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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다케다 신겐의 시나노 평정작전 (5)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8호(2001년 8월호) 50~65쪽의 기사인, 카와이 히데오河合秀郞 씨가 집필한《풍림화산, 신슈 제압 - 다케다 신겐, 젊은 날의 고투苦鬪와 차질》를 번역한 것으로. 1541년 아버지를 내쫓고 가이甲斐 지방의 영주가 된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당시의 이름은 다케다 하루노부武田晴信)이 이웃 지방인 시나노信濃 땅을 침공하여 그 대부분을 지배하에 두기까지(즉 나가오 카게토라=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과 대립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벌인 십 수년간의 경과를 다루고 있습니다.


  토이시 쿠즈레戶石崩れ

  기세를 회복한 다케다군은, 다음 해인 텐분 18년(1549)이 되자 다시 치이사카타小縣로 침공했다. 7월에 스와諏訪 / 이나伊那 방면의 감시와 축성공사 순찰을 겸하여 출진한 하루노부는, 모여든 군대를 이끌고 북상, 치이사카타와 사쿠의 경계 부근인 오오이 코다이大井高台의 본거지 이와무라다岩村田 북쪽의 사기바야시鷺林에 포진한 후, 9월 4일에는 코모로小諸에서 동남쪽으로 1리(약 4km) 떨어진 평원에 병사들을 보내 방화하게 했다. 그러나 이 작전은, 무라카미군을 도발하거나 치이사카타 군 남부를 탈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게 아닌, 정략적인 것이었다. 신겐의 진정한 목표는, 다케다군이 우에다하라의 상처에서 회복했음을 과시하고, 이로써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淸와 화해를 맺으려는 데 있었다.  

  약체화된 오가사와라 총령가小笠原總領家에게 최후의 일격을 먹이기 전에, 무라카미 군의 움직임을 화해를 맺음으로서 견제할 수 있다면, 하루노부는 치쿠마 군筑摩郡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다. 지금까지 분산되어 온 공세축을 일원화시키고, 무라카미 / 오가사와라와의 2 정면작전을 회피하겠다는 발상은, 결코 잘못된 게 아니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9일에 사카키坂木로 보낸 최초의 사자가 행한 교섭이 무산되고 14일에 사카키로 들어간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의 사자도 효과를 보지 못했기에, 중대란 결함을 드러내게 되었다. 하루노부가 오가사와라 총령가와 무라카미 가문을 저울질하고 있다는 걸 간파한 요시키요로서는, 이제 와서 화해할 기분은 들지 않았던 것이다.

  후츄府中로 돌아간 하루노부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오가사와라와 무라카미 중 한 쪽을 군사적으로 구속하고, 그 동안 다른 한 편을 공격하겠다는, 지금까지와 큰 차이 없는 전략에 불과했다. 그래도 하루노부로서는 최소한의 병력을 무라이 성村井城을 중심으로 배치하여 오가사와라군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주력을 투입하여 무라카미군을 격파, 치이사카타 / 사라시나更科 / 하니시나埴科 / 타카이高井 / 미노치水內 5군을 공략한다는 선택도 가능했다. 하루노부 본인과 다케다군 전체에 요시키요에 대한 패배의식만 없었다면, 이 쪽이 최량의 선택지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시, 그 패배의식이 문제였다. 하루노부는 시오지리 고개에서의 대승으로 정신적 우위에 서게 된 오가사와라 공격을 선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텐분 19년(1550)의 다케다 가문은, 정월 이래, 이마가와 가문과 빈번히 사신을 교환하며, 하루노부의 장남 타로 요시노부太郞義信에게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딸을 시집보내기로 약속하는 등, 이마가와 가문과의 관계를 더욱 더 강고하게 했다.

