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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다케다 신겐의 시나노 평정작전 (完)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8호(2001년 8월호) 50~65쪽의 기사인, 카와이 히데오河合秀郞 씨가 집필한《풍림화산, 신슈 제압 - 다케다 신겐, 젊은 날의 고투苦鬪와 차질》를 번역한 것으로. 1541년 아버지를 내쫓고 가이甲斐 지방의 영주가 된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당시의 이름은 다케다 하루노부武田晴信)이 이웃 지방인 시나노信濃 땅을 침공하여 그 대부분을 지배하에 두기까지(즉 나가오 카게토라=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과 대립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벌인 십 수년간의 경과를 다루고 있습니다.


  카와나카지마川中島로 가는 길

  토이시 성戶石城을 탈취한 직후인 6월 1일과 7월 2일, 하루노부는 2번에 걸쳐 와카미코若神子까지 출진하여, 사쿠 방면의 내통공작을 행했다. 그리고 7월 20일, 이와오 성岩尾城의 오오이 탄죠大井彈正가 항복하자 30일에는 하루노부 자신이 출진하여, 사쿠라이 산성櫻井山城까지 진격하여 요시키요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나 무라카미군은 이와오 성을 탈환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고, 하루노부는 이와오 / 이와무라다 성의 수축과 우치야마 성의 수비병력 증강을 지원한 후에, 9월 23일 후츄로 귀환했다.

  10월이 되자 드디어 움직인 요시키요의 창끝은, 아즈미 군安曇郡으로 향해 있었다. 무라카미군이 뉴노미 성丹生子城을 함락시켰다는 보고를 14일날 받은 하루노부는, 무라카미군은 사쿠 방면으로부터 손을 뗐다고 생각하고 그 다음 날 즉각 출진하여, 20일에는 후카시 성深志城에 들어가 군세를 집결시켰다. 드디어 본격적인 공세를 재개하게 된 것이다.

  24일, 하루노부는 토이시 쿠즈레戶石崩れ 직후에 나가토키가 농성했던 히라세 성平瀨城을 함락시키고, 성 병사 204명의 목을 베었다. 이미 나가토키는 카쓰라오 성葛尾城으로 철수한 뒤였으나, 히라세 성은 오가사와라 총령가 잔당들의 최전선 거점으로, 이 곳을 깨뜨렸다는 건 오가사와라 세력이 마쓰모토 평원松本平 탈환을 위한 발판을 잃었다는 걸 의미했다. 후카시 성을 중심으로 정비된 마쓰모토 평원은, 이로써 전선의 방어거점으로서의 역할을 마치고, 북방으로의 침공거점으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아즈미 군과의 경계지역에서 적을 일소한 다케다군은, 27일 신속히 코이와타케 성小岩岳城까지 침공하여, 그 주변을 불태웠다. 그러나 하루노부는 성 그 자체는 공격하지 않고, 무라카미 / 오가사와라 측의 반격을 견제하기 위해 부근만을 제압했을 분, 얼마 안 가 히라세 성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히라세 성을 파괴하고 새로 다시 지으라고 명령하고, 하라 미노노카미(原美濃守, 토라타네虎胤)를 성주 대리로 임명한 후, 11월 21일날 후츄로 귀환했다.

  하루노부가 코이와타케 성을 공략하기 위해 군세를 움직인 건, 다음 해인 텐분 21년(1552) 7월 27일의 일이었다. 코이와타케 성은 8월 12일에 함락되어, 성주 이하 500여 명이 성을 배게삼아 전사했다. 코이와타케 함락에 의해, 잔존한 오가사와라 쪽 거점은, 무라카미 영지에 가까운 치쿠마 군 동부의 카리야하라 성刈谷原城과 토우노하라 성塔の原城 2개만이 남았다. 그러나 거듭된 실패에 깨달은 바가 있던 하루노부는, 졸속을 자중하여 만전을 기해, 공격을 내년으로 연기하였다.

