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舊)《歷史群像シリ-ズ 20 激鬪 織田軍團》P. 198 ~ 203에 수록된 글입니다. 필자는 타니구치 카츠히로谷口克廣 씨(1991년 당시 코우지야糀谷 중학교 교사).
하타가시라(旗頭, 방면군 군단장)
일본통일의 사업이 진전되면서 노부나가는, 사방의 적들과 대결하기 위해 각 방면으로 대군단을 배치했다. 그 군단장(하타가시라)에게는 그 방면에서 지역 단위로 광역지배를 위임하는 한편, 호족들을 군사적으로 통솔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생년미상 ~ 1582) 쥬베이, 휴가노카미
에이로쿠 11년(1568) 노부나가가 입경한 직후부터, 히데요시 등과 함께 한 활동이 보이므로, 노부나가와 주종관계를 맺게 된 건 입경 이전부터일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로부터도 녹을 받고 있는 막부의 신하幕臣였다. 점차 요시아키에게서 멀어져 노부나가의 중신重臣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겐키 2년(1571) 사카모토 성주坂本城主가 되어, 방화당한 히에이 산의 옛 영지를 하사받아 카타다 무리堅田衆들과 야마시로 북부北山城의 토호들을 막하에 거느렸다. 텐쇼 원년(1573)에 쇼군이 추방당한 후에도 한 동안 교토 쇼시다이京都所司代 무라이 사다카쓰村井貞勝를 도와 교토에서의 정무를 맡았다.
텐쇼 3년(1575) 6월, 탄바丹波 지방 경략을 명령받았으나, 탄바 지방만이 아니라, 오사카 / 사이가雜賀 / 하리마 등에도 출진하였다. 그러던 와중인 텐쇼 3년 7월 3일, 코레토惟任 성씨를 하사받아 휴가노카미日向守 관직에 임관. 탄바 평정은 텐쇼 7년(1579) 9월에 완료. 이듬해 8월 이 지역을 하사받고, 카메야마 성龜山城을 본거지로 삼았다. 탄고丹後의 나가오카(호소카와細川) 후지타카長岡藤孝 / 야마토大和의 츠츠이 쥰케이筒井順慶들을 요리키與力로 거느리며, 킨키 간레이近機管領라고 할 만한 지위에 있었다.
혼노사 정변本能寺の變을 일으켜 노부나가 부자父子를 살해한 끝에, 결국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戰い에서 패배하여 토민土民에게 살해당했으나, 변을 일으킨 이유는 지금도 수수께끼이다.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信盛(생년미상 ~ 1581) 데와노스케, 우에몬노죠
시바타 카츠이에와 쌍벽을 이루는 오와리尾張 시대부터의 유력부장. 에이로쿠 11년(1568)에 입경한 후, 교토와 긴키京機 지방 정치에 관여하였다. 겐키 원년(1570), 오미近江 나가하라 성永原城에 입성하여, 그 후로는 야스野洲 / 쿠리타栗太 2군의 호족들을 요리키로 삼았다.
텐쇼 4년(1576) 5월에 텐노지 성채天王寺砦에 입성하여, 오사카大坂 공략의 총수를 맡았다. 그를 따르던 요리키들은, 미카와三河 / 오와리 / 오미 / 야마토大和 / 카와치河內 / 이즈미和泉 / 키이紀伊 7개 지방에 뻗어 있어, 노부나가 가문에서 가장 유력한 군단을 형성했다. 그러나 4년이 지나도 오사카를 우려빼지 못하여, 텐쇼 8년(1580) 8월, 노부나가의 견책을 받아 고야 산高野山으로 추방당했다.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생년미상 ~ 1583) 콘로쿠, 슈리노스케
처음에는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카쓰(信勝, 노부유키信行)를 섬기며 노부나가에게 반항하여, 코지 2년(1556) 8월, 이나후 전투稻生の戰い에서 노부나가 군과 싸웠다. 후에 용서받아 노부나가를 섬겨, 그 노신老臣이 되었다. 겐키 원년(1570) 오미 쵸코지 성長光寺城에 입성하여, 가모 카타히데蒲生賢秀들을 요리키로 거느렸다. 텐쇼 3년(1575) 9월, 잇코잇키를 평정한 후 에치젠 8군을 하사받아 키타노쇼 성주北庄城主가 되었다. 이후로는 방면군 주장의 한 사람으로서 호쿠리쿠北陸 평정을 진척시켜, 텐쇼 8년(1580)에 카가加賀 지방을 평정. 그리고 노토能登 / 엣츄越中에서 우에스기 편上杉方의 세력들과 싸웠다.