  만전의 준비를 마친 하루노부는, 7월 3일에 후츄를 출진, 오가사와라 나가토키의 본거지, 하야시 성林城 공략에 나섰다. 10월에 무라이 성에 결집한 다케다군은 군나이 부대郡內衆와 카와치 부대河內衆를 제외한 고슈군에 스와 부대 / 이나 부대가 가세한 1만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나가토키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으로는 야전을 벌이는 건,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야전으로 항거할 수 없기에, 나가토키는 대성大城과 소성小城으로 구성된 하야시 성의 수비를 굳히고, 제장들에게 농성을 촉구함으로써 이 대군을 저지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나가토키의 노림수는, 다케다군이 15일 유시(酉刻, 오후 5시 ~ 오후 7시)에 하야시 성 북방에 위치한 이누카이 성犬甘城을 공략함으로서 일거에 날아가버렸다.

  그 날 자시(子刻, 오후 23시 ~ 오전 1시)에 후카시 성深志城 / 오카다 성岡田城 / 키리하라 성桐原城 / 야마가 성山家城 등이 계속해서 자락(自落, 내부에서 스스로 함락됨)하였기에 치쿠마 군 중핵부의 방위체제는 완전히 박살나, 나가토키는 친족과 근신近臣들과 함께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치쿠마 군의 북서쪽에 위치한 아즈미 군安曇郡도, 시오지리 전투 이래 나가토키와 대립해 온 니시나 일족仁科一族이 신속히 다케다 군에 복속하면서, 오가사와라 총령가의 지배체제는 급속히 붕괴하고 있었다. 시나노 슈고信濃守護 오가사와라 가문은 한 방의 일격으로 영지의 태반을 상실하고, 사실상 멸망해버린 것이다.

  하루노부는 (7월) 19일에 후카시로 진을 옮기고, 꼬박 1개월을 점령지 행정에 소비했는데, 이 더없는 성공 후에 이번에도 실수를 범했다. 對 나가토키 전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단기간에 종식되어버린 결과, 욕심내어 동원한 병사들을 치이사카타 쪽으로 전용轉用해 그대로 對 무라카미 전으로 이행하려고 한 것이다. 요시키요를 의지해 카쓰라오 성葛尾城으로 도망친 나가토키 일행을 추격한다는 의미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출진한지 이미 1개월 이상 경과하여 피로해 있던 장병들에게 또 다른 작전행동을 계속할 것을 강제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8월 19일 진시(辰刻, 오전 7시 ~ 9시)에 후카시를 출발한 다케다군은, 해시(亥刻, 오후 9시 ~11시)에 치이사카타 군 나가쿠보 성長窪城에 입성했다. 급격히 진격하다 대패한 우에다하라上田原의 쓰디쓴 교훈에서, 하루노부는 24일날 이마이 토자에몬今井藤佐衛門과 야스다 시키부쇼우安田式部小輔를, 25일에는 삼촌인 오오이 코즈케노스케 노부츠네大井上野守信常와 아시가루 대장 요코타 빗츄노카미 타카토시橫田備中守高松, 하라 미노노카미 토라타네原美濃守虎胤를 보내 토이시 성을 정찰하게 하고, 27일에는 운노 구치海野口와 마주보는 평야까지 진채를 전진시켰다. 그러나 이 때 이미, 장병들의 염전기운은 다양한 흉조의 목격담이 되어 군대 전체에 만연해 있었다.  

  전의의 저하를 우려한 하루노부는, 28일날 토이시 성 코앞까지 본진을 옮겨, 다음 날인 29일 오시(午刻, 오전 11시 ~ 오후 1시)에 전의상승을 겸하여 성내로 활을 쏘게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흉조는 줄을 잇고 있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하루노부는 9월 3일, 전군을 성 코앞까지 진격시켜, 9일 유시(오후 5시 ~ 7시)에 총공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 석양의 공격은 안개에 시야를 빼앗겨 느적느적 진척되지 않았고, 전의가 높지 않았기에 한 번 격퇴당해 버린 부대를 다시 공격재개시키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하루노부는 공격을 중지할 수 밖에 없었고, 다케다군은 공격실패로 인해 다시 한번 전의가 깎여나가, 토이시 성을 포위한 채로 움직이려고 해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 동안, 신겐은 키요노 일족淸野一族과 스다 신자에몬須田新左衛門을 배반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가장 중요한 토이시 성 공격은 완전히 정체상태였다.