  텐분 22년(1553) 3월 23일에 후츄를 출발한 하루노부는, 29일 오시(午刻, 오전 11시 ~ 오후 1시)에 카리야하라 성을 포위하고, 다음 날 주변을 방화한 후, 공격을 개시했다. 카리야하라 성은 2일 후인 4월 2일 오시午刻까지 버텼으나, 결국 함락되었고 성주인 오타 나가토노카미太田長門守는 생포되었다. 유시(酉時, 오후 5시 ~ 7시)에는 토우노하라 성도 자락自落하여, 치쿠마筑摩 / 아즈미 2군 대부분은 다케다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카리야하라를 공략하여 우에다 방면으로의 진격로를 확보한 다케다군은, 다음날인 (4월) 3일 아이다會田까지 북상하여, 그 동쪽에 있는 코쿠조 성虛空藏城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6일 하루노부는 무장 12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사키슈(先衆, 선봉부대)를 카쓰라오 성을 향해 먼저 보냈다. 그러나 하루노부가 주력을 이끌고 뒤를 따를 필요도 없이, 카쓰라오 성은 9일에 자락自落, 요시키요는 카와나카지마川中島로 도망쳤다. 무라카미 군은 5일의 시점에서 야시로屋代 / 시오자키鹽崎들이 이미 다케다 편으로 배반하여, 호족 연합(國人一揆, 코쿠진 잇키)적 지배구조의 약점을 드러내는 형태로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카쓰라오 성이 자락하면서 급속히 가속화되었다. 다케다군 사키슈의 진격과 함께, 무라카미 편이었던 이시카와石川 / 코사카高坂 / 무로가室賀 등은 줄을 지어 항복, 15일에는 아오야기靑柳까지 진출해 있던 하루노부의 진채에 출사出仕했다. 요시키요의 지배하에 있던 사라시나更科 / 하니시나埴科 2군은 사분오열 상태에 빠져, 그 절반 이상이 하루노부의 밑에 굴러들어왔다.

  그러나 선봉부대의 쾌진격은, 22일에 되어 급작스레 종언을 고했다. 이나리 산稻荷山의 남쪽 하치만까지 진격한 사키슈 8부대는 요시키요가 이끄는 시나노 북부의 호족 연합군과 조우하게 된다. 이 군세의 태반은 원군으로 파견된 미노치水內 / 타카이高井 2군의 장병들로, 상당히 늦긴 했으나 탈출해온 요시키요와 합류하여 5천 명 가까운 병력에 달해 있었다. 시나노 북부의 연합군은 다케다군의 선봉부대를 격퇴하고, 다음 날인 23일에는 사카키까지 진격하여, 성장城將 오소 겐파치로 등의 목을 베고 카쓰라오 성을 탈환했다. 아오야기에서 패잔병을 수용한 하루노부는, 마무리를 잘못 지었다는 것을 깨닫고 신중해져서는 24일에 카리야하라로 철수, 대 무라카미 전의 끝은 다음 출진으로 넘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하루노부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요시키요들은 타카나시 마사요리高梨政賴와 친척 관계에 있는 에치고越後의 나가오 카게토라長尾景虎를 의지하여, 그의 가세를 배경삼아 저항할 의지를 굳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루노부가 7월 25일에 다시 출진하여, 8월 1일 ~ 5일 사이에 와다和田 / 타카토리야高鳥屋 / 시오다鹽田 등을 계속해서 공략하자, 드디어 나가오군長尾勢이 움직여, 양군은 9월 1일 하치만八幡 부근에서 조우하게 된다.

  이후, 하루노부는 남하를 반복하는 카게토라의 원군을 착실히 밀어내면서, 카와나카지마를 중심으로 몇 번이나 대진과 전투를 반복하게 되었는데, 양자의 공방이 갈수록 교착되면서 8할 정도까지 완수되었던 시나노 평정은, 결국 미완인 채로 방기放棄되었다. 노부토라 이전부터 시도되어 온 다케다 가문의 시나노 평정에 대한 야망은, 훗날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으로 불리는 나가오 카게토라의 출현에 의해, 완전히 앞이 보이지 않는 진흙탕 싸움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명백히 하루노부의 초기 전략에 있었고, 그 전략을 일그러뜨린 커다란 요인은, 효죠슈評定衆에 의한 합의체제에 있었다.

  하루노부는 노부토라 시대 당시 수 년만에 제압했던 사쿠 / 치이사카타를 탈환하는 데 십수 년의 세월을 소비했으나, 그와 병행하여 진전되었던 이나伊那 / 치쿠마筑摩 / 아즈미安曇로의 침공을 뒤로 돌렸다면, 양 군의 탈환은 보다 단시간에 달성되고, 전체적인 침공 페이스가 가속화되었을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하루노부 개인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 효죠슈를 포함한 합의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노부토라가 두려워하고, 해체시키려고 했던 그 합의제를 부활시켜, 보다 강대한 권한을 줄 수밖에 없었던 시점에서 하루노부의 반생은 정해져 있던 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하루노부는 수 차에 걸친 수정修正을 시도하며, 그 수정에 의해 적어도 텐분 20년(1551) 이후에는 침공속도의 대폭적인 향상을 이룰 수 있었다. 이후 하루노부는 오로지 침공속도의 향상을 위해 노력했는데, 그 노력은 착실하게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생에서 허비한 시간을 돌려 받지는 못하였다.

