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直江兼続と戰國武將ㆍ合戰の真実》P. 80 ~ 84에 수록된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의 주요 신하들을 망라한 간략한 인물열전들의 모음집인【 에치고 군 효장열전越軍驍將列傳 】을 번역한 글입니다. 필자는 작가인 고故 모모세 메이지百瀨明治 씨.
보통 에치고의 센고쿠 시대戰國時代란, 슈고다이守護代 나가오 타메카게長尾爲景가 주군인 (에치고) 슈고守護 우에스기 후사요시上杉房能를 공격하여 자살로 몰아넣은 에이쇼 3년(1506)부터 시작되었다, 고 여겨진다.
나가오 타메카게는 켄신의 아버지인데, 이렇게 자립을 이룬 후 에치고越後 평정을 위해 100여 회나 싸웠다. 그러나 아가키타阿賀北의 여러 호족들을 위시하여 나가오의 지배에 심복하지 않는 호족들이 많았으며, 동족인 우에다 나가오上田長尾 씨조차 타메카게와 적대하는 형편이었다.
이 때문에, 타메카게가 텐분 5년(1536)에 죽었을 때 이를 알게 된 적대세력들이 나가오 씨의 본거지 후츄府中 카스가 산春日山까지 쳐들어왔기에, 당시 7세였던 켄신도 갑옷을 몸에 걸치고 장례식에 참석해야만 했다. 즉 에치고는 센고쿠 시대에 돌입하긴 했으나 아직 후진적인 단계에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나가오 씨(우에스기上杉)와 호족들 간의 역학관계는 켄신의 시대가 된 이후로도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었다. 예를 들자면 켄신은 자신의 시정施政 전반기에 호족들을 카이에키(改易, 영지를 몰수)하거나 텐보우(轉封, 영지를 바꾸게 함)시킨 적이 거의 없이, 호족영주들이 옛날부터 보유한 본거지와 그 영지를 그대로 인정해주었다.
그리고 군역에서도 켄신은 호족들을 동원할 순 있었으나, 그 호족들의 영내에 대해서 어떤 통제력을 가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켄신의 시대에는 호족이 상시적으로 후츄 카스가에 참근參勤하는 체제도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이 말은, 켄신의 지위가 센고쿠 영주가 아닌【 호족 연합정권의 주군 】이라는 정도에 그쳤음을 이야기해준다. 그렇다면, 켄신은 당연히 호족들에 대해서 전제권력을 휘두를 순 없게 된다. 켄신은 27세가 된 코지 2년(1558) 은둔사건을 일으켰으나, 이것은 호족들이 내분만 일으키며 좀처럼 켄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데 넌더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켄신은 한편으로 조정朝廷이나 쇼군將軍이나 칸토 칸레이關東管令 같은 낡은 권위를 존숭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것도 다른 의미에선 자신이 그 권위와 일체화하여 반항적인 호족들을 통제해보려고 한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켄신의 시정이 후반기에 이르자 측근을 발탁한다든가 하는 꾸준한 노력이 점차 결실을 거두어, 켄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가신이 증가했다.
그러한 가신들 중에서 전장에서 활약한 자를 들자면, 켄신의 유소년기부터 그를 섬기며 "귀신 코지마鬼小島" 로 불리던 코지마 야타로小島彌太郞, 내지는 "에치고 제일의 맹장" 이라는 평판을 얻은 카키자키 카게이에枾崎景家들이 있다.
내정을 보좌한 자들로서는 후다이 가신 중의 제 1인자인 나오에 카게츠나直江景綱나, 사이토 토모노부齋藤朝信, 혼죠 사네요리本庄實乃 들이 대표격이다. 이색적인 충신이라면 교토에 상주하면서 조정이나 막부 요인과의 절충을 맡았던 카나마리 치카츠나神余親綱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제장들은 일반적으로 나나테구미(七手組, 7인중), 11인중 내지는 측근 21인중, 에치고 48장 등으로 총칭된다. 그러나 통칭으로 봐서 다케다 신겐 24장武田信玄二十四將이나 도쿠가와 이에야스 16장德川家康十六將에 비교하자면 상당히 알갱이가 작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그런 켄신의 군사軍師라든가 참모로 부를 만한 인물이 있었는지 여부를 보자.
켄신의 군사로 속서俗書 등에서 유명한 자는 우사미 스루가노카미 사다유키宇佐美駿河守定行이다. 그러나 안 됐지만 이 사다유키란 인물은, 그 증손자라 자칭하는 우사미 사다스케宇佐美定祐가《에치고군키越後軍記》등에서 날조해 낸, 가상의 인물이다.
따라서, 켄신에게 사사한 군사는 없었다고 보는 게 올바를 듯하다. 라이벌인 신겐은 스스로 숙고한 후 제장들에게 자문을 구해 만전을 기했으나, 켄신은 머리 속에 떠오른 작전을 그 자리에서 실천에 옮기고도 결코 (신겐에게) 뒤쳐지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켄신은, 천재의 번뜩임을 겸비한 승부에 강한 굴지의 명장이었다고 할 수 있곘다.