  그러는 동안, 23일이 되어 키요노 일족으로부터 흉보가 들어왔다. 타카나시 마사요리高梨政賴와의 항쟁으로 인해 토이시 성을 구원하는 게 불가능해 보이던 요시키요가, 하필이면 (이 시점에서) 마사요리와 화해하고, 그 병력의 일부는 이미 테라오 성寺尾城까지 회군했다는 것이었다. 하루노부는 테라오 성을 구원하기 위해 사나다 탄죠노츄(真田彈正忠, 유키쓰나幸綱=유키타카幸隆)를 파견했으나, 테라오 성을 공격한 사카키 부대坂木衆 / 아메노미야雨宮 부대는 다케다군의 접근을 알고 28일날 철수, 사나다 부대는 다음 날 귀진했다.

  그러나 이 이상 포위가 계속되면, 총력을 다해 구원하러 올 요시키요와 그대로 격돌해야 할 것이다.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던 하루노부는, 30일날 다시 합의를 열어, 회의 끝에 드디어 결의를 굳히고 요코타 빗츄노카미를 비롯한 수천 명의 병력을 후미부대殿로 삼아, 다음날 철수하게 되었다.     

  10월 1일 묘시(오전 5 ~ 7시)에 시작된 다케다 군의 철수는, 당초에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다. 새벽에 행동을 개시한 각 부대들은 무사히 성 근처에서 이탈하였고, 후미부대들은 토이시 성 쪽으로부터의 추격을 격퇴하고 철수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잡한 지형을 이용한 추격대에 의해 여러 번 퇴로를 차단당하여, 유시(오후 5시 ~ 7시)가 되어 간신히 후미부대가 이격離隔했을 때에는 이미 요코타 빗츄노카미를 비롯하여 1천여 명이 전사한 뒤였다. 우에다하라 전투에 이은 커다란 손실이었다.

  하루노부의 경솔한 치이사카타 침공은, 이【 토이시 쿠즈레戶石崩れ 】에 의해 다시 한 번 일패도지하여, 기껏 안정시켜 놓았던 지배권을 위협받는 결과로 끝났다. 다케다군 주력은 다이몬 고개大門峠를 넘어 스와까지 철수했고, 7일에는 후츄에 도착했으나, 그 동안 남하한 무라카미군은, 9일부터 11일 사이에 치이사카타 일대에 맹위를 떨쳐, 사쿠 북쪽 끝에 위치한 이와무라다 성을 불태웠다.

  21일에는 오가사와라 나가토키가 치쿠마 군 히라세 성平瀨城에 농성하여 다케다 군의 거점이 된 후카시 성을 엿보고, 11월 8일에는 요시키요가 코모로 주변까지 출병하는 등, 다시 사쿠 군과 치쿠마 군에서의 2 정면에서 대응에 쫓기게 되는 상황을 낳은 것이다. 나가토키에게는 자기 힘으로 교전할 만한 병력이 없었기에 어느 정도 정돈된 숫자의 다케다군이 대응한다면 싸우지 않고 후퇴하거나 / 농성하여 저항하는 게 고작이었으나, 2 정면작전으로 불릴 정도로 나쁜 상황은 아니더라도 성가신 존재임은 확실했다.  

  다음 해인 텐분 21년(1551)이 되자, 하루노부는 이러한 전황 악화에 대비하여 사쿠 군 북부의 방비를 강화했으나, 다케다 가문의 귀문鬼門이 되어가고 있었던 토이시 성은 5월 26일, 맥이 빠질 정도로 쉽게 함락되었다. 사나다 탄죠노츄가 모략으로 이 성을 탈취한 것이다. 그러나 수단은 어찌됐든, 최전선의 중요거점을 잃은 요시키요가 저항선을 사라시나 군까지 후퇴시키게 되었고, 다케다군의 부담이 일거에 경감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공세축을 좁혀서 우선 오가사와라 총령가를 재기불능이 될 때까지 때려눕히고, 그 후 무라카미 쪽의 세력을 치이사카타로부터 구축하겠다는 전략은, 여기에 와서야 드디어 열매를 거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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