  결국, 신겐信玄이라고 불리게 된 이후의 하루노부는, 가신단의 통제를 강화하고 / 장남을 제거해 버리는 형태로 노부토라信虎 정권 말기를 방불케 하는 모습을 보이며 생애를 끝내야 했다. 노부토라 정권의 안티테제로서 시작한 하루노부 정권은, 최종적으로 노부토라 정권 말기와 흡사한 모습으로 변모함으로써, 본질적인 정략과 일치하지 않는, 그릇된 전략에 입각해 있었다는 걸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노부토라가 직면한 가신단의 이반이라는 결말은, 그 이전에 죽은 신겐이 아니라 후계자 카쓰요리勝賴를 멸망시키게 되었다.

  "신겐은 벽지에 태어났기 때문에 노부나가에게 뒤쳐져, 천하를 잡지 못했다"고들 한다. 그러나 신겐은, 벽지에 태어났다는 점을 메우고도 남을 정도로 노부나가보다 일찍 태어났다.(역주 : 신겐 1521년 탄생 / 노부나가 1534년 탄생) 문제는 교토로의 거리 같은 것이 아니다. 아버지 노부토라가 만든 기반을 이용하지 못한 형태로 가문을 이어, 애석하게도 시간을 헛되이 보내게 만든 가신단이야말로, 신겐을 천하로부터 멀어지게 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가 없었다면, 신겐의 가문 계승은 불가능했다.

  신겐이 몽상하던 입경上洛은, 가문을 계승한 순간에 이미, 꿈으로 끝나리라고 운명지어져 버린 것이다.
   

덧글

  • Cpt Neo 2014/11/26 19:17 # 답글

    저 글 쓴분도 그 당시 사료가 모자라서 저렇게 적었지만 실질적으로 카츠요리가 그닥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정세상 이미 밀려있었기에 멸문은 이미 기정사실이었죠.

    다만 가신단과의 불화는 공개되어있는 사료만으로 판단하기에 그런것이지 실제로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7:3 정도로 초반에 잦은 말싸움이 있었다는 사료가 많은건 사실이기도 하지만요.

    여담인데 공개되지 않는 사료가 생각보다 많이 있습니다.
    스와 신사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지인이 스와 신사에 있는 사람이 있어서 열람할 기회가 있긴 했습니다만...
  • 3인칭관찰자 2014/11/27 00:05 #

    사실 요시아키의 책동 아래 다케다, 아자이, 아사쿠라, 혼간사, 미요시, 마쓰나가, 등이 가담하여 노부나가를 사방에서 포위한 1차 노부나가 포위망이 깨진 이후로는 노부나가를 쓰러뜨릴 만한 힘이나 기회를 가진 세력은 없었다고 봅니다.

    카쓰요리가 대를 이었을 때는 신겐의 말년처럼 사방에서 노부나가 발목 잡아주는 세력이 많이 줄어들었고 노부나가가 우월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적극적으로 대군을 동원해서 적성세력을 각개격파해 나갔기에 카쓰요리가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선다면 언젠가는 깨질 운명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합니다.

    나가시노 전투 이후에는 의외로 오다 가문과의 화해를 계속 시도했다고 하더군요. 간토의 사타케 씨에게 노부나가와의 관계개선을 의뢰하기도 하고, 이와무라 성 함락시킬 때 포로로 잡은 노부나가의 5남 고보마루도 돌려줬죠. 화친 자체는 노부나가에게 무시당하긴 했지만(...)

    총신들을 우대하고 신겐 이래의 노신들과 불화했다... 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긴 하죠. 저도 (심정적인 생각으로는)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다고 하시는 Cpt Neo님께 동의합니다만, 단지《코요군칸》에 나오는 가신단 불화설을 뒤집을 만한 사료가 어떤 게 있는지를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가르침을 청합니다)

    말씀대로 스와 신사에 공개되지 않은 사료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일반에 공개되었으면 좋겠네요. 지금까지 사실처럼 믿겨져 온 이미지나 통설을 한 번에 뒤집을 수 있는 게 새 사료의 위력이기에 ^^
  • Cpt Neo 2014/11/27 00:23 #

    스와 신사는 아시다시피 타케다 가문과 연고가 있는 신사이기에 관련 문헌이 남아있습니다.
    다만 그집 자제분이 실제로 연구자로 연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일종의 핸디캡이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 사유로 겸사겸사 일반인과 학계에 완전히 공개는 안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비단 스와 신사 뿐 아니라 개인 소유의 문헌의 경우, 진위 여부라던가 말그대로 사유 재산이므로 공개하기를 꺼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어쩌다가 집안에 최장 어르신이 죽고나서 재산 정리를 하다가 문헌을 어떻게 중고상에 넘겼다가 공개가 된다던가 같은 웃기지도 않은 일이 몇 년에 한번은 보이기도 하는 것이 일본이구요.

