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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다케다 신겐의 시나노 평정작전 (3)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8호(2001년 8월호) 50~65쪽의 기사인, 카와이 히데오河合秀郞 씨가 집필한《풍림화산, 신슈 제압 - 다케다 신겐, 젊은 날의 고투苦鬪와 차질》를 번역한 것으로. 1541년 아버지를 내쫓고 가이甲斐 지방의 영주가 된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당시의 이름은 다케다 하루노부武田晴信)이 이웃 지방인 시나노信濃 땅을 침공하여 그 대부분을 지배하에 두기까지(즉 나가오 카게토라=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과 대립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벌인 십 수년간의 경과를 다루고 있습니다.


  제 2차 사쿠佐久 침공

  텐분 15년(1546) 5월 3일, 하루노부晴信는 다시 사쿠로 침공했다. 3년 전에 항복한 오오이 코다이大井高台의 아들인 사에몬노죠 사다키요左衛門尉定淸가 우치야마 성內山城에 농성하여 저항할 태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사다키요의 봉기는 오오이 일족 뿐 아니라, 시가 성志賀城의 카사하라 신사부로 키요시게笠原新三郞淸繁와 코즈케上野 지방 칸라 군甘樂郡 스가와라 성의 타카다 노리요리高田憲賴와 연대한 것이었는데, 그 배후에는 간토 간레이關東管領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노리마사山內上杉憲政의 지원이 있었다.

  성망聲望이 쇠퇴해간다고는 하나, 간토 간레이가 한 번 병사를 동원하면 간토 8주 중 6개 지방 정도에서는, 그 과반 정도가 군역에 응하게 만들 힘은 존재했다. 실제로, 3개 지방 정도의 영지를 가진 영주에 필적하는 커다란 세력이었다. 그렇기에 하루노부와 중신들은 즉각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간토의 정세 추이를 긴장하며 지켜보게 되었는데, 얼마 안 가 길보가 들어왔다. 카와고에河越를 포위중이던 우에스기군 수만 명이 4월 24일, 호죠군北条勢의 기습을 받아 당장은 재정비하기도 힘들 정도의 대패를 당한 것이다.

  다케다군이 5월이 되어 출진한 배경에는, 이러한 간토 정세의 호전이 한 몫했다. 다케다군은 우에스기군의 구원을 기대하고 있던 오오이 사다키요의 불의를 찌르는 형태로, 5월 10일의 공격으로 우치야마 성내의 물줄기를 끊는 데 성공했으나, 5월 14일의 공격은 역으로 격퇴당했고, 사다키요는 혼구루와本曲輪만이 남은 상태에서도 계속 버텼다. 성 공격은 일진일퇴의 추이를 보이며 교착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다케다 군은 시모이나 군下伊那軍의 참진 등에 의해 축차 기세를 회복하여, 저항을 단념한 사다키요는, 5월 21일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사쿠 군을 거의 제압한 하루노부는 다음 해인 텐분 16년(1547) 윤 7월 9일 ~ 13일에 걸쳐, 오오이 미카와노카미大井三河守를 선봉으로 삼은 세 번째의 사쿠 침공군을 이끌고 출진했다. 목표는 카사하라 키요시게의 본거지, 시가 성이었다.

  작년의 공세로 오오이 일족이 드디어 굴복하고, 사쿠 군의 태반이 다케다 가문의 지배하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던 키요시게만은, 의연히 저항을 계속했다. 다케다군이 코즈케 접경지방과 가까운 우치야마 성을 차지함으로써 우치야마 고개內山峠를 통한 연락은 차단당했으나, 시가 성은 우스이 고개碓氷峠 방면에서 도래할 간토로부터의 원군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하루노부는 고립된 성에 대한 공격임에도 불구하고 5천여 명의 고슈 군甲州勢과 수천 명의 스와 군諏訪勢 / 시모이나 군 등으로 구성된, 지금까지 (편성한 바) 없던 대군을 투입한 것이다.

