고 브라질과 파라과이 간에 분쟁이 발생했다.

  우루과이는 파라과이에 있어선 바다로 이어지는 통로에 해당했기에, 그 자주독립은 파라과이의 생존과 연관되는 전략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우루과이도 정권투쟁으로 대단히 혼란스러웠다. 파라과이가 지지하는 보수당인【 블랑코당(백당白黨) 】정부가 자유당인【 콜로라도당(적당赤黨) 】의 반란에 직면하고 있었고, 미트레 대통령 통치하의 아르헨티나는 콜로라도당을 지지했다. 한편 블랑코당 정부는 브라질과의 분쟁도 떠안고 있었다.

  이와 같은 국제환경 아래, 로페스의 대외정책은 위험한 도박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 근저에는 프란시아 시대 이래로 계속되었던 파라과이 고립에 대한 불안과, 독립보전에 대한 바램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파라과이는 그 발언력을 확보하기 위해 군비의 충실을 급격한 핀치로 밀어붙였다.

  로페스는 이웃 나라인 아르헨티나 / 브라질의 실력을 과소평가하고, 양국이 안고 있던 국내의 지역주의적 분열문제를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루과이를 둘러싼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간의 긴장관계도 과대평가하여, 양국이 단결하여 파라과이와 적대할 것이란 구도는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양국은 모두 국내의 지역적 분열주의를 극복하고, 급속히 통일국가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우루과이를 둘러싼 대립에 있어서도 양국은 함께 야당인 콜로라도당을 지지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였기 때문에, 급속히 화해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로페스는 이러한 주변국가들의 움직임을 깨닫지 못했다. 정보의 치명적인 부족이었다.

  그리고 끝내 브라질은 파라과이의 항의를 무시하고 우루과이로 출병하여, 이미 아르헨티나가 우루과이로 데려다 놓은【 베난시오 플로레스 】가 지휘하는 콜로라도당의 반정부 그룹을 지지했다. 이 출병으로 브라질군은 우루과이 블랑코당 정부를 쓰러뜨리고, 플로레스 등의 콜로라도당을 정부에 앉혔다.

  이렇게 되면 블랑코당 정부를 지지해 왔던 파라과이는 고립된다. 라플라타 지역의 균형이 무너진다고 본 파라과이는 1864년 11월 브라질과 단교하고, 파라과이군 6천 500명은 북부 국경을 넘어 브라질령 마토그로소 주로 침공했다.

  로페스는 우루과이에서 브라질군과 대결하는 길을 채택하지 않고 느닷없이 브라질 영토로 진공하였기에, 이로서 대 브라질 전면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한편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도움을 받아 수립된 콜로라도당의 플로렌스를 수반으로 한 우루과이의 신정부도 파라과이에 선전포고했다. 이 때문에 로페스는 우루과이와 브라질 남부로의 침공도 시도했다. 이를 위해선 아르헨티나령 일부를 통과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를 거부당하자 1865년 3월, 아르헨티나에게도 선전포고했다.

  동시에 파라과이군은 파소데파트리아에서 파라나 강을 건너, 아르헨티나 북부【 콜리엔테스 주 】로 침공했다. 이제는 아르헨티나마저 적으로 돌리고 만 파라과이의 모습은, 제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프랑스로 쳐들어가게 위해 벨기에의 중립을 침범했다가 영국을 적으로 돌리고 만 사례와 닮았다.

  아르헨티나의 미트레 대통령의 입장에서 보면, 파라과이 쪽에서 전쟁을 걸어준 덕분에 국내의 참전반대파, 특히 지방 여러 주의 반대 움직임을 두려워하지 않고 브라질과 연합하여 파라과이와 싸울 조건이 갖추어졌으며, 한편으로 공공연히 우루과이의 콜로라도당 신정부와 손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파라과이는 이르헨티나 / 브라질 / 우루과이라는 자국령을 둘러싼 3개국을 적으로 돌린 전면전쟁에 돌입했다. 파라과이가 두려워하던 고립이 현실의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파라과이의 선제공격

  파라과이는 속전속결을 노리고 세 방면에서 선제공격에 나섰다. 병력동원은 신속하여, 개전시의 파라과이군 병력은 8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승패를 가를 열쇠가 될 파라과이의 함대는 대부분 외륜함으로, 스크류로 추진하는 신식함이 많은 브라질 함대에 비해 전투력은 많이 뒤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페스가 승리에 대한 자신을 가졌던 건, 규율이 잘 잡혀 있고 충분히 훈련된 병사들, 특히 그 중에서도 국민의 태반을 점하는 충용무비한 과라니족 병사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기 떄문이었다.