나오에 카게츠나直江景綱 - 켄신의 고굉지신(생년미상 ~ 1577)
켄신의 신뢰가 가장 두터웠던 고굉지신(股肱之臣, 주군에게 가장 신임받는 신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에치고 산토우 군三島郡의 요이타 성與板城을 영유하며 처음에는 요효에노죠 사네츠나与兵衛尉實綱라고 했으나, 에이로쿠 5년(1562) 무렵 켄신(카게토라景虎)에게서 한 자를 하사받아, 야마토노카미 카게쓰나大和守景綱로 이름을 고쳤다.
나이는 켄신보다 20여 살 정도 많아, 켄신의 아버지인 나가오 타메카게 시대부터의 가신으로 켄신의 형 하루카게晴景도 섬겼다. 켄신이 "친위부대" 라고 부른 후다이 가신단의 제 1인자로, 이미 하루카게 시대부터 내정 방면에서 무게를 가지고 있던 듯 하다.
그러나 하루카게는 병약했고, 센고쿠 무장으로서의 기량도 결여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가신들 사이에서 "그 동생 켄신을 옹립하자" 고 하는 쿠데타 계획이 논의되자 카게츠나는 솔선하여 이 계획에 가담, 결국 하루카게의 은거와 켄신의 가문 상속을 실현시켰다.
이후, 카게츠나는 오쿠마 토모히데大熊朝秀 / 혼죠 사네요리들과 함께 켄신 정권의 중핵을 형성하고, 영지를 보장하는 등의 내정에서부터 외교, 군사 방면 등 만반에 걸쳐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예를 들면 에이로쿠 2년(1559) 켄신이 5천 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입경했을 때에는, 외교사절로서 미리 파견된 카나마리 치카츠나를 도와 조정 / 무로마치 막부 사이에 주선을 맡은 공이 컸다고 한다. 다음 해인 에이로쿠 3년(1560), 칸파쿠關白 코노에 사키츠구近衛前嗣가 켄신을 의지하여 에치고로 찾아왔는데, 그 접대역을 맡은 것도 카게츠나였다. 현직 칸파쿠가 타지로 가 장기체재한 것은 이것이 역사상 처음이라고 한다.
에이로쿠 12년(1569) 지금까지 견원지간이던 켄신과 오다와라小田原 호죠 씨北条氏 사이에, 타케다 신겐의 동향에 대비한 군사동맹이 성립했다. 이 통칭 엣소화목(越相和睦, 에치고-사가미 동맹)에서 오다와라 호죠 씨의 사절단과 절충을 맡은 것도 카게츠나였다.
군사 면에서 보인 카게츠나의 활약도 눈부신 데가 있었다. 켄신의 거듭된 간토 출진 때는 에치고 군의 동원을 담당하거나 카스가 산성春日山城를 수비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때로는 증원부대를 이끌고 간토로 내려갔다.
그리고 에이로쿠 4년(1561)에 벌어진 카와나카지마川中島 결전에서는 처음에 보급부대를 이끌고 우에스기 군의 전투를 측면에서 원조하였고, 결국에는 신겐의 장남 다케다 요시노부武田義信의 부대를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그로부터 3년 후, 켄신의 매형이자 우에스기 가문 제일의 실력자 나가오 마사카게長尾政景가 영내 호수에서 뱃놀이 도중 익사하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그 진상은 불명확한 부분이 많으나, 일설에 따르면 켄신이 마사카게를 제거하려고 했고 그 의향을 받은 카게츠나들 중신이 협의, 뱃놀이를 가장하여 모살해 버렸다고도 한다.
카게츠나가 죽은 해는 텐쇼 5년(1577)으로 여겨진다. 그 다음 해에 켄신도 중풍에 걸려 급사했으나, 그 때 켄신을 머리맡에서 돌보며 유언을 청취한 것이 카게츠나의 미망인이었다. 이 일을 봐도, 카게츠나가 어느 정도로 켄신과 깊이 관계되어 있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오에 가문直江家은 아들 노부츠나信綱가 얼마 안 가 죽었기에, 히구치 요로쿠樋口与六가 가문을 이었다. 그 요로쿠가, 훗날 명군사로 칭송받게 되는 야마시로노카미 카네츠구山城守兼続이다.
덧글
신겐을 초반 쪼렙 보스로 만든 모 소설에서 나오는 군사는 맨 마지막에 나오는군요,하긴 켄신대엔 활약하지 않았으니.
다케다 쪽은 신겐의 이미지가 그 부하들을 띄워주는 구석이 있다면 우에스기 쪽은 부하들이 켄신의 그림자에 가려져있달까요?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