  24일, 시가 성을 개미 하나 빠져나갈 틈도 없이 엄중히 포위한 다케다군은, 유시(오전 5시 ~ 7시)에서 오시(오전 11시 ~ 오후 1시)까지 공격을 반복하여, 다음 날인 25일 미시(오후 1 ~ 3시)에는 성의 물줄기를 끊는 데 성공했다. 타카다 노리요리 부자父子의 원군이 입성해 있던 탓에, 인마로 가득 차 있던 시가 성은 심각한 물 부족에 빠졌다.

  시가 성이 대군에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즉각 원군을 파견했다. 카와고에 포위전에서 호죠군의 역습을 받아 패배한 이래, 패퇴에 패퇴를 거듭하던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이었으나, 그래도 아직 코즈케 서부의 제장들을 중심으로 한 그 군세는, 다케다군에 비해 손색이 없는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만한 병력을 투입하면서도 노리마사 자신은 이 때 출진하지 않고, 우에스기군은 일원적인 지휘계통이 없는 채로 시나노로 향하게 되었다.

  8월 6일, 우스이 고개를 넘은 우에스기군은 다케다군의 기습을 받고 궤멸당했다. 이타가키 스루가노카미(板垣駿河守, 노부카타信方) / 아마리 비젠노카미(甘利備前守, 토라야스虎泰) / 요코타 빗츄노카미(橫田備中守, 타카토시高松), 타다 산파치(多田三八, 미쓰요리滿賴)들이 인솔한 고슈군 / 스와군이 은밀히 이동하여, 오다이하라小田井原에서 우에스기군을 복격(伏擊, 역주 : 매복해 있다 공격함)한 것이다. 제장들 자신의 판단으로 응전할 수 밖에 없는 우에스기군은, 마찬가지로 주장이 없는 상태였음에도 연대하고 있던 다케다군의 공격에 호되게 농락당하며 완전히 무너졌다. 패주한 우에스기군은 주된 무장만 십여 명을 잃고, 목이 잘린 잡병들의 수를 따지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대참패를 당했다.

  하루노부는 전사한 우에스기군의 잘린 목을 전시하여, 다케다군의 중포위망에 빠진 이래 물 부족 상황에서도 견뎌온 성 병사들은, 엄청난 숫자의 수급들을 보고 일거에 그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8월 10일에 시작된 다케다군의 총공격으로 시가 성은 외곽 방어선이 모두 불타고, 혼구루와만이 남은 벌거벗은 성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11일, 드디어 다케다군의 공격에 굴복하여 성주 카사하라 키요시게는 전사, 주된 제장들은 생포되었다.

  항복한 시가 성에 대한 처분은, 당시의 상식으로 봐도 상당히 가혹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포로가 된 성 병사들은 노예 노동자로 삼고, 성 안에 있던 부녀자들은 첩이나 위안부로 분배하게 되나, 친족이 그들을 사들여 구해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시가 성의 경우 그 지불해야 할 몸값이 상당히 비쌌던 듯하여, 사들여 구해내지 못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상급 무장들의 아내와 딸들은 중신들에 대한 보상으로서 분배되어,《묘호지키妙法寺記》는 오야마다 노부아리小山田信有가 성주(城主, 전사한 카사하라 키요시게)의 부인을 하사받은 것을 특기特記하고 있다. 하루노부는 부동산적인 이익을 급부할 수 없었던 가신들에겐, 동산을 급부함으로써 그 충성심을 사려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4년에 걸친 사쿠 평정전은 드디어 종식되었는데,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을 시나노에서 구축함으로써, 다케다군은 시나노 북부 최대의 영주,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淸와 대치하게 되었다. 진흙탕 속의 2정면 작전을 종결지은 지 얼마 안 되어, 다케다 가문은 시나노의 2대 세력인 무라카미 가문村上家 / 오가사와라 가문小笠原家과 2정면 작전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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