  로페스가 모처럼 해외에 발주해 놓은 신예함 6척의 입수도 기다리지 않고 개전해버린 건, 위와 같은 자신감 과잉에 따른 것이었다. 만약 포탑 탑재 장갑함을 포함한 이들 6척이 예정대로 파라과이 손에 들어왔다면 전국戰局은 상당히 유리하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파라과이는 라플라타 하구를 봉쇄당하였기에 완성된 신예함을 입수하지 못하고, 대신 이들을 구매한 브라질 해군은 압도적인 우위에 서게 되었다.

  브라질령 마토그로소 주로 침공한 파라과이군은 요충지【 코인브라 】와【 코른바 강 항구 】를 점령한 외에도 이 주의 상당 부분을 제압했다.(1864년 12월) 그리고 앞에서 기술한 파소데파트리아에서 아르헨티나령 콜리엔테스 주로 진공한 파라과이군 보병 / 기병 합쳐 2만과 30문의 포는 1865년 4월, 콜리엔테스의 주도 콜리엔테스 시를 점령. 다시 또 남진하여【 엔트레 리오스 】주로 향했다.

  그리고 6월 11일, 파라과이군 1만 2천 명은【 엔카르나시온 】에서 파라나 강을 건너 아르헨티나령【 미소네스 】지방을 석권하고, 우루과이 강을 건너 브라질령【 리오그란데 드 스루 】주로 진공했다. 이 부대는 도중에 병력을 2분하여 본대 8천 명은【 우루과야나(브라질령) 】를 점령. 다른 별동대는 우루과이 강을 사이로 대치하던 강 건너편의【 야타이 】를 점령했다.

  같은 6월 11일, 수상에서는 14척의 파라과이 함대가 자국의 명운을 걸고 파라나 강에서 브라질 함대에 결전을 시도했다.

  파라과이 함대 14척 중 8척은 수백 톤급이 대부분인 외륜선. 남은 6척은【 차타 】라고 불리는 평저선에다 포를 쌓아놓은 것으로, 그것도 다른 배에 예항되어 움직이는 것들이었다. 이에 비해 브라질 함대는 9척으로, 척수에선 밀리지만 그 과반수는 스크류로 추진되는 대형 근대함들이었기에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파라과이 함대는 필사적인 작전을 시도했다. 이는 야음을 타고 브라질 함대의 상류로 접근, 여기에서 브라질 함대의 측면을 1.5km 거리에서 지나쳐 가 하류의 강폭이 넓은【 리아쿠에로 】지점에 도착한다. 거기서 유턴하여 새벽과 함께 각 함들이 브라질 함대에 제각각 졉현하여, 병사들이 그 곳으로 뛰어올라가 브라질 함을 탈취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타이밍이 늦어져 브라질 함대의 옆을 통과한 때에는 이미 날이 밝아 브라질 함대에게 발견되었다. 브라질 함대가 닻을 올리고 움직이기 시작한데다, 파라과이 함대가 접현한 적함에 자신들의 함선을 고정시키기 위한 갈고리를 휴대하는 걸 잊었던 점, 브라질 함의 현측이 높았던 점 등에 의해 작전계획은 크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호간의 포격전이 벌어졌으나 파라과이 함대는 브라질 함대의 화력 앞에 대패하고 7척을 상실하는 큰 손해를 입었다. 브라질 함대의 피해는 1척 상실 / 1척 대파. 이후 파라과이는 중요한 하천지배권을 잃었다.

  리아쿠에로에서의 파라과이 함대 패배의 충격으로 8월, 야타이를 점령한 파라과이 별동대는 연합군 1만 3천 명에게 포위되어 전멸했다. 그리고 우루과야나의 본대도 연합군 3만 명에게 포위되는 한편으로 우루과이 강 도하지점의 퇴로도 차단당했기에 9월 항복했다.

  이 패배소식을 들은 로페스는 콜리엔테스 침공군에게 철수를 명령했다. 결국 일련의 남부 작전에서 파라과이군은 2만 1천 명의 병력을 잃었다.

  이렇게 1864 ~ 1865년의 파라과이군 선제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이후 파라과이군은 수세로 몰렸기에, 전장은 파라과이 국내로 옮겨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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