    오사카 성 내부에 박물관 사무소가 있는 층에 연구소도 함께 있습니다만, 요새는 퇴임하신걸로 알지만 저 책이 나올 즘...에 계시던 키타가와 선생님의 이야기로는 타케다의 멸문은 영지의 지형과도 관련이 깊다고 생각 하시더군요. (저도 그렇게 일부는 생각합니다.)

    지금과 달리 산악 지형이 많아 스스로 방어진을 꾸밀때 기마병의 배치가 필수적이었던 타케다의 경우 조총병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게다가 최대의 난적은 당시엔 비슷한 지형의 우에스기였고...
    (물론 조총병이 많다고 무조건 우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비중이 낮은데엔 저런 이유도 있었고 지형의 위치상 조총의 수급이 원활하지 못한 것도 있었구요.
    또한 수급에 집착하지 않았던 탓도 있다고 봅니다.
    일종의 매너리즘의 문제로 중요시하지 않은 것이지요.

    다만 결과적으로는 그 차이로 나가시노 전투에서 패착이 깊어졌고, 퇴각 이후에 추가적인 추격, 전격전을 벌이지 않았던 전국시대의 양상과 다르게 오다군만이 전멸전을 유일하게 행하는 국가였기에 결과적으로는 멸문은 산하로 굴복하지 않는한 피하긴 어려웠습니다.
    그런 부분을 인지한 화친파 가신단이 몇차례 화친을 시도한 것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노부나가의 입장에선 산하로 들어오는 것도 고려대상일 상황에서 굳이 화친을 할 이유도 말씀대로 이미 충분히 커져버려서 세력도가 기운 상황에선 이유가 없었죠.

    결과적으로는 신문물에 대한 유용성을 얼마나 빨리 캐치하느냐의 차이가 그 결과의 차이를 낳은건 아니냐라는 생각은 해봅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차이는 타케다는 명문가라는 매너리즘도 한몫 하긴 했다고 보이구요.
    (전국시대의 에헴하는 명문가 치고는 선방하긴 했습니다만...)

    가신단의 불화는 사실 당시 전국 시대에서 가독 상속 중에 분란이 없는 가문이 더 드물지 않나 싶긴 합니다만 워낙 후반에 일어난 부분이라 유독 크게 비친 경향은 있다고 생각 합니다.

    지금 종종 언급되는 노부나가 역시도 동생 노부유키와 가독 다툼이 있었고, 노부유키 아래에 있던 가신단은 한동안 다루는데 애먹었었죠.
    (그런 의미에선 도쿠가와 - 당시 마츠다이라 - 의 경우엔 그 지역 특색의 차이일지는 모르나 상당히 특이한 경우라고 연구가들은 말합니다.)

    뭐 결과적으로 중간에 이런저런 내용이 좀 바뀌긴 합니다만 결과적으로 멸문은 역사적으로도 변하지 않으니 뭔가 확 뒤집히진 않을거라 서서히 나오지 않을려나 싶습니다. ^^;

    확실히 문헌들이 나오면서 전투의 배경이 된 장소등이 뒤집히는 경우도 왕왕 있긴 합니다만... ^^;
  • 3인칭관찰자 2014/11/27 10:42 #

    스와 신사에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그러고 보니 위서인지를 둘러싸고 시끄러운《부코야와》나 야마모토 칸스케가 실존인물이었다는 걸 증명한《이치카와 문서》같은 것도 가문 안에서 소장하고 있던 물건 / 내지는 잊혀져 있던 물건이 발굴되어서 세상 빛을 본 경우였지요.

    말씀대로 조총 산지(오와리 츠시마나 무역도시 사카이, 조총산지 쿠니토모 등)를 장악하고 있던 노부나가에 비해 산악지형이 많았던 다케다 쪽은 조총 뿐만 아니라 화약을 구하기 힘들었던데다 밀집시켜서 집중활용하지 않으면 큰 효과를 보기 힘들었기에 즉각적으로 활용하기엔 메리트가 떨어졌던 것도 조총이 비교적 덜 쓰인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명문가였기 때문에 프라이드가 컸다는 점도 이유가 될 수 있었을 것이고...

    다케다 가문이 머리를 굽혀 신하로 들어오지 않는 이상 노부나가로선 받아주기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단순한 관계개선으로 멸문을 피하기엔 다케다의 세력은 너무 컸고 지금까지 쌓인 앙금도 컸을 테니.. 그렇다고 카쓰요리로서는 노부나가에게 복속하는 선택은 하기 힘들었을 테고.(만약 복속한다고 해도 가이 / 시나노 / 스루가 / 코즈케 등에 뻗친 그 세력을 그대로 유지하는 한 노부나가가 받아주었을진...)

    가신단과의 불화 문제는... 아무래도 1582년 당시 2개월도 되지 않아 배반 등으로 어이없이 다케다 가문이 무너지면서 카쓰요리가 멸망한 것 때문에 가신단의 불충과 분열이 유독 강조되는 면도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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