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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스기 켄신의 부하》에치고군 효장열전 (2) 역사


  이 글은《直江兼続と戰國武將ㆍ合戰の真実》P. 80 ~ 84에 수록된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의 주요 신하들을 망라한 간략한 인물열전들의 모음집인【 에치고 군 효장열전越軍驍將列傳 】을 번역한 글입니다. 필자는 작가인 고故 모모세 메이지百瀨明治 씨. 


  카키자키 카게이에枾崎景家 - 에치고 제일의 맹장(생년미상 ~ 1574)

  우에스기 군단의 주력을 형성하는 호족(國人, 코쿠진) 그룹은, 비교적 독립성이 강한 아가키타(阿賀北, 揚北)의 호족들과, 나카고오리中郡, 카미고오리上郡에 거점을 두고 이른 시기부터 우에스기 가문에 종속한 제장들, 이렇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카키자키 카게이에는 후자의 일원으로, 키자키 성城崎城과 사루게 성猿毛城을 영유했다.

  이 두 성 중에서 특히 사루게 성은, 카스가 산성春日山城에서 카에츠下越 지방으로 향하는 목덜미를 움켜진 요충지였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으나, 카게이에는 에이로쿠 초년(1558) 이래 내정에 관여하게 되었고 카스가 산성을 지키는 역할에도 임명된 바 있었다. 에이로쿠 3년(1560) 켄신이 영내의 여러 가지 잡다한 세금과 소작료 등을 5년간 면제하겠다는 과감한 정령을 내렸을 때, 카게이에는 (켄신의) 숙로宿老인 사이토 토모노부齋藤朝信와 함께 행정관으로서 그 시행에 관여하였다.

  그러나 카게이에의 본업은 내정가이기보단 용맹과감한 무인이라는 데 있었다.《우에스기 씨 군역장上杉氏軍役帳》에 의하면 카게이에의 아들 하루이에晴家는 260명의 군역을 담당하면서, 대부분 우에스기 군단의 선봉을 명 받았던 듯하다.

  켄신과 신겐의 일기토 전설로 이름 높은 에이로쿠 4년(1561)의 카와나카지마川中島 대격전에서도, 카게이에는 선봉을 명 받아 사이죠 산妻女山을 일거에 달려 내려가, 아침 안개로 둘러쌓인 하치만바라八幡原에 있는 신겐 본영에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서전에서 카게이에의 활약은 대단하기는 했으나, 그 도중 다케다 군의 용장 오부 효부飯富兵部의 반격을 받아 버텨내지 못하고 (패주하다) 동료인 이로베 카츠나가色部勝長의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 전후에 일어난 일이리라. 어느 해, 켄신이 엣츄 공략을 위해 군대를 일으켜, 카게이에에게는 접경 지역의 성을 공략할 것을 명령했다. 그 전투 도중, 오카와 쥬로大川十郞라는 가신이 왼 팔에 화살이 박혔음에도 겁먹지 않고 적병과 치열하게 싸워, 끝내 목을 베어 카게이에 앞에 가지고 왔다. 그러나 카게이에는 칭찬하기는 커녕,

  "지금도 전투는 한창이다. 목 한 두개를 베었다고 해서 굳이 내게 달려오는 건 답답한 수훈이구나. 빨리 전투지로 돌아가라!" 고, 오히려 노기 섞인 목소리로 오카와 쥬로를 꾸짖었다고 한다. 공명 / 수훈의 평가는 전투 후에 하는 것으로, 싸우고 있는 지금은 우선 승리를 확실한 것으로 해야한다는 것을 주의시키고 싶었을 맹장 카게이에 나름의 대국관大局觀이 이 에피소드에서는 잘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 외에도 카게이에는 에이로쿠 3년(1560)의 간토關東 출진을 따라 오다와라 호죠小田原北条 공격에서 활약하였고, 다음해인 에이로쿠 4년(1561) 3월,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憲政에게 간토 칸레이 직을 물려받은 켄신이 가마쿠라의 츠루가오카 하치만구 신사 앞에서 화려하게 취임식을 올렸을 때도 나오에 / 사이토 등의 중신과 함께 신사 앞으로 가는 행렬을 수행했다.

