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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다케다 신겐의 시나노 평정작전 (4)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8호(2001년 8월호) 50~65쪽의 기사인, 카와이 히데오河合秀郞 씨가 집필한《풍림화산, 신슈 제압 - 다케다 신겐, 젊은 날의 고투苦鬪와 차질》를 번역한 것으로. 1541년 아버지를 내쫓고 가이甲斐 지방의 영주가 된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당시의 이름은 다케다 하루노부武田晴信)이 이웃 지방인 시나노信濃 땅을 침공하여 그 대부분을 지배하에 두기까지(즉 나가오 카게토라=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과 대립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벌인 십 수년간의 경과를 다루고 있습니다.


【 너무 늦은 전략전환 】- 패배가 계기가 되어 해소된 합의체제

  패배와 승리

  텐분 17년(1548) 2월 1일, 사쿠 군佐久郡을 평정한 영향으로 치이사카타小縣 남부까지 세력권을 넓힌 하루노부는, 다케다군 주력을 이끌고 스와諏訪로 향했다.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淸의 지배하에 있던 치이사카타 북부로 침공하여 그 최전선 거점인 토이시 성戶石城을 공략하기 위해서였다.

  우에하라 성上原城에서 이타가키 스루가노카미(板垣駿河守, 노부카타信方)가 인솔하는 스와 부대와 합류하여, 눈이 쌓인 다이몬 고개大門峠를 넘어 치이사카타로 들어간 다케다군은, 치쿠마 강筑摩 북쪽 강변의 우에다上田를 목표로 하여 북상했다. 다음 날 2월 2일에는 오야마다 데와노카미(小山田出羽守, 노부아리信有)의 군나이 부대郡內衆가 도착하여 도합 8천 명 정도까지 불어난 다케다군은, 토이시 성하를 위협하면서 서진하여 카쓰라오 성葛尾城에서 올 무라카미군의 원군을 차단할 수 있는 위치, 즉 우에다에 포진했다.

  그러나 이 때 하루노부와 효죠슈(評定衆, 역주 : 합의에 의해 중요한 일을 결정짓는 조직)는 이 작전의 목적을 둘러싸고 대립 중이었다. 우에다 주변의 무라카미군 거점은 치쿠마 강 북쪽 강변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토이시 성은 요해가 견고하고 북동쪽의 사나다고真田鄕 / 남서쪽의 우에다고上田鄕를 직접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는 요충지였다. 이 때문에 하루노부는, 사나다 일족을 아군으로 끌어들여 아군 주력으로 무라카미군의 구원군을 견제하고, 그 사이에 주변의 거점을 토벌하여 토이시 성을 단계적으로 고립시킨다는, 견실한 수순에 집착했다.

  한편, 이타가키 스루가노카미와 아마리 비젠노카미(甘利備前守, 토라야스虎泰)들은 무라카미군의 구원군을 유인격멸하여 구원의 희망을 끊음으로서 성 병사들의 전의를 꺾은 후 일거에 공략하자는, 시가 성에서 성공한 수순에 집착하였다.

  이러는 동안에, 무라카미군은 우에다하라上田原 서쪽 끝의 산기슭인 이와바나岩鼻까지 남하해 왔다. 이로 인해 양군은《묘호지키妙法寺記》에 따르면【 서로 마주보며 강을 방패로 삼다 】, 치쿠마 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는 다케다군 / 남쪽에는 무라카미군이 위치하여 대진하였던 것이다.

  치쿠마 강을 사이에 두고 대진하던 양군은, 2월 14일 전단戰端을 열였다. 이타가키 스루가노카미 / 아마리 비젠노카미 / 사이마 카와치노카미才間河內守 / 하지카노 덴에몬初鹿野傳右衛門 등이 선봉이 된 다케다군은, 강 속에서 격전을 벌여 무라카미군 선봉을 밀어붙이고 무너뜨려, 그 기세를 타고 패주하는 적을 남쪽 강가를 따라 추격하여, 우에다하라 깊숙히 들어갔다.