혼노사 정변 때는 엣츄 마쓰쿠라松倉에서 공성전을 벌이고 있었다. 히데요시에게 복수전의 공적을 가로채이고, 오다 가문의 주도권을 빼앗기는 형국이 되었다. 히데요시의 득세에 맞서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와 손을 잡고 이에 대항했으나, 텐쇼 11년(1583) 4월, 시즈가타케 전투賤ケ岳の戰い에서 히데요시에게 패배하고 24일 키타노쇼에서 자살했다.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1525 ~ 1586) 사콘쇼겐
오미 코우가甲賀 출신이라고 하나, 오와리 시대부터 노부나가를 섬겼다. 에이로쿠 11년(1568)의 입경 이전에는 북 이세北伊勢에 배치되어, 입경 당시엔 종군하지 않은 것 같다. 북 이세 4군을 맡게 된 것은 텐쇼 2년(1574)의 나가시마長島 정벌 후일까? 이후, 대표적인 유격군으로서 여러 곳을 전전.
텐쇼 10년(1582) 2월, 노부타다군信忠軍의 선봉으로써 코신(甲信, 가이 / 시나노 두 지방)에 출진, 다케다 카쓰요리의 수급을 거두었다. 전후 코즈케上野 지방과 시나노信濃 2군을 하사받고,【 간토 8주의 방비 】를 명 받았다. 그러나 혼노사 정변을 알고서 적대해 온 호죠 씨와 칸나 강神流川에서 전투를 벌여, 패배하고 이세로 퇴각했다. 히데요시 vs 카츠이에의 대립에서는 카츠이에 쪽에 붙었으나, 공격을 받고 히데요시에게 굴복했다.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1537 ~ 1598) 토키치로, 치쿠젠노카미
처음에는 키노시타木下 성을 썼다. 에이로쿠 8년(1565) 무렵에는 영지 수여를 관장하는 행정직을 맡고 있었다. 입경 이후, 교토의 정치에 관여한 부장들 중 하나였다. 겐키 원년(1570)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戰い 이후, 아자이淺井 공략의 최전선인 요코야마 성橫山城에 입성하여 활약했다. 텐쇼 원년(1573) 9월, 아자이 씨가 멸망한 후 (아자이 씨의) 그 영지를 하사받았다.
텐쇼 5년(1577) 10월, 하리마 지방播磨國을 하사받아, 히메지 성姬路城으로 옮겨갔다. 그 후, 벳쇼別所 / 아라키荒木의 모반에 의해 하리마 서부에서 고립되는 위기도 겪었으나, 텐쇼 10년(1582) 혼노사 정변 직전에는 빗츄備中 / 미마사카美作 / 호우키伯耆 지방에 걸쳐 전선을 형성하며, 사실상 단독으로 모리 씨毛利氏와 대치했다. 혼노사 정변을 알고 동쪽으로 진격하여,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쓰히데를 쓰러트렸다. 이후 급속히 힘을 불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부상해, 노부나가가 완성하지 못한 천하통일을 이루어 냈다.
덧글
센고쿠 시대는 한 번 체계적으로 읽어나가 보고 싶긴 한데, 한국에서는 쓸만한 책이 없어보여서 눈물날 뿐입니다...ㅠㅠ
뭐 자기 아들한테도 또 지면 호적에서 파버린다고 편지보내던 양반이니까 당연한 건가...
하지만 노부나가 어린시절부터 함께하며 산전수전 겪은 숙장 + 최유력 군단장을 하루아침에 무일푼으로 내쫓은건 좀 심하다 싶긴 하지요. 같은 시기 추방된 오다 가신들 중 노부모리만은 추방의 이유가 질책장에서 상세히 나오기에 노부나가가 어떤 생각으로 쳐냈는지 짐작은 약간 갑니다만, 그래도 너무 인정사정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은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