  그가 죽은 해는 텐쇼 2년(1574) 내지는 3년(1575)이라고 한다. 그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설이 있으나. 아무래도 자연사는 아니었던 듯하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모략을 믿어버린 켄신에 의해, 모반할 야심이 있다고 하여 주살당했다고 하는 게 가장 개연성이 높은 듯 하다. 켄신은 그 후 수 년 뒤에 급사하게 되는데, 그 사망 원인이 밤이면 밤마다 머리맡에 나타나 무죄를 호소하는 카게이에의 망령에게 재앙을 입어서였다는 전승도 있다.(역주 : 요즘은 카게이에가 병으로 죽었다는 설이 유력시되는 듯 하다)  

   
  이로베 카츠나가色部勝長 - 군공 비할 바 없는 무용(생년미상 ~ 1568)

  아가키타 호족들의 일원으로 에치고 이와후네 군岩船郡 히라바야시 성平林城을 영유했으나, 켄신의 아버지 나가오 타메카게長尾爲景 시대부터 신하로서 복속했다. 그 때문에, 혼죠 씨本庄氏에서 뻗어나온 지족支族임에도, 카스가 산성에서의 석차는 여러 번 켄신에게 반기를 든 혼죠 시게나가本庄繁長보다 상위에 랭크되었다.

  코지 3년(1557) 다케다 신겐이 북 시나노를 침공하여 카츠라야마 성葛山城을 공격했을 때, 카츠나가는 구원을 위해 출진해달라는 켄신의 간절한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카츠나가가 출진했는지는 불명이며, 카츠라야마 성도 얼마 안 가 함락되었다.

  에이로쿠 4년(1561)의 카와나카지마 결전 때는 선봉인 카키자키 카게이에 부대가 무너지려고 하자 가세하여, 다케다 편의 오부 효부 군대를 패주시켰다. 이 공적에 의해 켄신으로부터【 피 묻은 감사장 】을 하사받았으며, 이 감사장은 지금도 현존한다.  

  이어서 에이로쿠 7년(1564) 간토에 출진했을 때는 사노 성佐野城 공략에서 활약하여 이 성을 맡게 되었으나, 에이로쿠 11년(1568) 이번에도 반기를 든 혼죠 시게나가를 토벌하기 위해 켄신 밑에서 혼죠 성 포위군에 종군하던 중 사망했다. 아들로 아키나가顯長 / 나가자네長実가 있으며, 둘 다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켄신에게 충성을 다했다.  


  사이토 토모노부齋藤朝信 - 가로家老이자 행정가(생몰년미상)

  켄신의 노신으로 시모츠케노카미下野守를 칭하며, 에치고 카리와 군刈羽郡의 아카다 성赤田城을 영유했다. 그 인물됨은 근검하고, 부하를 아끼며, 민중에게 정을 주어, 영내를 잘 다스렸다고 한다.

  에이로쿠 3년(1560) 켄신이 향후 5년 간 조세를 면제하도록 지시했을 때 그 시행을 맡는 등, 내정에 참가하는 한편으로, 군진軍陳에서도 용맹함을 발휘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에치고의 종규(鍾馗, 역귀를 물리치는 신)" 란 별명을 얻었다. 여러 번 선봉을 명 받았고, 적의 성을 탈취하면 반드시 그 성장城將으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에이로쿠 4년(1561)의 카와나카지마 전투에서는, 다케다 신겐武田信玄과 연대하여 에치고로 쳐들어 올 움직임을 보이던 잇코잇키一向一揆 세력들에 대비하기 위해 산혼지 사다마사山本寺定長와 함께 엣츄越中로 출진, 주력부대의 카와나카지마 이동을 측면원조했다.

  켄신이 죽은 후 우에스기 가문의 가독을 둘러싼 상속전쟁이 발발하자, 켄신과 혈연관계에 있는 카게카쓰景勝의 편을 들어, 오다와라 호죠 씨 출신인 카게토라(景虎, 타케오마루竹王丸) 일파의 야망을 짓부수었다. 