  그러나 하루노부의 호위 기마무사와 군나이 부대가 이를 따라 치쿠마 강을 건너려고 했을 때, 무라카미군은 돌연히 태세를 재정비했다. 요시키요는 다케다군의 절반을 끌어들여, 앞뒤 부대가 치쿠마 강을 사이에 두고 분단되었을 때 역습하기 위해, 미리 부대를 둘로 나누어놓았던 것이다.

  함정에 빠진 선봉부대의 제장들은, 떼지어 달려드는 무라카미군에 의해 분단당하고, 차례차례로 전사했다. 한 때는 늦게 도하한 하루노부의 호위 기마무사들까지 공격을 받아 하루노부 자신이 부상을 입었을 정도의 난전이 벌어졌으나, 군나이 부대의 분전에 힘입어 간신히 맹공을 격퇴했을 무렵 해가 지고, 무라카미군이 철수하면서 사투의 막은 내려졌다. 다케다군은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렸으나, 간신히 전장에서 버텨내긴 한 것이다.

  그러나 엄청난 손해에도 불구하고 하루노부는 철퇴하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 대진을 계속했다. 두 날개라고 해야 할 이타가키 스루가노카미와 아마리 비젠노카미를 위시하여 수많은 무장들을 한 번에 잃어버림으로써, 다케다군의 지휘계통은 그 일부가 완전히 소멸되고, 하루노부의 본진은 일시적으로 지휘능력을 상실하였었다. 하루노부은 일단 지휘계통을 일원화하고, 잠정적으로 통제를 확립한 후가 아니라면 철퇴할 수도 없었다. 전황을 우려한 코마이 코하쿠사이駒井高白齋들은 하루노부의 어머니 고후쿠 님(御北樣, 오오이노카타)에게 하루노부를 설득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다케다군이 간신히 우에하라 성까지 철퇴한 것은 전투 후로부터 반 달 가까이 경과한 3월 5일이었다.

  이 우에다하라의 패전은, 다케다군이 전장에서 버텨냄으로써 형식상으로는 무승부였으나, 그 손해의 크기로 본다면 실질적으로는 패배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 후 무라카미군은 사쿠 군까지 쳐들어와, 4월 25일에 우치야마 성內山城에 불을 지른 걸로 봐도, 다케다군의 패배는 명백했다. 요시키요에 의해 통렬한 패배를 맛보았을 뿐 아니라, 수많은 장병이 죽거나 다쳤다. 하루노부는 지휘계통을 다시 조직하기 위해, 그 후 몇 개월간 다케다군을 재편성하는 데 보내게 되어, 그 동안은 무라카미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한편, 다케다군이 패퇴했다는 소식은 들불과 같이 시나노信濃 중남부로 퍼져 나갔다. 오가사와라 나가토키와 그 배하의 호족들은 기회가 도래했음에 용약하였고, 거취를 망설이던 호족들은 오가사와라 진영에 붙었으며, 다케다의 사키키타슈(先方衆, 다케다에게 복속된 시나노 호족들)가 된 호족들은 동요했다.

  이 정세를 좋은 기회라고 본 나가토키는 시모스와下諏訪를 세 번에 걸쳐 침공하여, 시모샤下社 주변을 불태우고 다케다 군의 태도를 살폈으나, 다케다 쪽에서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가토키의 본거지인 하야시 성林城에서는 유례없는 정도로 많은 규모의 군세가 모여 있었다. 이 현상에 기분이 좋아진 나가토키는, 군다이郡代 이타가키 스루가노카미를 잃은 스와 군을 제압하고 일거에 세력균형을 뒤집기 위해, 미야카와 강 전투 이래 궁색해져 있던 야지마 미쓰키요矢嶋滿淸 등 스와 니시가타슈西方衆를 내통시킨 후, 5천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시오지리 고개鹽尻峠로 향했다.

  7월 11일, 니시가타슈가 카미스와上諏訪를 침공하여 다케다 쪽의 스와 주둔자들이 우에하라 성으로 대피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노부는 드디어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오오이모리大井森에서 군세를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이 때 하루노부는, 스와의 실함失陷이 가져올 위험성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나가토키의 창 끝이 스와로 향하리라는 것도, 스와인들 중 일부가 배반할 가능성도 상정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하루노부가 시모스와가 제압되려고 하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는, 패배가 연달아 일어날 경우 입을 정치적 타격에 비하면, 시모스와를 잃으면서 생길 경제적 / 군사적 타격은 허용범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가사와라군에게까지 패하고, 스와 군을 완전히 잃어버린다면 이나 군 / 사쿠 군의 호족들은 일제히 배반하여, 다케다 가문의 시나노 지배는 뿌리부터 뒤집힐 가능성이 있었다. 하루노부는 다음 일전을 어떻게든 이겨야만 했던 것이다.