  이어서, 급성장을 이룬 오다 노부나가의 중압에 항전하기 위해 숙적인 다케다 씨와의 공수동맹을 맺는 데 분주. 텐쇼 9년(1581)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를 총대장으로 한 오다 군의 맹공을 엣츄 우오즈 성魚津城에서 맞아서 싸우고, 다음 해인 텐쇼 10년(1582)에는 시나노信濃로 출진하여, 카와나카지마의 요충지인 카이즈 성海津城을 지켰다. 사망한 해는 텐쇼(1573 ~ 1591) 말년기라고 전하나 연월일은 확실하지 않다.


  코지마 야타로小島彌太郞 - 용맹과감한 근신(1522 ~ 1582)

  켄신의 아버지인 나가오 타메카게가 병으로 죽기를 전후한 시기, 에치고의 국정은 극히 불안정했으며, 나가오(훗날의 우에스기) 가문의 본거지 카스가 산성의 코 앞까지 반대세력이 쳐들어오는 형국이었다. 이 때문에 켄신은 어린 나이였음에도 갑옷을 몸에 두르고 장례식에 참가하여 죽은 아버지의 영구를 호위했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 켄신의 측근이라면, 죽은 아버지 타메카게가 배속시킨 카나즈 신베에金津新兵衛 / 토쿠라 요하치로戶倉与八郞 / 아키야마 겐조秋山源藏 / 쿠로가네 마고자에몬黑金孫左衛門 등의 가신이 있었으나, 그들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선, 모두가 막연할 뿐이다.

  코지마 야타로도, 마찬가지로 켄신의 소년시대부터의 근신近臣으로 전해지는 인물이다. 전승에 의하면 야타로는 처음에타메카게의 호위 기마무사를 맡으며 각지를 전전, 우에스기 가문 안에서도 손으로 꼽을 정도의 무훈을 세웠다. 그리고 켄신의 근신으로 임명된 이후에도, 이전보다 더욱 더 용맹과감함을 발휘, "귀신 코지마" 라고 불리며 근린 호족들의 두려움을 샀다고 한다. 


  혼죠 사네요리本庄実乃 - 켄신 정권의 중핵(생몰년미상)

  켄신은 14세 때, 린센사林泉寺를 나와 형 하루카게晴景의 에치고 평정을 돕게 되었으나, 이 떄 본거지로 삼던 에치고 코시 군古志郡의 토치오 성栃尾城 성주대리를 맡고 있던 게 바로 혼죠 사네요리이다. 이후, 사네요리는 켄신과 군사행동을 같이 했고, 이윽고 하루카게를 대신해 켄신을 옹립하려는 쿠데타 계획이 세워지자 이를 실현하기 위해 분주했다.

  켄신이 가문을 상속하여 카스가 산성에 입성한 후에는, 나오에 카게쓰나直江景綱 / 오쿠마 토모히데大熊朝秀 들과 함께 켄신 정권의 중핵을 형성. 텐분 18년(1549), 훗날 켄신에게 간토 칸레이 지위를 물려주게 되는 우에스기 노리마사가 에치고에 구원을 요청했을 때에는, 그 중개역을 맡는 노고도 했다.

  그러나 텐분 23년(1554) 무렵부터 소송문제를 둘러싸고 오쿠마 토모히데와 대립을 일으켜, 정권 내부의 분쟁에 진저리가 난 켄신이 출가를 선언하는 소동으로까지 발전했다. 결국 이 정쟁은 사네요리와 나오에 카게쓰나 라인의 승리로 끝나고, 켄신도 출가를 단념하게 되었으나, 패배한 오쿠마 토모히데는 다케다 진영으로 도망쳤다.

  사네요리가 죽은 해는 확실하지 않다. 그 아들 히데츠나秀綱는 켄신이 죽은 후 일어난 우에스기 가문의 후계자 다툼에서 오다와라 호죠 씨 출신의 우에스기 카게토라 파에 속했다가, 패배하고 아이즈會津로 도망쳤다. 이로 인해, 토치오 혼죠 씨는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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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4/12/16 20:2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12/16 21:0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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