  문제가 되는 건, 하루노부가 우수한 전술 지휘관 다수를 한 번에 잃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하루노부는 발상을 전환시킴으로써 이를 극복하려고 했다. 오가사와라군이 멋대로 설치는 것을 묵인하고 아슬아슬할 정도까지 참고 참은 하루노부는, 아군의 약점을 상쇄하고 남을 정도로 적의 약점을 끌어내려고 한 것이다.

  이렇게 (7월) 18일, 다케다군이 진군을 재개했을 때, 카미스와에 주둔한 자들을 우려빼지 못하였던 오가사와라군은 공세를 단념하고 시오지리 고개까지 철수했다. 갑작스럽게 만들어낸 대군은 그 결함인 낮은 결속력을 노출하고 있었는데, 이 때 이미 오가사와라군은 내부 분열과 하루노부의 내통공작에 의해 통제가 어지럽히고 또 어지럽혀져 있었다. 나가토키의 장인인 니시나 도케(仁科道外, 아키노카미 모리아키安藝守盛明)는 작전방침을 둘러싸고 싸움을 벌인 끝에, 병사를 이끌고 퇴거해버렸고, 야마가山家 / 미무라三村 등은 하루노부의 뒷공작에 의해 (다케다군과) 내통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인 19일 이른 아침에 시오지리 고개에 가해진 급습은, 오가사와라군의 의표를 찌른 것이었음에도 실패로 끝났다. 좁은 고갯길을 힘들게 올라가서 공격한 다케다군은 다섯 번에 걸쳐 맹공을 반복하였으나, 나가토키가 이끄는 하타모토(旗本, 친위대) 부대의 역습을 받아 그 때마다 격퇴당했다.

  그러나 오가사와라군의 불협화음을 일시적으로나마 억누르는 효과를 발휘한 나가토키의 분전은, 다케다군의 여섯 번째 공격에 의해 힘없이 무너져내렸다. 하루노부는 군세를 미리 둘로 나누어, 직접 지휘하는 부대를 이끌고 고개에 정면공격을 가하여 나가토키의 하타모토 부대를 구속하는 한편으로, 노부시게(信繁, 하루노부의 동생 다케다 노부시게)가 이끄는 별동대를 캇츠루 고개勝弦峠를 넘게 하여 오가사와라군의 측면 배후로 진출시켜 놓았던 것이다.

  이 우회부대의 공격에 의해, 지금까지 방관만 하고 있던 내통한 제장들이 일제히 진채를 물렸고, 오가사와라군의 측면 배후는 싸우지도 않고 무너졌다. 오가사와라군은 새벽부터 묘시(卯刻, 오전 5~7시)에 이르는 2시간 사이에 6번의 공격을 받았고, 그 6번째는 측면우회에 의한 포위공격이었으나, 그렇다고 해도 무라카미 가문과 맞먹는 시나노의 양대세력으로, 효용驍勇하기로 알려진 나가토키가 이끄는 군대로서는 너무나도 어이없는 패배였다.

  이 하루노부의 결정적 승리는, 우에다하라의 패배에 의한 군사적 / 정치적 악영향을 메우고도 남을 효과가 있었다. 하루노부는 9월 6일 스와에서 사쿠로 침공하여, 마에야마 성前山城을 위시한 13개 성을 탈환했다. 그리고 10월 2일에는 치쿠마 군으로 돌아와, 하야시 성에서 고작 2리(약 8km) 떨어진 무라이村井에 성을 쌓기 시작했다. 사쿠 군의 태반을 탈환했을 뿐 아니라, 나가토키의 본거지에 목덜미 깊숙히 칼날을 들이민 것이다. 오가사와라 총령가의 허리를 무너뜨리면서, 하루노부는 시나노에서의 공세축을 일원화시킬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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